너희 하나님을 보라
본문 : 이사야 40: 9-11
설교 : 김창인 목사(광성교회)
너희 하나님을 보라는 말씀에서 너희 하나님이란 말은 네가 믿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본문에 아름다운 소식이라고 하는 말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이 아름다운 소식의 내용이 "너희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너 자신을 보라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사람을 보면 실망할 것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기대를 걸고 다른 사람을 믿었다가는 완전히 낭패를 당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믿을 바가 못되기 때문입니다. 또 나 자신을 아무리 보아도 나 자신은 이렇다하고 내놓을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역시 나 자신을 보는 사람은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 자신은 부정하고 나 자신은 무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보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티도 없으시고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보는 자는 항상 소망 중에 살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냐 하는 것을 본문이 잘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I. 임재하시는 하나님 (9-10 상)
우리가 미치지 못할 만큼 멀리 계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가 전혀 가까이 할 수 없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임하여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즉 임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10절 상반절에 보게되면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 팔로 다스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오실 적에 강자로 오시는 겁니다. 우리를 잘 다스려주시기 때문에 이 강자가 우리와 함께 하시면 악한자가 우리를 헤치지 못하고 우리를 범접하거나 우리를 만지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임재하시는 하나님! 강한 남편이 나를 잘 보호해주면 누가 나를 건드리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강자로 오셔서 우리를 다스려 주신다 하시니 얼마나 그 하나님이 믿음직스럽고 복된 소식이냐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보라 하는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봅니까?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보라는 것은 볼수 있기 때문에 보라는 것이 아닙니까? 도대체 볼 수 있는 하나님이라면 어떤 분이십니까?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신다고 하심은 장차 오실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중적 예언의 의미가 있습니다. 우선 바벨론에서 해방시키실 하나님을 기대해 보라는 뜻입니다. 바벨론 나라에 포로가 된 이스라엘 백성, 그 강한 바벨론 나라를 누가 쳐부수고 바벨론 나라에서 포로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내어 가나안땅에 나라를 세워 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강자로 오셔서 바벨론을 멸망시키시고 고생하며 포로 생활하는 백성들을 이끌어내고 그 다음에는 가나안땅에 다시 나라를 회복시켜 주실 그 하나님을 보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가 고생 중에서는 낙심할 수밖에 없지만 그런 강자로 임하여 오시는 하나님을 보게되면 결단코 낙심이란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고통스럽고 정말 억울하고 고난 속에서 헤어날 길이 없다 싶을 때 하나님이 강자로 임하셔서 우리를 끌어내 주시고 통치해주시는 그 하나님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그 다음에 이중적인 예언으로서 메시아를 보라는 뜻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4절을 보게되면 예수님께서 산돌이심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돌이 살았다는 말입니다. 막 움직이고 역사하고 큰 일을 해놓는 산돌의 역사적인 배경은 구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야기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한 번은 느부갓네살왕, 즉 바벨론왕이 꿈을 꾸고 잊어버렸습니다. 희한한 꿈은 꿈인데 잊어버리고 안타까울 때 바벨론에 있는 모든 박사들, 그리고 술객들, 점쟁이들을 다 불러모았습니다. 내가 꿈을 꾸고 잊어버렸는데 찾아놓으라는 겁니다. 본인이 꿈을 잊어먹고 누구에게 찾아내라는 겁니까? 그러나 왕으로서는 할말이 있습니다. "너희들이 남의 운명을 다 알아 맞추는 점을 쳐준다고 하면서 내가 잊어버린 꿈을 찾아 주지 못한다면 말이 안 된다"는 겁니다. 만약 꿈을 찾아 주지 못하면 한칼에 죽여버리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다니엘은 박사인지라 꿈을 못 찾아주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그는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세 친구를 불러서 중보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여러분들도 이렇게 어려운 일을 당하거든 중보기도를 부탁하십시오. 다니엘은 자기 자신도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환상 중에 느부갓네살 왕이 꾼 꿈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왕의 꿈을 고스란히 되찾아 주었습니다. 왕에게 달려갔습니다. "임금님! 임금님이 꾼 꿈은 사람 모양으로 생긴 큰 우상을 보셨습니다. 머리는 금으로 되어 있고 가슴과 팔은 은으로 되어 있고 배와 넙적 다리는 동으로 되어 있고 종아리는 철로 되어있고 발과 발가락은 철과 흙이 뒤죽박죽이 되어 섞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람의 손을 절대로 대지 아니한 뜨인 돌이 나타났습니다. 돌 자체가 움직이니 산돌이 아닙니까? 그 돌이 우상을 박살내버리고 가루로 만들자 바람이 불어 흔적도 없어지고 돌은 점점 커지더니 천하에 산을 이루었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신통하게 찾았는지! 왕은 그 우상에 대한 해석을 해보도록 명하였습니다. 이때 다니엘이 해석을 해주기를 이 우상은 바로 인류 역사가 흘러가는 시대를 보여주는 우상입니다. 그러니까 금의 시대가 있는데 그 시대는 바벨론, 곳 느부갓네살 왕의 시대요 그 다음 은의 시대는 메데바사시대이고 또 그 다음에 동의 시대는 헬라시대입니다. 라고 해석했습니다. 여기까지는 나라 이름을 밝혀주는데 그 다음에 가서는 종아리의 철의 시대는 더 강력한 나라로서 그 나라는 어느 나라라는 것을 밝혀주지 않습니다. 바로 그 나라가 헬라 나라를 뒤엎고 세계를 통치했던 로마입니다. 로마시대는 벌써 끝난 지가 1천년이 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발과 발가락의 시대를 살아가는데 그것도 발가락 끝을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세상 말세가 다 됐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뜨인 돌이 문제입니다. 이 돌은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산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뜨인 돌이 우상을 박살내듯이 인류 역사를 완전히 끝내버린다는 겁니다. 그리고 돌이 점점 커져서 산을 이루는 것은 그리스도의 왕국, 메시아의 나라가 건설됨을 뜻합니다. 즉 천년왕국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위에 강자로 오시고 그 다음에는 이 땅에 모든 역사를 끝내고 그리스도의 나라를 이룩하시고 우리는 그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을 하게 됩니다. 즉 예수께서 이 땅위에 강자로 오셔서 통치하실 메시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없지만 이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볼 수 있는 하나님으로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바로 그 예수님을 보라는 뜻에서 먼 장래를 두고 예언적 선포를 해주신 것이 본문입니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재림하사 강자로 오셔서 메시아 나라를 세우시고 통치하시는 이 예수를 바라보라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고생스러워 낙심하다가도 이 예수를 바라다보게 되면 희망을 가지고 강하고 담대하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개인과 여러분의 가정에 강자로 임재하셔서 잘 이끌어주시고 다스려 주시면 여러분들 가정에는 소망이 넘칠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기대와 소망 속에 살아가야 합니다.
이란의 수도 테헤란 박물관에는 "16세기 눈물단지"라고 하는 조그마한 단지가 있습니다. 크지는 않고 마개를 막게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눈물단지의 역사적 배경은 500년전, 그러니까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땅속에 묻혀있던 단지 하나를 발굴하여 박물관에 갖다 둔 것입니다. 이란이라는 나라는 사막이 많으니까 농사를 지어 살수는 없고 장사를 주로 합니다. 먼 나라까지 왔다갔다하며 장사를 합니다. 즉 바벨론 나라에서 물건을 사서 애굽에 팔고 애굽의 물건을 사 가지고 바벨론에 갖다 팔곤 합니다. 그러다 보니 한 번 장사길 떠났다하면 1년이 걸려 돌아 오기도합니다. 결혼한 부부가 어떻게 합니까? 신혼부부인데 며칠동안만 신혼부부로 살고 신랑은 돈을 벌기 위하여 먼길을 떠나야 합니다. 갓 결혼한 아내가 낮에는 일을 하노라면 그럭저럭 시간을 보내는데 밤이면 어떻게 외로움이 뼛속까지 사무쳐오는지 견딜 수가 없어서 눈물이 펑펑 쏟아집니다. 남편이 그리워서, 혹시 오늘이나 돌아오지 않을까 내일이나 돌아오지 않을까? 남편이 돌아오기만 하면 아무 불편이 없도록 다 준비해놓고 기다리는 겁니다. 그때 눈물이 쏟아지면 수건으로 닦아버리지 않습니다. 눈물단지를 가져다가 한 방울을 아껴가면서 받아놓습니다. 마개로 꼭 막아둡니다. 그 다음날 눈물이 또 쏟아지면 다시 눈물단지로 갖다가 받아놓습니다. 그때에 남편이 6개월만이나 혹은 1년만에 돌아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리고는 달려가서 남편에게 주는 가장 값진 선물이 바로 이 눈물단지입니다. 그러면 남편이 마개를 열고 눈물이 많을수록 흐뭇해한답니다. 남편은 눈물단지로 아내의 사랑을 확인하는 겁니다. 이때 남편이 아내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은 그 동안 온갖 고생과 추위 그리고 더위를 무릅쓰고 장사하여 모은 돈 보따리를 안겨주는 것입니다. 서로 서로 사랑을 확인하고 거기서 행복을 찾곤 했습니다. 이 16세기 눈물단지를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적용시키면 우리 신랑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에 가서 우리 있을 곳을 예비하시고 다시 오신다고 약속 하셨습니다. 주님 오실 지라도 부끄러움 없이 영접할 수 있도록 그 날 그 날의 삶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이 말세에 강자로 재림하셔서 메시아의 왕국을 건설하십니다. 그 예수님을 늘 바라보고 기다리며 사모하며 살 때에 항상 소망이 넘칠 것입니다.
II. 심판하시는 하나님 (10 하)
10절 하반절의 말씀을 보면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으며"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오기는 오셨는데 상급을 가지고 오셨다는 뜻입니다. 한 손에는 상급이 있고 한 손에는 채찍이 있어서 선하고 충성된 사람에게는 상급을 주시고 악하고 게으른 사람에게는 채찍을 들어 가차없이 징벌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오른손에 율법을 갖고 왼손에는 은혜를 갖고 인도하신다고 루터는 말했습니다. 그래서 한 손에는 상급이 있고 한 손에는 보응이 있습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 즉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들에게 말할 수 없는 축복이 되고, 영광이 됩니다. 우리가 착하게 살고 충성되게 살아도 온갖 불의한 사람들에게 억울한 일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착하게 살고 믿음으로 살아야됩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식으로 살아갈 때 억울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좋은 게 좋다는 식이라면 도대체 정의는 어디서 찾을 것입니까? 착하고 충성된 사람에게는 상급을 주는 것이 하나님의 공평입니다. 악하고 게으른 사람에게는 채찍으로 징벌하시는 것이 또한 공평입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을 많이 한 사람에게는 보수를 많이 주고 일을 적게 한 사람에게는 적게 주고 일을 안한 사람에게는 안주는 것이 공평임을 알아야 합니다. 많이 하나 적게 하나 똑같이 준다면 이것이 어떻게 공평한 겁니까? 오히려 불공평한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들에게 축복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심판은 상급을 위한 심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아무리 억울해도 선하게 살고 아무리 괴로워도 충성하며 살아야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상급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 번은 어떤 부자가 외국에 가면서 종들을 불러 자기의 전 재산을 금으로 바꾸고 저울에 달아서 나눠줬습니다. 그래서 한 종에게는 다섯 달란트, 그 다음에는 두 달란트, 그 다음에는 한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그런데 다섯 달란트 맡은 종은 바로 가서 장사했습니다. 이것이 충성입니다. 주인이 맡겨주시면 즉 우리 주인 되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재능의 달란트를 맡겼으면 내일로 미루지 말고, 내년으로 미루지도 말고 즉시 충성 해야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람직한 충성입니다. 금년이 아닌 내년으로 미룰 수는 있지만 그것은 주인이 원하는바가 아닙니다. 두 번째로 두 달란트 받았던 종을 보면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을 그대로 본받았습니다. 즉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가서 그와 같이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바꿔 말하면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이 두 달란트 받은 종에게 본을 보여줬다는 말입니다. 내가 남이 잘하는 것을 본받아 충성하는 것도 좋지만 본을 보여주는 충성이 더 좋습니다. 바로 가서 충성하고 본을 보여준 것입니다. 오랜 뒤에 주인이 돌아와서 계산해보니 다섯 달란트가 남았습니다. 이것은 다섯 달란트 맡은 종이 장사해서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난 후에 이제는 됐다하고 주인 돌아올 때까지 놀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다가 주인이 돌아와서 계산해보니까 다섯 달란트가 남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래도록 충성한 겁니다. 1년2년이야 누가 충성 못합니까? 오래도록 계속해서 충성하는 것이 귀한 겁니다. 그리고 네 번째로는 주인이 멀리 떠났기 때문에 누가 수고를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칭찬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이웃이 볼 때 어리석게 보였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누가 뭐래도, 주인이 보든지 안보든지 알아주든지 안 알아주든지 오직 충성뿐이었습니다. 주인이 돌아와서 다섯 달란트 본전에 남긴 것까지 그 종에게 모두 다 주고 한 달란트 맡은 사람에게서 빼앗은 것도 모두 주었습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온갖 좋은 칭찬을 다 받고 마지막에는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지 않습니까? 이처럼 선하고 충성된 종에게는 상급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요 보응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한 달란트 맡았던 종을 보십시오. 땅에 묻어두었다가 한 달란트만 가지고 나와서는 얼마나 주인을 원망합니까? 당신은 구두쇠요 당신은 노랭이도 보통 노랭이가 아닙니다. 심지 않은 데서 거두려 하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려고 하니 세상에 이런 구두쇠가 어디 있습니까? 라고 하며 불평이란 불평은 다 늘어놓습니다. 보십시오. 종이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오래도록 누구의 것을 먹고살았습니까.? 주인의 것을 다 먹은 겁니다. 주인의 좋은 옷을 다 골라 입고 그 주인의 집에서 온갖 혜택을 다 누리면서도 주인의 일은 손톱 끝만치도 안 했습니다. 그런 주제에 뭘 잘했다고 누구를 원망합니까? 오래도록 주인의 혜택이란 혜택을 받고서도 주인의 일을 안 할 뿐만 아니라 자기 일만 1년 365일 보고 돌아다녔습니다. 우리 교인들 중에는 이런 사람이 적은 것은 아닙니다.. 오늘 우리들도 1년365일 도대체 누구의 것을 먹고살며 누구의 것을 입고 삽니까? 우리의 이름으로 등기가 되어 있지만 이 집이 우리의 것이냐 그 말입니다. 하나님의 집이 아닙니까? 하나님 집에서 온갖 좋은 혜택은 다 누리고 살면서 하나님의 일은 손톱 끝만치도 안하고 그저 더 잘 안 해준다고 원망하고 죽을래야 죽을 짬도 없다고 하면서 제 좋은 일만하고 다닙니다. 그 주제에 누구를 원망합니까? 그때 주인 되신 하나님이 뭐라 그럽니까. 악하고 게으른 종, 이 쓸모 없는 무익한 종을 내쫓아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나중에 쫓겨나서 탄식하며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이런 사람들에게는 채찍을 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이것이 공평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심판하십니다. 그렇기 까닭에 아무리 억울해도 선하게 살고 아무리 고되고 고통스러워도 충성스럽게 살면 상급을 주십니다. 시비를 가려주시고 보응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낙심하지 맙시다. 때가 이르면 거두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고 강하고 담대하게 살아 승리하기를 바랍니다.
III. 목자 되시는 하나님 (11-)
11절을 보면 "그는 목자같이 양 무리를 먹이시며 어린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목자가 되시는 하나님은 먹이시며 안으시고 인도하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 가지를 말하고 있지만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은 목자가 되신다는 겁니다. 결국 목자 되신 하나님을 보라는 것입니다. 양은 항상 목자를 보고 살 듯이 우리 하나님의 백성 된 성도들은 항상 하나님을 목자처럼 바라보아야 합니다. 목자가 되신 하나님은 "양 무리를 먹이시며" 하신 말씀처럼 우리를 먹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 한 번은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때 당시 유대나라, 이스라엘 나라에는 많은 사람들이 양을 치고 목축업을 했습니다. 그때에 목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삯군 목자였습니다. 삯군목자는 품꾼으로서 일당을 받고 일하기 때문에 시간만 채우면 그만입니다. 제 시간에 나왔다가 시간만 되면 양이야 죽든지 살든지 내 알 바가 아니라 하고 가버리는 것입니다. 절대 책임을 안 집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제시간만 채우고 품삯을 받으면 그만인 사람입니다. 양이 풀을 잘먹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아니합니다. 병들었든지 건강하든지 시간만 지나가면 됩니다. 그리고 악한 짐승이 달려들면 도망가고 맙니다. 양을 위해서 희생할 각오가 전혀 되어있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런 목자를 만난 양은 참 불행합니다. 이런 목자를 가리켜 삯군 목자라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참 목자가 있습니다. 참 목자는 주인이 직접 양을 치는 경우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경우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고 양을 조금이라도 더 먹이고, 또 좋은 꼴을 먹이려고 애씁니다. 그래서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고 푸른 초장으로 인도합니다. 그래도 부족하면 꼴을 베어다가 먹여주고 양을 위해서는 살진 꼴, 기름진 꼴을 준비합니다. 악한 짐승이 나타나면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 싸워 물리치고 양을 지켜줍니다. 이런 참 목자를 만난 양은 참 행복합니다. 참으로 믿음직한 목자입니다. 이 참 목자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나는 양의 목자라 즉 참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참 목자를 만난 양이 복된 것처럼 우리 예수님을 목자로 만난 우리 성도들은 복된 사람입니다. 우리가 가난하고 조금 어려움이 있다고 낙심할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다 알아서 부족함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양에게 꼴을 풍성히 먹이듯이 여러분들의 삶을 풍성케 하십니다(요10:10). 목자 되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으시고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어린양을 품에 안으시며"라고 했습니다. 어린양을 품에 안는다는 것은 무엇을 가르치는 것입니까. 건강한양, 그리고 다 큰 양은 안을 필요가 없습니다. 제발로 잘 뛰어 다니기 때문입니다. 잘 인도만 해주면 잘 놀고 잘 먹으니까 품에 안아줄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에서 어린양이라고 하는 것은 약자를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어린양은 더위를 못 견딥니다. 추위도 못 견딥니다. 그리고 어린양은 약하여 병에 잘 걸립니다. 그 많은 양들 중에서 어린양을 모아 가지고 고이 품에 안아주시며 더위와 추위 그리고 병드는 이 모든 경우에서 약자를 잘 돌보아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오늘날 이 말씀을 우리들에게 실제적으로 적용해 보면 믿음이 강한 사람들은 그냥 내버려두고 심방을 안가도 됩니다. 잘 봉사하고 열심을 냅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심방을 해줘야 되고 또 자주 찾아서 위로해줘야 되고 기도해주며 부지런히 돌보아주어야 합니다. 믿음이 약한 분이 있으면 주님께서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돌봐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몸이 약해서 병든 분들은 하나님이 계시면 이럴 수가 있나하고 원망스러울는지 모르나 하나님은 그럴수록 더 관심을 가지시고 더 큰사랑을 나타내준다는 사실을 꼭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아들 딸들을 길러보시면 아시지 않습니까? 건강한 아들딸들 보다 병든 아들딸들에게 더 많이 관심을 갖게되지 않습니까? 얼마나 애착이 더 갑니까 얼마나 더 정성을 더 쏟아 부어 줍니까? 부모가 계시다면 이럴 수가 있나 라고 할 수는 없잖습니까? 더 잘 안 해준다고 원망할는지 모르나 어머니는 다른 아들딸들보다 갑절이나 열 배나 더 잘해주지 않습니까? 병들고 약했을 때는 부모님의 사랑을 갑절이나 받는 기회가 되는 겁니다. 혹시 육신이 병이 들었으면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혜택을 열 배나 받는 기회인줄로 알고 오히려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약할 때 나를 돌보아주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낙심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목자로서 즉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십니다. 젖먹이는 암컷 양들을 보십시오. 새끼를 잘 낳는 양이 있고 낳지 못하는 양이 있는데 새끼를 낳지 못하는 양은 폐기처분하고 맙니다. 그러나 새끼를 잘 낳는 양에게는 온갖 혜택을 주고 잘 돌봐주고 잘 인도해 줍니다. 그래서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아들이 결혼하여 며느리를 맞이했는데 며느리가 10년 동안 애기를 못 낳게 되면 그 애기 못 낳는 며느리는 시아버지와 시어머니의 사랑은 고사하고 멸시 천대를 받게 됩니다. 애기를 낳으면 좋겠는데 낳지를 못하니 시부모는 무척 아쉬워합니다. 그러다가 10년 만에 애기를 잉태해보십시오. 잉태했다하면 그때부터 가만히 앉혀 놓습니다. 시아버지와 시어머니가 무척 위해주곤 합니다. 그러다가 애기를 낳아보십시오. 일어나지도 말고, 일하지도 말라고 하며 온갖 시중을 들어주고 온갖 좋고 맛있다는 것은 다 갖다 바쳐주는 겁니다. 그리고 남편은 들어오면서 슬그머니 감춰 가지고 아버지 어머니한테 들키지 않게 마누라에게 다 갖다 먹이잖습니까? 온 가족의 온갖 사랑은 애기 어머니가 다 받는다 그 말입니다. 그리고 그 애기를 잘 키워보십시오. 그 가정에 영광이 되지 않습니까? "젖먹이는 암컷들"이라는 말씀에 깊은 뜻이 있습니다. 애기를 품에 안고 젖을 먹이는 며느리의 모습을 보면서 시아버지는 무척 흐뭇해합니다. 젖먹이는 암양, 젖먹이는 며느리가 얼마나 귀엽고, 얼마나 자랑스럽습니까? 이처럼 오늘날 우리교회를 두고 생각해 보면 젖먹이는 교인들이 얼마나 훌륭하냐는 그 말입니다. 내가 임신해서 애기 낳아 젖먹이는 교인들, 열심히 전도하고 어려운 일을 당하면 성경을 이야기해주고 위해서 기도해주고 잘 키우며 젖을 먹이는 전도자들을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랑해주시고 온갖 도움을 주시고 특별히 인도해주신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목자 되시는 하나님이 젖먹이는 사람들 즉 양을 낳고 양을 키우고 젖먹이는 전도자들을 특별히 사랑해주시고 인도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목자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열심히 전도해야 하겠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들에게 너희는 하나님을 보라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은 포로 된 백성을 구속하시려고 강한 자로 임하시는 분이십니다. 즉 자기 백성을 찾아 임재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상급과 보응을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상을 줄만한 사람에게는 상을 주시고 징벌할 자는 징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가 하면 자기 백성을 온순히 인도하시는 목자이십니다. 하나님을 보고 믿고 충성을 다 바쳐야 하겠습니다.
'설교자료 > 이사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 60:1]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_유경재 목사 (3) | 2024.09.02 |
---|---|
[종려주일 설교] 사 53:4 십자가를 바라보자 (2) | 2024.03.23 |
[사55:1] 오라 부르라 돌아오라_김상순목사 (0) | 2022.07.08 |
[사9:1] 메사야 예언에 관한 고찰 (0) | 2019.12.14 |
[사9:1] 제발 싸우지 말라 (0) | 2019.04.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