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사람들
본문 요4:23-24,롬12:1-2
부산진교회 /이종윤목사
서울에 있는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주일을 엄격하게 지키기를 원하는 사람들과 이러한 생각에 쉽게 수긍하지 않고 주일을 자유롭게 보내려는 청년들 사이에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지금도 보수적인 시골 교회는 주일날 무엇을 사먹거나 장사하는 일을 금하고 있는데, 다급해진 당회가 여러 모로 의논한 끝에 심포지움을 열기로 하고 교회의 중직자들과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들과 청년 대표들이 함께 모여 토론을 벌였습니다.
교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와 비슷한 갈등을 흔히 경험합니다. 이런 문제는 젊은 세대 안에서만 일어나는 부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지금 제가 여기서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주일날 물건을 팔고 사는 것이 성수주일에 위배되는가 아닌가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올 해 우리 교회의 목표가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되자고 했는데, 한 해가 저무는 이 마지막날에 다시 한 번 예배의 중요성을 되새기면서 우리가 드리는 예배 속에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어서 여러분의 삶이 매 주마다 세 힘을 얻기 바라는 마음으로 주일성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배에 대한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예배에 대한 오해는 구약의 안식일과 신약의 주일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 같습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주일은 안식일의 상관 관계는 어느정도 서로 신학적인 연관을 갖는 것은 사실이나 완전히 같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천지창조와 관련되어 제정된 안식일은 쉼(rest)의 개념이 중심이었습니다. 창 2:1-2에 보면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그하나님의 창조의 긍극적 목적은 모든 피조물의 조화 질서와 평화를 유지하는 안식에 있습니다. 안식이 이토록 소중한 것이기에 출 20:8-11에서 보는대로 십계명 중 하나로 철저하게 지키도록 명령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후 안식일에 새로운 의미가 부여됩니다. 그러다가 신 5:12-15에 보면, 안식일은 단순히 쉼의 개념을 넘어서 이스라엘민족이 애굽의 속박으로부터 구원받은 구속사건을 기념하는 날이라는 개념으로 확장됩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할 의무는 구약의 율법을 통해 수 없이 강조되었습니다.
분명히 구약의 안식일은 신약에 있어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백성들이 하나님이 주는 참 기쁨과 평화를 누리게 될 구속을 바라보는 완전한 안식을 바라본 하나의 그림자였습니다. 그런데 두 날이 구속사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질적으로 같지는 않습니다. 구약의 이 안식일 개념이 신약에 넘어 오면서부터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에서 구속받은 사건과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 때문에 생겨난 죽음의 세력을 극복한 부활 사건을 기념하는 내용이 첨가되어 Lord's Day 즉 주님의 날, 줄여서 주의 날 또는 주일이라 불리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이후 유대교가 아닌 모든 기독교는 안식일을 지키는 대신 주님의 날을 기억하고 주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동시에 우리도 언젠가 예수님처럼 부활할 것을 희망하는 그런 감사의 잔치, 감사의 축제를 펼치는 날로 지키게 된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명령했기 때문에 만일 하나님의 이 명령을 거역하는 자들에게 내리실지 모르는 크고 무서운 징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더 더구나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의무사항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주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입니다. 주일의 중심은 문자 그대로 율법이나 제도나 인간의 편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이 주일을 거룩한 날로 구별하여 지키는 것은 구약시대에 안식일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어떤 형벌의식과는 질적으로 다른 축제적 성격을 띄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일어난 가장 중요하고 커다란 사건이 무엇입니까? 십자가로 말미암는 구속 사건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주일은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구속받은 성도들이 그 은혜에 감격하여 기쁨으로 예배하는 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하나님의 은혜를 진정으로 감사를 올리고 찬송을 올리며 경배하는 날이 아니라, 주일을 안식일의 정신과 꼭 같은 것인 줄 알고, 하나님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했기 때문에 이 날을 형식적 의무로만 지키는 경우가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이는 주일 예배의 근본정신이 얼마나 무시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안타깝기 그지없는 사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배를 통한 영적 유익을 실제로 경험하며 예배의 축복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정하신 날에 하나님께 경배하고 찬양하는 것이 너무 너무 즐겁고 보람이 있어서 그 날에 다른 어떤 더 가치 있는 일을 찾지 못하기 때문에 거룩해지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하나님의 거룩한 만져 주심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중에 하나님의 영이 나로 하여금 참회하게 하고, 회개한 심령들을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의 회복의 손길과 위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오랜 시간의 예배를 모두 마쳤는데도 예배 중에 주신 말씀을 붙들고 엎드린 채 기도하는 사람이 일어나야 하고, 옆에 있는 지체의 어깨에 기대어 자신의 영혼상태를 고백하며 우는 성도들이 있어야 합니다. 예배를 마친 후에도 오랜 시간 예배당에 남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거나 받은 은혜들을 지체들과 나누거나, 예배를 통해 드러난 자신의 영혼상태를 근심하며 기도하고 싶어해야 온전한 예배를 회복했다 할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확신합니다. 우리 자신이 소속한 교회의 부흥을 위하여 그 어떤 프로그램을 찾아 헤매는 데 쏟는 정성과 노력 보다, 오히려 하나님과 만남이 있는 예배가 되게 해달라고 마음을 다하여 기도하는 데 바친다면 주일이 훨씬 더 거룩해지리라 믿습니다.
여러분은 구약성경 도처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율법과 절기를 엄격하게 지키고, 성회 때 마다 하나님께 재물을 바쳤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그러한 종교적 행위를 기뻐하지 않으신 적이 많았다는 사실을 발견하실 수 있을 겁니다. 하나님이 왜 그들이 안식일을 그렇게 열심히 지키는대도 불구하고 그들의 제사를 즐겨 받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그들의 외적 모양은 경건하였으나, 그들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참된 경외심을 잃어버린 그들의 종교적인 행위는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스러웠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예수님께서 자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지적하신 말씀 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 한 예로 마 23:27,28에 보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과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고 했는데,
여러분! 무덤 입구에 하얀 색칠을 잘하여 깨끗하게 딘장했다 하더라도 그 속에 썩은 시체가 깨끗해 질 수가 있겠습니까? 겉 모양이 아무리 경건하고 거룩하더라도 그들의 내면이 불경하다면 그것은 마치 깨끗이 단장한 무덤 내부에 쩍은 시체가 들어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으면서 형식으로는 종교적 형식을 갖추고 그럴듯하게 앉아 있는 사람들, 하나님의 마음과 멀리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외식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자기 의로 말미암아 그들의 내면에 시체와 같은 죄악과, 부패들을 보지 못하는 영적인 무지를 깨우치고자 하신 것이었습니다. .
예수님의 이 같은 비난은 내적인 변화 없이 형식만 갖추고 있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로 하여금 그들의 내면의 변화를 촉구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그렇다고 해서 형식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모든 내용은 그 내용을 담을 형식이 필요합니다. 형식이란 몸을 보호하고 몸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옷을 입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어떤 귀한 자리에 초대받으면 옷매무새를 고치고 예복을 입어야 하는 것처럼 왕이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감사한다고 하면서 아무렇게나 해서야 말이나 되겠습니까? 만일 자기가 어디 강연을 하거나 초대받은 손님으로 나아가면 얼마나 준비를 합니까? 자기가 가진 옷 중에 가장 깨끗한 옷을 입고 나아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듯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것도 자신이 갖출 수 있는 최고의 예절과 형식과 준비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일이 구약의 율법에 나타난 안식일이 아니라고 해서 주일을 지킬 때 아무런 형식도 필요 없으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자가 되었다고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지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무율법주의적인 생각은 결코 성경적이지 않는 것입니다. 자유에는 자유가 주어지는 만큼 책임도 따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자유함을 얻었다는 것을 진실로 깨달은 사람이라면 그는 더욱 더 자유의 소중함과 하나님 앞에서의 책임성과 조심성이 많아짐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가 말하는 자유는 진리 안에서의 참된 자유가 아니라 자기 마음과 본성에 따라 함부로 행동하는 방종에 익숙한 사람에 불과 할 것입니다. 저는 사람들의 심령에 참된 회복과 은혜의 풍성함에 젖어들면, 주일을 지키는 것이 초대교회 성도들과 거의 같아지리라고 생각합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주일을 자신의 편의를 위한 휴일이 되기보다는 그리스도를 위한 주의 날로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주일에는 그리스도의 소식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준비하며 자신의 모든 삶을 드렸던 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영적 은혜가 교회를 뒤덮는 일 없이는 우리가 드리는 신앙고백과 우리의 실재 삶은 이중적이 될 수밖에 없고, 우리의 삶이 기운차게 살아가지 못하고 은혜없는 예배를 드리면 드릴수록 더욱 더 무기력하고 공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로부터 각성을 경험하고 영적으로 새롭게 깨어나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되고, 그 분께로서 오는 하늘의 영광과 참된 영적 기쁨을 소유하게 될 때,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로 충만해질 것이고, 이렇게 그리스도에 대한 가슴 벅찬 사랑과 삶은 매 주일마다 드리는 예배 속에서 가장 강렬하게 뜨거운 감사의 눈물로 드려지게 될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의 만남을 새롭게 체험하고 그분의 임재를 경험할 때 우리는 주일이 특별한 축복의 약속이 있는 날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이렇게 될 때라여 여러분은 주일을 의무의 관점에서 이해하기보다 축복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일을 기다리게 됩니다. 사교적인 목적에서가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예배에 대한 사모가 내 심령을 적시게 되는 것입니다.
18세기 미 대륙의 영적 대각성과 부흥의 도구로 쓰임 받았던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가 목회하던 교회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그 마을에 다섯 살이 채 안 된 어린아이가 부모와 함께 에드워즈의 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예배당에서 돌아온 아이가 엄마에게 엄마, 나 구원받았어?고 물었습니다. 아이는 친구들과 같이 놀이하는 일에 흥미를 잃어버리고, 오히려 믿음과 영혼의 문제에 대한 염려 속에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고는 하루에 몇 차례씩 어디론지 사라지곤 했습니다.
어느 날 헛간에서 크게 부르짖는 기도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아이가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는 엄마에게 와서 하나님이 자기를 만나 주신 것과,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신 것을 간증하였습니다. 이후로 아이에게서 뚜렷하게 달라진 것이 두 가지 있었습니다. 하나는 골목에서 만나는 친구들에게 열심히 신앙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주일을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결국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못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는 형식적이고 차갑고 은혜 없는 메마른 예배 때문입니다. 이렇게 메마른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배드리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절실히 필요한 죄인인가를 깨닫고 진정한 회개의 역사가 없었던 까닭이며, 자신의 심령이 하나님의 구속을 경험하지 못한 까닭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예배를 통해 참회를 경험하지 못하니까 개인의 삶에서 하나님을 추구하지 못하고, 하나님 없이 일주일을 제 방식대로 살다 오니까 거룩한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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