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자료

[부활절 설교] 네가 부활을 믿느냐?

'코이네' 2024. 3. 26. 21:28

네가 부활을 믿느냐

본문 : 요한복음 11:23-27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봄이 왔으되 봄 같지 아니하다'라는 고사성어입니다. 코트를 벗자니 아직 아침 저녁 바람에 여전히 차갑고, 창문을 활짝 열어 상큼한 봄내음을 맡자니 겨울의 남은 추위가 사나운 발톱을 날카롭게 돋우고 있어 여전히 그늘진 겨울 구름 아래 웅크리고 지낼 수밖에 없는 봄의 정경을 묘사한 말입니다.

요 몇일 전만 해도 우리의 봄은 이러했습니다. 그런데 계절의 변화는 막을 수 없어 지금 우리 주위엔 생명의 새로운 기운이 온 누리를 감싸고 있습니다. 죽은 듯이 누렇던 잔디가 파릇파릇 달라지기 시작했고 겨우내 얼었던 땅, 온통 죽은 것만 같던 자연에서 다시 생명의 기운이 활기차게 솟아오르고 있습니다. 봄꽃은 피었다 떨어지고 그 낙화와 더불어 새로운 꽃망울을 피워대고 있습니다.

 

이런 자연의 변화를 보노라면 이런 물음이 절로 솟아납니다. '이 생명이 과연 어디서 오는 것일까?... 한 번도 빠짐없이 매년 이 때만 되면 모든 것을 되살아나게 하는 이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겨우내 온 땅을 뒤덮고 있던 그 두터운 동토를 뚫고 솟아나는 저 작은 새싹의 힘은 무엇일까?...' 어제 자 동아일보 1면에 칼라 사진 같지 않은 칼라 사진이 하나 실렸습니다. 산불로 인해 폐허의 잿빛 더미 속에 돋아난 파란 새 싹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기자는 그 사진의 제목을 '희망'이라고 불렀습니다. 다 죽었다고 여겼던 바로 거기에 생명이 있는 것, 그것이 바로 희망이라는 것입니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모든 인간은 절망에 이르는 병을 앓고 살아간다'고 했습니다. 그 절망에 이르는 병이란 바로 죽음입니다.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죽음 앞에서는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고 오차도 없습니다. 죽음은 모든 것을 이기는 폭군이기에 또 그 누구도 피해가지 않기에 우리 모두는 그것을 두려워합니다. 사는 방식도, 소유도, 피부색도 차이가 있지만 죽음 앞에서는 절대 평등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제도 오늘도 잠시도 쉬지 않는 참으로 무서운 권세입니다. 이 죽음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이 오열하고 허탈해 하고 절망합니까?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바로 그러한 슬픔과 절망의 생생한 현장을 접하게 됩니다. 베다니 마을에 의좋게 살던 한 가정의 가장이 두 누이를 남겨둔 채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두고 맙니다. 요절입니다. 급사입니다. 얼마나 황당스런 일입니까? 예기치 못했던 사건입니다. 게다가 나사로의 두 누이는 오라비가 사경을 헤멜 때 사람을 보내 이웃 마을에 있는 주님의 심방을 그토록 원했지만 주님은 저들의 청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슬픔과 절망 그리고 회한에 사무친 두 누이입니다.

그런데 이제 뒤늦게사 모든 장례를 치르고 난 사흘째 되는 날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베다니 마을을 찾아 오셨습니다. 그러나 이건 의도적인 지연 행차입니다. 거기에 뜻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당신이 사망에 죽음을 가져오신 분이시고 생명을 공급하시는 살림의 주가 되심을 증거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주님과 마르다의 대화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주님은 마르다를 향해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마르다는 ', 오라비가 다시 살 줄을 제가 아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이 대꾸 속에 마르다의 불신이 묻어납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이 아닌 마지막 날에 일어날 일'이라는 조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지금 & 여기''그때 & 거기'에서 일어날 일로 대답합니다. 그러자 주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반문하십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새로운 생명의 계절에, 이 부활의 절기에 우리는 다시 한 번 영원히 사는 생명의 비밀을 듣게 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 부활의 진실을 네가 믿느냐?...'

아무 것이나 마구 믿는 것을 맹신(盲信)이라고 합니다.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을 미신(迷信)이라고 합니다. 믿을 것을 믿지 않는 것을 불신(不信)이라고 합니다. 마구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게 믿음 좋은 게 아닙니다. 분별해서 믿어야 합니다.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건 위험한 믿음입니다. 다 믿어도 좋은 세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믿어야할 것을 믿지 않으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게 불신이요 그건 불행입니다. 주님은 이 부활절 아침에 우리에게 묻습니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부활을 믿느냐?...'

 

부활은 결코 헛소리가 아닙니다. 바울은 고전 15:3-8절에서 기라성 같은 부활의 증인들을 주욱 열거해 갑니다. 그의 증거에 의하면 그 당시 부활의 목격자들이 산술적으로 헤아려봐도 250명이 넘는 이들이 생존해 있었다는 것입니다. '게바에게 보이시고 열 두 제자에게 보이시고 그 후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는데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시고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또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였다'는 이 바울의 증거는 부활이 역사적 사건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히브리서 기자 또한 히12:1절에서 '우리에게는 구름같이 허다한 부활의 증인들이 있다'고 외치고 있지 않습니까?...

또 사도 바울은 고전 15:23절에서 '예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선언합니다. 첫 열매는 그 다음에 어떤 열매가 맺힐는지 미리 일러주는 표지입니다. 포도 열매가 맺혔으면 그 다음부터 그 나무는 포도 열매만 맺습니다. 첫 열매는 두고 두고 같은 열매가 맺히리라는 것을 분명히 말해 주는 징표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그 선언은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또한 죽어도 살겠고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은총이 주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졌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부활의 가장 큰 증거는 무엇보다도 제자들의 변화된 삶이었습니다. 부활 이후 저들의 삶이 변했습니다. 달라졌습니다. 십자가 이후 줄곧 문을 걸고 숨어지내던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성령의 체험을 한 후에 그 문을 박차고 밖으로 달려 나갔습니다. 유대인들은 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훔쳐갔다고 유언비어를 퍼뜨렸지만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의 사실을 증거했던 것입니다.

부활 신앙은 우리를 그렇게 변화시킵니다. 이 부활신앙을 우리는 갖고 있습니까? 우리가 지금 부활 전을 살고 있습니까, 부활 후를 살고 있습니까?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했는데 참으로 우리의 삶이 살아있는 삶입니까?

 

더들러스 베도 목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교회의 등록교인이 된다고 모두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피아노를 가졌다고 해서 모두가 피아니스트라고 불리우지 않는 것과 같다...' 가끔 가다가 피아노 건반 위에 앉아서 뚱땅거린다고 다 피아니스트겠습니까? 가끔 교회에 들락거린다고 모두가 그리스도인이겠습니까?... 진정한 믿음, 산 믿음, 부활의 믿음을 가진 이가 그리스도인입니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우리도 마르다처럼 대답하십시다. ', 주님!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진정 이러한 고백으로 주님께 나아가 부활의 놀라운 충격과 생명을 비밀을 경험하게 되는 우리 모든 영락의 권속들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