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죄를 사하소서
본문 : 시51
오늘 저녁 함께 교독한 시편 51:은 부제가 설명하고 있는대로 다윗왕이 자기의 신하 우리야의 아내를 탐내어 그를 최일선으로 출전시켜서 죽게한 다음, 그의 아내 밧세바를 자기 아내로 삼은 희대의 엽기적인 죄악을 범하였을 때 선지자 나단에게 질책을 당하고 자기의 죄과를 뉘우치고 기도한 시입니다.
이 시편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서 뿐만 아니라, 이 시편이 지니고 있는 신학적 내용과 서정적인 서술의 운치 그리고 그의 애절한 죄책에 대한 회개의 심정으로 인해서 모든 사람들의 공감을일으키는 기도시입니다.
이 시는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고 나중에 부록이 붙어 있는 시입니다.
첫째 부분은 1-2절로서 하나님의 자비와 그의 깨끗하게 하여 주심을 비는 기도입니다.
둘째 부분은 3-12절로 고백과 탄원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세째 부분은 13-16절까지인데 저자의 하나님께 대한 맹세가 있고, 18-19은 부록으로 붙어 있습니다.
1-2절을 보면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여기 이런 기도가 나오기까지 이 고백과 이렇게 애원하는 심령은 그의 삶의 오직 한 길,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야만 살겠다는 심정인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의 무능과 실패를 자인하는 때, 그 때부터 자기의 운명에 대해서 발악을 중지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저주하는 대신에 진실로 자신을 주님의 자비의 손에 의탁하고자 겸손히 무릎을 꿇게 되는 것이요, 그 길만이 오직 용서를 받는 길이요, 사는 길인 것입니다. 비록 제왕의 자리에서 천하를 호령하는 권세를 가졌다 해도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여 그의 무릎 앞에 나아가는 마음의 겸손이 없으면 그는 멸망을 자취할 길이 없습니다.
그 다음 부분 3-12절에는 그의 고백과 탄원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자기의 죄과를 솔직히 인정하여 그 죄는 비록 사람에게 지은 죄로서 비밀 속에 행해지는 것이지마는 실상은 그 죄가 하나님의 목전에서 범한 죄요, 천하에 숨길 것이 없이 드러난 죄요, 그 죄는 결국 하나님을 범하는 죄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심오한 신학적인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모든 죄는 그것이 윤리적인 범죄이건 도덕적인 범죄이건 또 그 죄가 어느 자연을 반대한 죄건, 어느 이웃이나 민족 국가에게 저지른 죄이건 간에 근원을 따."보면 그것이 하나님께 범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아느 골방에서 은밀히 행한 죄라할지라도 거기에 여호와의 공의가 빛나고 있으며, 천하에 숨길 수 있는 비밀은 없습니다. 사실 모든 범죄는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눈앞에서 해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이러한 사실을 자각하고 보니 자기 자신도 세상의 다른 사람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나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죄 중에 출생하였고 죄 중에 잉태하였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제 철두철미하게 자기가 자기 힘으로는 자기를 구원할 수 없음을 자각하고 하나님께 용서와 사죄를 빌게 된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스는 말했습니다. "최선의 지식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여러분, 모든 지식을 다알고 있다 하더라도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모르면 그는 무식한 사람이요, 무식하기에 구원을 얻을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아마도 지식 중에 가장 얻기 힘든 지식은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지식일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알기란 지극히 어렵습니다. 하물며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아는 것 보다 더 중요한 지식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궁극적 관심사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죽음의 문제요, 하나는 죄의 문제입니다. 죽음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면 철이 난 것입니다. 비로소 인간이 되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의 문제에 관심을 가짐으로 도덕적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다시 말해서 사죄문제에 관심을 가지면, 그것이 바로 종교인이 되는 길입니다. 넘어지지 않는 사람보다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서는 사람이 위대한 사람입니다. 죄를 짓지 않는 사람보다 회개할 줄 아는 사람이 더 위대한 사람입니다.
오늘 시편의 저자인 다윗은 성군이라고 불리우는 다윗입니다. 유대나라 역사상의 많은 왕들 중에서 가장 으뜸으로 높임을 받는 왕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은 예수님의 족보에 아브라함과 나란히 등장할 만큼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류의 구속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워진 사실도 이스라엘 역사에서 다윗의 비중이 얼마나 컸던가 하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겠습니다. 아무튼 다윗은 신구약 성경 전체를 통하여 그 이름이 800번이나 나올 정도로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는 온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을 특별히 받고 하나님께서 특별히 기뻐하시는 사람이었습니다만 온전한 의인은 아니었습니다. "내 종 다윗의 정직함 같이"라는 말이 성경에는 수 없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보신 인간 다윗은 과연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정직한 사람'이 다윗의 별명입니다. 그의 정직은 행위의 온전함에 말미암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믿음에 정직하고 회개함에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위대한 사람입니다.
교회는 죄인이 나와서 구원받는 곳입니다. 죄인이 모이는 곳입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는 죄인이 출입하는 곳은 아닙니다. 회개하지 아니하는 죄인은 누구라도 구원의 은혜에 참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왕은 죄를 아는 사람이요, 죄를 지은 사람이요, 그리고 또 회개를 아는 의인입니다. 우리는 다윗의 죄를 잘 알고 있습니다. "저녁 때에 다윗이 그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지붕 위에서 거닐다가, 그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와 보이는지라....(삼하 11:2)". 이에 유혹을 느껴서 그 여인 밧세바를 범하고 맙니다. 밧세바의 남편은 왕을 위해 전선에 나가 목숨을 걸고 싸우는 장교입니다. 그런 여인과 간통을 하고, 임신까지 하게 만든 사람입니다. 큰일 났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엄청난 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앞뒤를 가릴 경황도 없이 우선 그 일을 숨길 생각부터합니다. 그래서는 일선에 있는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에게 휴가를 줍니다. 우리아가 돌아오면 밧세바와 동침을 할 것이요, 그렇게되면 잉태된 아기를 우리아의 아기로 위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집에 돌아온 우리아는 일선에서 고생하는 전우들을 생각해서 아내와 같이 동침을 할 수 없다고 하면서 동침하지를 않습니다. 다윗은 결국 우리아를 없앨 생각을 하게됩니다. 그래서는 우리아의 상관에게 비밀 지령을 내려서 우리아가 적의 손에 죽게 만듭니다. 그리고 다윗은 남편을 잃은 밧세바를 거리낌 없이 후궁으로 취합니다. 이렇게 해서 그 일은 감쪽같이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모든 일이 다 그럴듯하게 숨겨진 것처럼 생각한 것, 이것이 다윗의 죄입니다. 그런데 그 일들이 그렇게 무사히 넘어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엄청난 고뇌에 빠집니다. 때마침 나단 선지자가 찾아와 "당신이 그 사람(삼하 12:7)"이라고 힐책을 할 때 두말 없이 회개를 합니다. "내가 죄인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하고 아무런 변명 없이 무릎을 꿇습니다. 다윗은 죄의 본질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죄의 성질을 알고, 그리고 경험한 사람입니다.
사실 죄라는 것은 유혹의 매력이 있습니다. 보십시오. 다윗에게는 미갈이라는 왕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후궁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남의 여자가 더 예쁘게 보일 것이 무엇입니까? 하고 많은 여자들 중에서 왜 하필이면 남의 유부녀가 그토록 예쁘게 보여서 죄를 짓게 만드느냐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책망하시는 말씀을 보십시요.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삼하 12:8-9)." 네가 원한다면 여자를 천이라도 줄텐데 하필이면 왜 남의 여자를 건드리느냐고 하시는 책망입니다.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 죄가 얼마나 매력적입니까? 죄의 유혹을 뿌리치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금단의 열매는 아름다워 보이기 마련입니다. 아름다워 보이는 것, 눈길을 끄는 것 - 이것이 사단의 유혹이요, 죄의 매력입니다. 에덴 동산에도 많은 나무와 온갖 과실이 다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어째서 하필이면 금단의 나무 주위를 맴돕니까? 왜 그것만 자꾸 쳐다봅니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창 3:6)." 그렇습니다. 이것이 시험입니다. 죄에서 인간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를 짓는 순간에는 아무 생각도 못합니다. 이대로 죽어도 좋다는 식입니다. 눈앞에 유혹으로 모든 것을 바꾸어 버리는 어리석음에 빠집니다. 다윗은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또한 그 죄를 정당화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죄를 상대화하고 보편화합니다. "나만 죄인인가? 나보다 더 큰 죄인도 많은데 뭐"하고 자기를 정당화시킵니다. 이것이 죄가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본성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은 죄의 원인을 외면하고 그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려고 합니다. 위선에 빠집니다. 그리고 숨깁니다. 이른바 완전범죄를 노립니다. 그러다보니 죄는 점점 더 불어납니다.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섭니다. 회개 없는 거짓말은 또다른 거짓말을 낳습니다. 거짓말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그것을 끝까지 참말이라고 우기느라고 또다시 거짓말을 합니다. 그러다가 필경은 어디에서 멈추어야 할지 모르게 된다는 말입니다. 거짓말은 언제까지나 계속할 수도 없고 멈추기는 멈추어야 하겠는데 어느 선에서 멈추어야 할지, 그것이 그렇게 힘든 것입니다.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속해서 죄를 회개하지 아니할 때 또다른 죄를 거듭해서 지을 수 밖에 없습니다. 다윗이 처음에 범한 죄는 간음죄였습니다. 그러나 그 죄를 숨기겠다고 밧세바의 남편을 죽이는 살인죄까지 범하고 말지 않습니까? 처음의 죄를 숨기자고 거듭해서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수렁에 빠져들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다윗처럼 어려서부터 신앙이 독실했고 그처럼 고귀한 섬품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그처럼 파렴치한 죄를 범할 수 있었을까요? 얼른 생각하면 이해가 가지 않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악한 것이 인간입니다. 약한 것이 우리의 육신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스스로 섰다고 하는 사람은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크다 하고, 고귀한 성품이 소유자라고 할지라도 어떤 사람에게나 약점은 꼭 있습니다. 조심하지 아니하면 마귀는 이 약점을 통해서 그 사람을 넘어뜨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내 약점이 무엇인가? 특별히 내 생활면에서나 내 성격면에서 약점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살펴서 거기에 조심하지 않으면 누구나 큰 죄에 스스로 빠질 가능서이 있는 것입니다. 누구나 다윗처럼 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가운데 아무도 없습니다.
다윗은 회개의 은총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회개의 기회는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참지 않으시고 오래오래 인내해 주지 않는다면 우리가 살아남아 있겠습니까? 범죄 현장에서 당장에 벌을 내리신다면 세상에 사아 남을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돌아올 때까지, 뉘우칠 때까지 회개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 이것이 큰 축복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회개의 계기를 만들어 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기회를 놓지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볼 때 다윗에게 나단 선지자를 보네 주신 것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혼자서는 회개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뉘우치고 괴로와 하면서도 문제의 해결을 얻지 못하고 있을 때에 나단 선지자가 찾아왔습니다. 그로부터 책망을 받음으로 다윗은 비로소 용기를 얻습니다. 절호의 기회인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말씀이 들려 올 때,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에 부딪쳐 오면서 회개하라고 촉구할 때에, 이 때야말로 종말론적인 은혜의 기회라는 것을 잊지 말고 명심해야합니다. 이 마지막 기회를 포착해야 합니다. 이것을 깨달을 때에 회개의 용기가 넘쳐 오릅니다. 여러분, 아무리 회개하고 싶어도 용기가 없으면 회개하지 못하고 맙니다. 용기가 없어서 우물쭈물 하다가 세월을 다 보내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비겁한 사람들은 회개의 용기를 얻지 못해서 술이나 마시고 일부러 타락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회개의 용기란 크나큰 포기를 의미합니다. 위대한 자기부정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이제 전부를 잃어야 하는 순간이 왔습니다. 생명의 문제가 아닙니다. 상상해 보십시요. 그는 왕좌에 앉아 위풍당당하게 삼권을 한 손에 쥐고 있는 사람입니다. 남의 잘못을 가려 주고 재판하는 자리에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유부녀와 간통을 했습니다. 그리고 비겁하게도 그 여자의 남편을 죽게까지 만듭니다. 다윗 왕이 이런 사람이라고, 마침내 만천하에 드러내야 할 순간이 온 것입니다. 얼마나 어려운 순간입니까? 명예고, 체통이고, 위신이고, 체면이고 권세고 다 포기해야 할 순간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담대하게 용기를 찾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다 맡겨 버립니다. 하나님께 깨끗이 위탁해 버립니다. 백성들이 돌을 던지든 말든, 어떤 망신을 당하든, 어떤 위기가 오든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다 맡기고 "내가 죄를 지었나이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그는 회개함으로써 찾아지는 진실이, 그 정직함이라는 것이 얼마나 값지고 귀한지를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과 위신과 명예를 과감하게 포기해 버렸습니다. 그래야만 회개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야만 회개의 용기를 얻고 잃어버린 자기를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야만 하나님 앞에서 자기 영혼을 다시 소생시킬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용서의 은혜, 사죄의 은총을 알고 감격하고 기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12절에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개 회복시키시고"라고 합니다. 즉, 주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즐거움을 자기에게 돌려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실 때 그 모든 허물을 깨끗이 덮어 주십니다. 어느 짖궂은 사람이 익살스럽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건망증이 심하셔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회개할 때에 용서하신 것은 깨끗이 잊어 버리신다" 다윗도 시편 103:12에서 말합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사실이 그렇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다윗이 어떤 죄를 범했습니까? 밧세바도 큰 죄를 짓지 않았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저들의 회개의 눈물을 보시고 용서하십니다. 밧세바는 왕후가 될 뿐만 아니라 저 지혜의 왕 솔로몬의 어머니가 됩니다. 이렇게 화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조금 용서하시고 마시는 분이 아닙니다. 결코 지난 일을 뒤적거리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깨끗이 용서 하시고, 다시는 기억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회개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더 큰 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다윗과 밧세바에게 솔로몬을 주신 분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회개할 때에 정죄하시지 않는 분입니다. 이러쿵저러쿵 죄의 댓가를 따지지 않으시고 당신의 자녀로 영접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회개입니다. 남은 것은 회개입니다. 그런데 회개가 무엇입니까? 죄를 인정하는 것이요, 인정하되 자기의 죄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결코 남의 탓으로 돌려서는 안됩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그는 밧세바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죄는 내가 지었습니다. 저 사람도 내가 죄를 짓게 만들었습니다. 하는 이것이 다윗의 고백입니다. 또한 그에게는 전혀 변명이 없습니다. 변명하는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잘못했습니다만...."이라고 토를 달 필요가 없습니다. 이러다가 더 문제르 복잡하게 만드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그저 잘못했습니다. 이 한 마디면 됩니다. 진실하게 죄를 고백하는 것 이것만이 최선의 길인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국가적인 죄와 개인적인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으 자비와 긍휼을 빌어야 할 때인 줄 압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회개할 때입니다. 참되게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는 은총을 힘입을 때, 거기에 구원이 있고,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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