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소선지서

합 3:16, 울고 웃는 사람들

'코이네' 2023. 7. 5. 17:38

울고 웃는 사람들

하박국 3:16-19

 

 

 

주전 6세기 말엽을 살았던 저 유다의 선지자 하박국은 이 세상에서 왜 의인이 고난을 당하는가 하는 문제 때문에 고뇌에 잠긴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이 문제에 대하여 대답하여 주시기를 의인(선민)도 죄인이라고 하였습니다(1). 그러나 믿음을 가지면(2) 구원(3)을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받은 말씀은 보통 하박국의 시편이라 일컫는 부분인데 궁중 악장들이(영장) 자기의 수금에(현악기) 맞추어 불렀던 노래입니다. 그 내용은 절망의 심연에서 고통의 울부짖음을 발하다가, 사슴의 발처럼 높은 곳을 향하여 뛰면서 노래하고 있는 웃음의 장면 곧 승리의 장면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 울고, 또 웃고 있는 사람들이란 메시지를 받기를 원합니다.

 

. 울고 있는 하박국(3:16-17)을 봅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비통하게 하였을까?

 

1. 침략의 소식이었습니다.

316절에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 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 도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정말 기막힌 기다림 속에서 사는 자였습니다. 그는 지금 자기와 자기 조국에 큰 환난이 닥쳐옴을 기다리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조국 유다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신흥 제국 바벨론을 들어 저들을 징치하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소식이었습니다.

그는 32절에 말하기를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무리 곧 바벨론 군대가 저들을 침략하러 올라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2. 생존권이 파괴되는 위협이었습니다.

317절에 무화가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어진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바벨론(갈대아)의 침략을 받은 결과 이스라엘에는 농작물의 피해와 가축 떼들의 피해가 극심할 것을 예견하는 말입니다. 우리 본문에는 없어져 버린 다는 말이 계속 반복되고 있음을 유의해야 합니다. 이는 저들이 당하는 전란으로 인하여 육신의 생존 여건이 파괴되어 버린 사실을 말합니다.

이러한 쓰라린 경험은 과거에도 열방들로부터 수없이 당하였던 저들이었습니다. 저들은 이방인의 침략을 받을 때마다 생존권이 파괴당하는 위협을 받았습니다.

지금 하박국 선지자는 이러한 바벨론의 침략과 그 침략으로 인한 저들 백성의 죽음을 미리 알고 있는 고통을 겪는 중입니다. 내가 환난을 기다린다고 하였습니다. 참 기다림치고는 캄캄한 기다림이 됩니다. 기다림치고는 답답하고 괴로운 기다림이 됩니다. 기다림치고는 고통의 기다림이 됩니다. 죽음을 기다리는 기다림이란 정말 캄캄함이 아닌가?

그래서 지금 선지자의 창자는 흔들리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그의 깊은 내심의 불안과 동요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선지자의 입술은 경련을 일으키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말이 제대로 안되는 고통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선지자의 뼈가 썩어지는 아픔을 느끼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선지자의 몸이 내 처소에서 떨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내 아랫도리가 땅위에 선 그대로 발을 뗄 수 없다는 뜻이리다. 몸의 중심을 잡을 수 없는 현기증이 일어나는 큰 떨림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죽음에 이르는 극한의 비통을 나타내고 있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그는 지금 울고 있는 자였습니다. 그의 육체와 영혼이 비통하고 있는 자였습니다. 그의 인생 전부가 울고 있는 자였습니다. 사실상 지금 그의 지경은 눈물을 흘리는 정도를 훨씬 넘어 서 버린 극한의 비통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과 조국이 하나님을 섭섭하게 한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붙잡으신 바벨론이란 나라의 채찍으로 매를 맞아야 할 아픔 때문이었습니다.

 

. 웃고 있는 하박국을 봅니다(3:18-19)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 18절로 19절의 장면은 앞에 장면과 너무나도 대조적입니다. 울음이 아니라 웃음입니다. 절망이 아니라 소망입니다. 어둠이 아니라 밝음입니다. 낮은 곳이 아니라 높은 곳입니다.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모습입니다. 사슴의 발처럼 그의 발이 가만히 있지 못하고 땅의 높은 곳을 질주하고 있습니다

그의 웃음이, 그의 기쁨과 즐거움이 어디로부터 왔던가?

 

1. 나의 하나님 여호와로 말미암아 왔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큰 환난을 기다리는 아픔의 비통 속에서 나의 하나님 여호와로 인하여...라는 말을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나의 하나님 여호와 안에서...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 말은 지금 비통을 토하던 하박국의 마음의 방향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 가를 보여 주는 말입니다. 그 때 그는 침략자와 그 침략의 결과로 맞이할 폐허 속에 이루어질 무덤을 넘어서 아예 자신과 자신의 조국의 장래를 여호와 안으로 방향을 돌리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중대한 내용입니다.

그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 안에로 모든 향방을 바꾸었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그는 바벨론을 믿지 않고, 밭에 소출이나, 가축 떼들을 믿지 않고 아예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는 확신의 믿음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자신과 자신의 조국이 만난 환난 곧 징계의 채찍을 안고 여호와 안으로 뛰어 들어가게 되었던가?

(1) 그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3:18).

그는 112절에서도 선지자가 가로되 여호와 나의 하나님 나의 거룩한 자시여...라고 기도한 바 있습니다. 유다를 징치하기 위하여 바벨론을 도구로 손에 잡으신 하나님은 바벨론의 하나님이 아니라, 유다의 하나님 곧 나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나를 존재케 한 존재의 하나님이시요 나를 만드신 창조주요 나를 선택하신 언약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2)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3:18).

지금 선지자는 하나님 손에 바벨론 이라고 하는 채찍의 몽둥이를 들고 유다를 향하신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겁이 나고 두려워서 울어 버렸습니다. 전인격이 절망의 혼란에 빠져 들어가는 혼란을 겪는 중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이 왜 바벨론을 몽둥이로 들어 유다를 치려 하시는가를 그는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백성 유다의 구원을 위한 수단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는 옛날에 그 조상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애굽 바로 왕의 병거가 저들을 추격하였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스라엘을 멸하려 함이 아니고, 그러한 절망의 위험에서 하나님의 능하신 구원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을 선지자는 잘 알고 있습니다(14: - 15: ). 저들은 지도자 모세를 원망하고, 절망하였으나, 하나님은 그 위난 중에서 홍해를 가르심으로 저들은 구원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박국은 하나님의 손에 있는 바벨론만 본 것이 아니라 구원에 능하신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3)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319절에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이란 ’, ‘능력’, ‘강한 군대란 뜻입니다. 전혀 부족함이 없으신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지금 선지자는 침략자 바벨론 군대의 소리를 들으면서, 그리고 그 결과 그 땅이 황폐되어 생존의 여건이 끝나고 말 죽음의 비극을 보면서도, 반면에 이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 힘이 되신 여호와가 궁극적으로 저들에게 승리를 안겨 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319절 중에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직접적인 뜻은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을 받아, 다시 시온의 땅, 예루살렘으로 올라와서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살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구원의 승리를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나의 높은 곳이란 낮은 바벨론 포로에서 되돌아 온 시온’ ‘예루살렘’ ‘가나안 선민의 땅을 가리킵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얼굴이 비추는 곳이요, 하나님의 집인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는 여호와 안에로 뛰어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웃음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는 농작물이나, 가축 떼처럼 없어질 분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 분 안에 새로운 농작물도, 무수한 가축 떼들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여호와는 바벨론에 침략을 당하지 아니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에 빼앗김을 당할 분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바벨론을 심판하실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 웃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은 옛날에는 여기 바벨론에서 울고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나의 높은 곳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웃고 사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를 웃게 하였습니다. 그것은 죽은 자와 방불한 저들에게 웃음, 곧 이삭이란 아들을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을 웃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의 발로, 사슴처럼, 나의 높은 곳을 다니게 하였습니다.

 

나의 높은 곳이 어디입니까?

그곳은 예수 십자가의 갈보리와 부활 신앙의 영계입니다.

예수 십자가 신앙은 참으로 높은 곳입니다. 그 곳에는 감히 사탄(바벨론)의 군대가 침략할 수 없는 안전의 산성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우리의 속죄 성취를 선언하신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다 이루었다고 생명의 개가를 부르신 곳이기 때문입니다(19:30).

또한 예수 부활의 동산도 높고 높은 곳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우리의 범죄 함을 인하여 내어 줌이 되고 우리의 의롭다 하심을 인하여 다시 살아나사(4:25)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었기 때문입니다(1:4). 그래서 그가 사망을 이기신 왕이 되고, 우리 부활의 첫 열매가 되었기 때문입니다(고전15:20). 그래서 우리에게 다시 사망이 왕노릇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므로 십자가 속죄 신앙과 사망을 호령하는 부활 신앙을 가진 자는 참으로 높은 세계를 다니는 자들입니다.

그곳은 또한 오늘의 거룩한 교회입니다.

예수께서 세우신 교회(16:18),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20:28)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의 왕궁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예배하고 감사 찬송하고, 기도하고, 헌신 봉사하며, 그를 섬기는 삶을 가지고 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왕래하는 높은 곳, 성별의 장소입니다.

그곳은 땅 끝까지 이르는 선교의 광장을 가리킵니다.

예수의 복음을 가지고, 예루살렘, 유다,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의 모든 곳을 달리는 사람은 참으로 사슴같이 높은 곳을 질주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신령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이었습니다. 신명기 3213절에 여호와께서 땅의 높은 곳을 다니게 하셨도다고 하였습니다. 신명기 3329절 중에도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로 웃게 하였습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나의 높은 곳을 사슴처럼 뛰어 다니게 하였습니다.

다시 우리는 이사야 선지자의 외침을 기억해야 합니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며, 곤비치 아니하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40:28-31)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안에서 울고, 예수 안에서 웃는 자들입니다. 땅의 높은 곳을 질주하면서 기쁨의 복음,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입니다.-은혜목회정보- 97.11 설교/박성규목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