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요한복음

[요 1:1] 영원한 인생의 모델 예수 그리스도

'코이네' 2023. 6. 3. 20:53

 영원한 인생의 모델 예수 그리스도 

성 경 : 1:1-4

 

 

 

하나님 말씀은 모든 것을 있게도 하고 없게도 한다. 아무것도 없는데 말씀이 있으면 무엇이 나오기도 하고 무엇이 들어가기도 하는 이상한 창조가 생겨나는 것이다.

 

길을 지나가는 사람을 잡고 우리는 어떤 얘기를 하면 그 사람은 갑자기 화를 낼수도 있고 또 사랑하는 마음을 나타낼 수도 있다. 결국 말은 어떤 사람속에서 없는 것을 있게도 하고 있는 것을 없게도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신기한 세계를 발견할 수 있다. 물질적인 창조는 일정하고 기계적인 법칙에 의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이와 다른 창조적인 능력이 있어서 무엇을 있게도 하고 없게도 한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신다는 말씀처럼 우리에게도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는 이상한 힘이 마음 속에 있다. 왜 말이 그런 능력을 가졌을까? 말은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말은 마음의 표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마음은 그 생명으로부터 나온다. 어떤 생명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마음이 곧 말씀이 되어서 결국은 어떤 사람의 마음 속에 들어가서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불러내는 것이다. 우리가 악한 것도 불러낼 수 있고 선한 것도 불러낼 수 있다. 미움을 불러낼 수도 있고 사랑을 불러낼 수도 있다.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하시듯이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또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만났던 사람들은 그로 말미암아 자기들 안에 없었던 것이 창조되었다. 그래서 그로 말미암아 지어졌다고 말하게 되었다. 우리는 천지만물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을 것이다. 지은 자가 있어서 창조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막연하지만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내가 나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고 그것이 막연한 것도 아니고 추상적인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내가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이었는데 그렇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개 전혀 없던 마음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추상적이거나 막연하지 않고 누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 이 세계가 요한복음의 세계이다. 이것이 거듭나는 세계인 것이다.

 

일차적인 창조는 기계적인 것이었지만 이차적인 창조는 사실상 모르는 것이다. 어떻게 사람이 아들을 낳으면 아들이 되는 것인지 잘 모른다. 기계는 분해해서 다시 만들 수 있지만 사람은 그럴 수 없다. 다시 말해서 기계적인 창조의 세계는 다시 모방할 수 없는 세계이기 때문에 불가사의하다고 할 수 있다. 풀잎 한포기가 값싼 것이지만 그것을 아무리 연구해봐도 다시 풀잎 하나를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이다. 이런 하나님을 우리는 알 수가 없다. 도대체 어떤 하나님이 이런 것을 만들었는가를 알 수가 없고 단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일정한 법칙이 존재한다는 것 밖에는 알 수가 없다. 어떤 분이 이런 것들을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우리는 끝없고 헤아릴 수 없고 측량할 수 없는 세계에 봉착하고 만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된 것은 그런 막연한 세계가 아니다. 구체적으로 내가 해도 그렇게 되는 세계에 와 있다. 누가 네게 와서 그렇게 한 것처럼 나도 누구에게 가서 그렇게 하면 그렇게 되는 세계에 와 있는데 오히려 이 창조가 처음 창조보다 더 고귀한 창조라는 것이다. 만일 사람이 아무리 이목구비를 똑바로 갖더라도 이차적인 창조가 우리 안에 발생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단지 동물에 불과하다. 그런데 우리의 이목구비가 좀 틀어졌더라도 이차적인 창조가 발생하면 지극히 아름다울 수가 있다. 그러므로 일차적인 창조는 너무 어렵고 복잡하고 불가사의하기 때문에 끝없이 막막한 세계라 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이차적인 세계보다 아름다울 수 없고 더 고귀하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일차적인 세계보다 이차적인 세계가 휠씬 고상한 것을 알았다. 이 창조에 우리가 참여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했듯이 우리가 그렇게 창조하게 되었다. 어떤 분이 우리 안에 와서 사랑을 일으켰는데 나로 어떤 사람 속에 들어가서 사랑을 일으키게 된다. 이렇게 사랑의 창조는 계속되고 있다. 이것이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이것은 그 안에 있는 생명으로 말미암아서이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였는가를 생각해 본다. "나는 원래 무엇이었을까?" 불교에서도 이 질문을 하고 있다. 그래서 前生을 생각하는 것이다. 현재를 보고 전생과 내세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우리가 전생에 소였는지, 개였는지, 사람이었는지 알 수 가 없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을 할 때 요한의 핵심은 그리스도에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말은 사실은 태초에 그리스도가 있었다는 말인 것이다. 요한은 그리스도를 감추어 놓고 밖으로는 "말씀"을 내놓은 것이다. 그러면 왜 태초에 그리스도가 있었다고 얘기하고 있는가. 그리스도가 사람의 원형이기 때문이다. 내가 원래 어떤 사람이었느냐, 인생은 원래 무엇이었느냐, 하나님이 지으신 인생의 근원적인 원형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를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나의 영원한 본은 무엇인가. 요한 속에는 본이 하나 들어 있다. 옛날 엄마들이 저고리를 만들 때 쓰는 본이 있다. 창호지로 본을 만들어 놓고 저고리를 만들 때마다 그 본을 대고 만드는 것이다. 요한에게서 본은 곧 그리스도이다. 저고리를 보면 그 본을 알 수 있듯이 요한은 자기의 영원한 본을 그리스도로 알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람을 창조하셨다.

 

요한은 역사적으로 예수님보다 나이가 적였기 때문에 시간적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아브라함은 좀 다르다고 생각할 수 있다. 예수보다 훨씬 먼저 살았던 아브라함의 본은 누구냐는 것이다. 이 말은 사람을 창조할 때 어떻게 창조했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냥 무조건 만든 것이 아니고 어떤 본이 있었다. 본은 그 본체보다 먼저 있어야 한다. 아담보다 먼저 있었던 것이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는 아담 이전에 있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부르셨다. 부르실 때 무작정 오라고 하였다. 어떤 본이 있어서 그 본에 맞추어서 불렸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그 본에 맞는 사람이 될 때까지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다루어졌다. 요한은 어떤 사람이 불러서 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어떤 본에 의해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알았다. 누구를 본으로 했는가. 그리스도를 본으로 해서이다. 오늘 우리는 이런 저런 경로로, 환경으로 방법으로 부름 받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를 목표로 부름받고 있다. 그리스도라는 본을 가지고 부르셨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 자신의 모양이 둥글다면 세모인 본에 맞추어 잘라져야 할것이다. 재단사는 천의 원래의 모양에 상관없이 그의 본에 맞추어 자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모양이 어떠하냐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다. 재단사의 계획만 중요하다.

 

아브라함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가 둥글둥글 했을지라도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본에 맞추어 재단하였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부름 받았다는 의미는 이것을 뜻한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영원한 본앞에 부름 받고 있다. 원래 우리는 그렇게 지어졌기 때문이다. 첫째 아담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사망의 형상을 따라 때어났다. 태초에 창조될때는 영원한 그리스도의 본에 의하여 창조되었지만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 우리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살았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형상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창세의 영원한 본을 찾게 되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로 돌아 가는 것은 새삼스럽게 모르는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원래 있던 곳으로 가는 것이다. 내가 지어지기 전부터 있던 곳으로 가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말하기를 '나의 볼 것을 보고 즐거워 하였느니라.' 하였다. 이 말은 자기의 영원한 본을 보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기의 본이 나타나자 즐거워 하게 되었다. "이것이 영원한 내 모습 이엇구나!" 라고 안 것이다.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면서 그가 사람의 영원한 원형인 것을 발견해야 한다. 이가 사람중의 사람이고 하나님이 목표한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인 것을 깨달아야 한다. 어떤 이유로 해서 오염되어 우리의 원형을 거의 잃게 되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보니 그가 우리의 원래의 모습인 것이 발견된 것이다. 원래 나도 저 모습이었는데 세상에 시달려서 변질된것을 깨닫게 되었다. 아가서에 의하면 내가 의붓 오라버니에 끌려서 얼굴이 검어졌지 사실은 검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친 오라버니를 만나면 나의 얼굴이 백옥 같이 희어질 것이라는 말이다. 그는 자기의 영원한 원형을 만났다. 의붓 오라비 안에 있을 때는 알 수 없었는데 친 오라버니를 만나고 보니 자기의 원래 모습이 알아진 것이다. 친 오라버니의 얼굴 속에서 자기의 얼굴의 모습이 비쳐졌던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우리의 본래 모습을 알게 된다. 불교는 자기 속에서 자기를 찾으려 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내 속에서 찾으려는 것이 아니고 잃었던 형상을 닮은 누구를 만나게 되어 그 속에서 내 본래의 모습을 찾게 되는 것이다. 그 사람을 통해 내 영원한 얼굴이 보여졌다.

만일 사람이 사고로 이목구비가 다 망가졌다고 하자. 그는 자기의 얼굴을 어디에서 찾겠는가? 그가 정상적인 사람을 만나자 마자 자기의 원래 모습이 어떤지를 알게 된다. 이와같이 우리는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우리의 영원한 원형을 발견하였다.이것이  우리를 우리의 영원한 자리로 이끄는 것이다. 없는 것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원래 있었던 것으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어려운 길이 아니다. 우리가 속았기 때문에 이 길이 어렵게 여겨 졌던 것이지 사실은 너무나 쉬운 길이다. 마치 고무줄이 늘어 날 때에는 너무 어렵지만 줄어들 때에는 너무 쉬운 것 처럼.

 

본을 만나서 가는 길은 너무 쉽다. 본향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에 쉽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어렵다는 것은 본향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의 본을 따르는 길이 아니고 천사가 되고 싶어하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 자기의 길이 아닌 길로 가기 때문에 고통스러워 하는 것이다.

깨끗해 져야지, 완전해 져야지, 죄를 짓지 말아야지, 등의 생각들이 모두 우리의 본을 찾는 것이 아니고 사탄으로 인해 천사가 되려고 가는 길이다.

율법이 오기전에는 죄가 있어도 죄가 죄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래서 율법이전에 태어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라는 개념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읽으면서 죄를 발견할수 없는 것이다. 물론 그들이 완전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모세나 바울과 같은 사람이었지만 ''라는 개념이 없었다. ''라는 개념은 모세의 뮬법이 선포된 이후로 생겨 났다. 이때부터 모든 것은 죄가 되었고 사람의 본래의 모습을 상실해 갔다. 그 뒤로 모든 것이 죄이기 때문에 교회에 오면 이 죄부터 해결하려고 애쓰게 되었던 것이다.

! 우리가 깊이 생각할 점이 있다.

우리가 창조될 때 어떠 했는가?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실 때 죄부터 창조하셨는가? 아니면 사람을 죄인으로 창조하셨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가 부름 받을 때 죄인으로 부름 받지 않았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가 필요해서 지으셨고 그가 필요해서 부르셨다. 할렐루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필요에 따라 우리를 만들어 가시지 않겠는가. 우리는 이 당연한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것을 망각하는 순간 우리는 무엇이 되어 보려고 하게 된다. 이 때부터 사람들은 번민과 고통속에서 헤메인다. 무엇이 되어 볼려고 하지만 아무 것리도 되지 않는다.하나님이 지어 놓은 어떤 것도 변하는 것은 없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창조된 것이 변한 것은 없다. 우리가 사람으로 창조된 것이 변할 수 없다. "변화"라는 것은 잃었던 사람의 형상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것을 타락한 아담안에서 볼때 `변화'라 한다.

우리는 결국 처음 지음 받은 자리로 돌아 간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창조가 보존되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것 하나라도 처음과 달라진다면 우주는 파괴되고 말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생물을 창조하시되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고 또 그 종류대로 보존하셨다. 소나무는 영원히 소나무이고 잣나무는 영원히 잣나무이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사람도 하나님의 창조 안에서 조금도 벗어날 수도 없고 더 보태질 수도 없다. 우리의 영원한 본이신 그리스도께서 바꾸어지지 않는 한 우리의 인생은 바꾸어 지지 않는다. 오직 그에게로 돌아갈 뿐이다.

 

이것을 타락의 입장에서 볼 때 구원이라 하고 또는 변화라고도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변화된 사람이지만 영원한 계시안에서는 우리의 `'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를 향해서 부름받고 있고 달려 가고 있다. 아브라함도 이렇게 부름받았었다. 무었을 만들어 갔던 사람이 아니었고 가지고 있던 것을 하나씩 버려가는 삶이었다. 모든 것을 다 잃고 나서야 그는 이삭을 낳게 되었던 것이다. 사람의 본 모습이 되었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세상에 사는 동안 무엇이든지 더해볼려고 노력한다. 육체적으로, 종교적으로,철학으로,도덕으로 부족한 면을 채우고져 하는 것이다. 손이 셋이었으면 좋겠고 손가락은 여섯개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뒷통수에 눈이 달렸으면 얼마나 좋을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생각들은 우리를 사망에 빠지게 할 뿐더러 더욱 복잡하게 할뿐이다.

 

오히려 우리는 너무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문제인 것을 알아야 한다. `'을 대보니 우리들은 너무나 군살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군살을 계속 빼고 계셨다. 아브라함 이후로 많은 사람들을 거치면서 군살을 제거하여 마침내 남을 것만 남은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남긴 것은 무엇인가 ?그의 운명이다. 인생의 운명이다. `'이 아닌 모든 것이 제하여 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오면 우리의 모든 것이 사라지고 `'만 남게 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애급에서 살면서도 항상 가나안에 갈 소망을 잃지 않았다.광야에서도 가나안에 대한 소망으로 살았다. 그들에게 가나안은 조상들의 고향이었다. 신천지이기 때문이 아니였고 그들의 고향이기 때문에 그들의 소망이었던 것이다.

애급은 이스라엘에게 타국이었다. 종노릇 하던 곳이었다. 그 입장에서 생각할 때 가나안은 새로운 땅인 것이지 사실은 이스라엘은 가나안 사람이다. 그들은 본향을 찾아 가고 있었다. 그들의 조상에게로 돌아가고 있었다. 요셉은 죽으면서 자기의 유골을 애굽에 묻지 말고 자기의 조상이 묻힌 곳에 묻어 달라고 유언했다. 영원한 고향으로 가라는 것이다. 이 영원한 고향을 찾고 찾으면 곧 그리스도에게로 가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고향은 아브라함 이다. 아브라함의 고향은 그리스도 이다. 이렇게 우리는 영원한 고향을 찾아 가는 사람들이다.

 

아담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리스도 없이 지어진 것이 하나도 없다. 손가락 하나도 그가 없이 된 것은 없다. 동물이나 식물이나 모든 만물도 마찬가지 이다. 모든 만물은 아담을 향해 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우리 속에는 풀잎의 과정, 물고기의 과정, 짐승의 과정이 포함되어 있다. 이런 여러 과정을 포함한 것이 사람이다. 그러므로 모든 만물은 그리스도를 본으로 해서 창조된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인체를 해부해 보면 피는 피대로, 뼈는 뼈대로 너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서로 다른 것이 한몸안에서 아무 이의 없이 돌아 간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은 모든 것이 한 본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한 생명 안에서 모양이나 질이 다르지만 전혀 이질감이 나지 않는 다는 것이다. 내 몸에 다른 사람의 피를 주입하면 다시 살수 있게되는 것이다.

이것은 한 몸안에 있고 살과 뼈와 피는 하나라는 것을 알 수있다. 내 콩팥과 내 체액 사이에는 아무런 이의가 생기지 않는데 다른 콩팥을 이식 시키면 체액과 콩팥 사이에 거부감이 생기게 된다. 이러한 모든 현상을 보면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향해 지어졌음을 알 수있다. 식물속에서도 그리스도를 볼 수있고 동물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볼 수 있다.이것이 그리스도가 만유위에 계심이고 만유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다 함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것의 모든 것이다.

 

성경에서 " 그리스도의 머리 되심 안으로 복종하게 하려 한다."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은 모든 만물이 사람안에서 통일 되듯이 만물과 사람이 그리스도의 머리 되심 안으로 통일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과 형상이 하나 되는 것이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본체의 형상이시고 영광의 광채이시다.'라고 말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역사는 현재의 인격 안에서 통일 된다. 지나간 모든 사건들은 현재의 인격을 낳기위해서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인격이 A 이면 그의 역사도 A 로 통일 된다. 어떠한 것도 분리되어 있을 수 없다. 시각적으로는 나무, , ,등으로 보이지만 사람이 나타날 때 모든 것은 다 사람 안으로 통일되고 그리스도가 나타날 때 모든 것은 그리스도안으로 통일된다. 에스겔 37장을 보면 에스겔 골짜기에는 마른 해골들이 널려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 이 뼈, 저 뼈가들어 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고 그 뼈에 힘줄이 생기더니 살아 일어나서 큰 군대가 되더라는 것이다. 결국 모든 마른 뼈들이 군대안으로 통일 되었다는 말이다. 모든 뼈들이 군대를 위해 있었고 군대를 향해있었고 군대를 말미암아 있었던 것처럼 우리들의 지나간 모든 사건들은 낱낱이 흩어져 있다가 현재 우리 인격안으로 통일되어 어떤 것도 쓰지 못할 것이 없게 되었다.

 

우리가 만일 세상 안에서라면 역사가 모두 쓸데 없는 것이 되지만 그리스도안에서는 버릴 것이 없는 인생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러한 사람으로 이끄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으시고 모든 만물을 그에게 이끌어 오시니 그가 이름한 것이다. 그들의 이름이 되었다는 것은 모든 만유가 아담안에서 통일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만유안에 아담의 성분이 들어 있음을 말한다.

이름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생명을 규정지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규정지을 수 있다는 것은 또한 그 생명을 안다는 의미이다. 만물안에는 아담의 생명이 들어있다.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을 때 아담을 향해 지으셨기 때문이다. 한 대의 자동차는 수 많은 부속품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만들어 질때는 서로 다른 장소에서, 서로 다른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지지만 어느날 자동차안에서 모두 다 만나게 된다. 모든 부품들은 자동차안에서 통일 되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우리 인생도 그리스도안에서 통일된다.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 있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머리되심안으로 통일 되었다. 이것이 나타나는 곳이 교회이다. 삼만개의 자동차 부품처럼 교회안에는 여러 곳에서 여러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자동차가 아니면 삼만개의 부품들은 쓸모 없이 널려 있게 되듯이 교회가 아니면 사람들은 아무 쓸모가 없었을 것이다. 사람은 교회안에서 통일 되도록 지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도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데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자동차의 부품이 자동차가 되기위하여 불필요한 것이 없듯이.

우리는 교회안에서 통일을 맛보고 있다. 출신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학력도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통일을 이루고 있다. 갈수록 다른 사람들이 모이지만 이 다른 것이 많을수록 교회는 더욱 아름다워 지는 것이 신기하다. 각양 각색의 부품들이 그리스도의 머리 되심안에서 통일되는 것을 찬양하자.할렐루야!

 

예수를 믿는 사람 가운데는 특이한 사람이 많다. 남이 따를 수 없는 열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고 가족을 버리고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사람도 있고 주를 위하여 결혼을 안하고 사는 사람도 있다. 만일 이 사람들이 영원히 혼자 있다면 이들은 하나의 괴팍한 사람에 불과할 것이다. 이들은 교회안에서 한 부속품이 될 때 비로소 하나의 영롱한 보석이 될 수 있다. 새 예루살렘의 성곽이 되는데 한 모퉁이를 담당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각자의 색깔이 어떠냐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얼만큼 빛나느냐도 문제가 아니다. 아무리 빛나는 다이야몬드라해도, 아무리 비싼 자동차 부품이라해도, 그것들이 혼자 있다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아무리 시시한 것도 그것이 통일 될 자리가 있다면 그것이 가치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교회안으로 통일 된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그리스도는 나의 영원한 `'이고 교회는 우리의 영원한 `'이다. 이 둘은 하나이다.

`'`우리'는 하나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 아담을 지었다고 했지만 그 말은 곧 사람을 지었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세계는 하나가 전체이고 전체가 하나인 세계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세계는 다른 보석들이 모여서 집을 만드는 것이라기 보다 한 생명체가 점점 자라서 증가하는 것을 말한다. 원래가 하나이기 때문에 원래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영원한 본이신 그리스도돌아간다는 것은 곧 영원한 본인 교회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교회는 우리의 본향이다. 본향안에서만 우리에게 안식이 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정착할 떼 까지 안식 할 수 없었다. 우리는 가나안에 갈 때까지 안식할 수 없다. 부활안에서 안식하게 된다. 이 세계는 닥아 올 세계가 아니라 영원부터 있는 세계이다. 원래부터 있던 세계안으로 우리를 이끄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우리의 처음 자리가 하나님의 품이었다는 사실을 알게하신 주님을 찬양하자.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있었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다.( 1:1)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과 먼 것 같지만 원래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것이 축복이다. 우리가 부활을 경험하면 하나님과 내가 하나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이것은 우리가 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사실은 우리의 원래 모습인 것이다. 우리와 하나님이 갈라진 것은 사탄의 속임수 때문이다. 사탄에게 속은 뒤에 사람들은 하나님을 크게 불러야 했고 하나님이 멀리 계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그런데 이제 우리가 알게 된 것은 원래 우리는 하나님의 품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요한은 예수를 보고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라고 말했다. 원래 예수는 하나님의 품에 있었다는 말이다. 요한이 이렇게 말한 것은 예수뿐만 아니고 모든 인류의 운명을 말함이다. 이것이 우리가 전해야 할 복음의 내용이다. 모은 사람이 이 사실을 알게 되기를 원한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안에서 발견되기를 원한다.

나는 수풀을 헤치고 강을 건너고 들을 지나 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와서보니 온것이 아니고 본 자리에 돌아 왔다는 것을 알았다.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신 모습으로 돌아 온 것을 알았다. 그래서 이제는 사람들에게 달려가라고만 하지않게 되었고 '당신은 하나님과 함께 있는 사람입니다.' 라고 말하게 되었다.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 없도록 지어 졌다. 하나님의 호흡이 들어와서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흙과 생기가 다시 분리될 수 없다. 오히려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있는 사람을 보았다. 그 사람을 보니 우리의 영원한 원형을 발견하게 되었다. 내 모습이 그 원형안에서 발견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을 제자들에게 깨닫게 하기를 원했지만 이미 제자들의 생각은 분리의 개념속에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를 보여 주시면 족하겠읍니다.라고 말하게 되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있을 수 박에 없는 사람이었는데 사탄에게 속아서 갈라져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생각만 타파한다면 우리는 곧 하나님과 하나인 것을 알게 되고 서로 남남인 것 같았던 사람들이 창세때 부터 알았던 사람으로 여겨지게 된다. 우리가 부활안에 없을 때는 서로가 너무 많이 꾸몃기 때문에 서로를 알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부활안에서,교회안에서 우리는 근본안에서 만나는 사람이 되었다. 차조안에서 만나는 사람이 된 것이다. 꾸민 것이 다 벗겨지고 서로의 원형을 안에서 하나로 발견하게 되었다.

바울은 이 영원한 계시안에서 "아담안", "그리스도안"이라는 두가지 단어를 사용했다.

"우리가 아담암에서 죄인된 것 같이 그리스도안에서 의인이 되리다"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안에서 하나이고 ,모든 사람이 아담안에서 하나인 것이 실제이 다.우리들은 모두 한 고향 사람이다. 모두 갈릴리 출신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안으로 통일되고 교회안으로 통일되는 신기한 세계로 인도된 것을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새 창조안으로 이끄신 주님을 찬양한다. 아멘.

 

 

그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1:4)

 

지어진 만물을 보면 그안에 일정한 법칙이 있다. 이것은 한 법으로 만물을 지어졌기 때문이다. 건축가들이 집을 지을 때 여러가지 모양으로 짓는다. 그러나 그 모양이 다르기 때문에 공법이 다른 것은 아니다. 모양은 여러가지 이지만 짓는 원리는 하나인 것과 같다. 또한 지구상에 수만가지의 식물과 동물이 있지만 그들이 살아가는 원칙은 하나라는 것이다. 아무것도 저절로 된 것은 없다.그래서 우리는 누군지는 모르지만 일정한 법을 가진 분이 이 모든 것을 만들었다고 알게 된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 된 것이 없느니라."(1:3)에서 우리는 그가 곧 법칙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만물안에는 자연 법칙이 작용한다. 사람의 육체도 자연 법칙안에서 발견 된다. 그러나 사람의 인격은 법으로 발견되기 보다 어떤 마음으로 발견 된다. 인격안에는 마음이 있다. 마음을 통해 그 사람의 인격이 나온다. 그러면 마음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1;4) 우리들의 마음은 우리들의 생명에서 나온다. 마음은 사람을 이끌어 모기도 하고 무엇과 부딪쳐서 어떤 마음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러한 작용에도 법이 있다.

자연법칙처럼 규칙적이지도 않고 숫자로 기록할 수도 없고 계명으로 표현할 수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마음이라고 한다.

법이라고 할 때는 규정지을 수 있는 것을 말하고, 마음이라고 말할 때는 규정지을 수 없는 것이다.

마음은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관계를 나타내고 사람과 사람사이를 나타낸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마음을, 사람은 사람의 마음이 있는데 그 생명에 따라 그 마음이 나타난다.마음은 표현이고 생명은 본질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읽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행하신 행적을 보고 따라 하려고 한다. 예수님이 사랑했으니 나도 사랑을 하자, 바울이 전도를 열심히 했으니 나도 하자!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해보면 예수님이나 바울 처럼 않된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되는 것 같은 데 내용이 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사람이 다르면 생명이 다르고 생명이 다르면 마음이 다르기 때문이다.

내가 바울과 같이 살고 싶지만 그렇지 못한 것은 그의 생명과 나의 생명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삶을 살려면 바로 그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와 같은 생명이 되어야 한다. 이와같이 우리가 예수의 삶을 살려면 우리의 생명이 예수의 생명으로 바꾸어져야 한다. 생명의 변화가 있어야 우리안에 새로운 마음이 생기고 새로운 창조가 생긴다. 만물은 자연법칙에 의해 창조 되었다.그러나 인격의 창조는 마음에 의해 창조 된다.

하나님께서 한 포기의 풀을 만드실 때는 사랑을 가지고 하실 필요가 없다. 그것은 마음으로 만드시느 것이 아니고 법칙으로 만드시면 된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사람에게 사랑이 있게 하기 위해서는 마음이 필요하다. 눈물이 없는 사람에게 눈물이 있게 하기 위해서 마음이 필요하다.

요한복음은 하나님이 사람에 대하여 재창조를 하고 계시다.자연법칙인 일차적 창조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차적 창조인 인격의 창조를 말하고 있다.인격의 창조는 마음을 매개로 창조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먼저 마음을 창조하시고 그 창조된 마음이 그 사람안에서 무엇인가를 다시 창조하도록 하신다.

창세기 1장에 출현하고 있는 아담의 모습은 단순히 기능을 가진 사람이다. 무엇이든지 할수 있는 기구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보면 아무 것도 할 수없는 기구라 할 수있다. 다시말해서 자동차가 달릴 수있는 모든 기능을 가진 도구이지만 운전수가 없이는 한 치도 움직일 수 없는 도구인 것이다. 창세기 1^A:%늠 모습이 바로 이것이다.

자동차는 사람이 타야만 움직일 수있다. 기능은 완전하지만 스스로 갈 수없다.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가 그러하다.

사람이 이 원리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에 사람도 자동차를 만들때 스스로 가도록 만들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인간의 최종 목표는 스스로 움직이는 자동차를 만드는 것이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만든 사람이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생각하고 판단하고 느끼는 완전한 기능을 가진 존재이지만 그 기능을 스스로 움직일 수는 없다. 그 기능속에 어떤 것이 작용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없다. 스스로 사랑할 수도 없고 스스로 미워할 수도 없다. 밖에서 어떤 것이 들어 갈때 비로소 새로운 창조가 시작 된다.

 

사랑이 생겨나기도 하고 미움이 생겨나기도 한다. 사람 속에 사랑과 미움이 원래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누구를 만났을 때 무엇인가가 반응하여서 사랑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미움으로 표현되기도 하는 것이다.

첫 아기를 안은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는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일 것이다. 아기에 대한 사랑이 무한하기 때문이다. 아기에 대하여 끝없는 사랑이 창조되기 때문이다. 원래 모성애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아기를 낳으면 모성애가 발생된다. 사랑할 수있는 기능을 첫 번째 창조라 하면 어떤 반응에 의하여 사랑하는 것은 두 번째 창조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인격의 창조이다.

 

사도 요한은 자기가 예수라는 사람을 만나서 생겨난 새 창조를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이 복음을 대할 때는 반드시 "거듭난다"는 경험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 말해서 '두번 태어나는 사람'의 개념을 갖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부모에게서 태어난 개념을 가지고 요한복음을 이해할려고 하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타고난 생명의 어떠함이 아니고 창조된 사람의 어떠함이기 때문이다.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 된 것이 없느니라"고 말한 것은 수의 개념으로 창조를 표현하고자 함이 아니고 요한자신이 그리스도 없이 지어진 것이 하나도 없음을 표현하자 함이다. 요한은 자기를 자기 되게 하신 것은 예수의 마음이라고 말한다. 그 마음이 영원한 생명속에서 나온다. 우리가 이 영원한 마음으로 돌아갈 때 예수의 마음을 갖게 되고 그 마음이 생기면 우리 안에서는 창조가 시작된다.

고슴도치도 자기 새끼는 이뻐하는 데 그것이 이뻐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낳았기 때문이다. 새끼를 낳으면 사랑이 창조되어 나오는 것이다. 믿음도 창조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