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로마서

십자가와 나(4) 롬 5:5, 사랑의 극치 _ 김명혁 목사

'코이네' 2023. 1. 31. 17:52

십자가와 나(4)

"사랑의 극치"

본문 : 롬5:5-8

 

 

얼마 전 포항공대에 다니던 청년이 차도를 무단 횡단하던 어린 여자 아이를 트럭이 덮치려는 순간 그 아이 앞에 뛰어들어 그 어린 여자 아이를 살리고 자기는 트럭에 치어 죽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비극적 사건은 순간적으로 일어난 우연한 사건이라기 보다는 한 평생 불우하고 약한 사람들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살아오던 한 청년의 아름다운 삶을 멋지게 마감한 숭고한 사건이었다고 하겠습니다. 그 청년에 대해서 알기를 원하시는 분들은 강변 홈 페이지의 "아름다운 이야기"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바로 한 주 전에 40대 아버지가 불 붙는 아파트 집에서 6살 난 어린 딸을 구하기 위해서 딸을 안고 30미터 아래로 뛰어 내려 딸은 살리고 자기는 시멘트 바닥에 부딪쳐 죽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비극적인 사건도 순간적으로 일어난 우연한 사건이라기 보다는 늦둥이 어린 딸을 너무 사랑하고 사랑하던 아버지의 순수한 사랑이 승화되어 나타난 숭고한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랑은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지만 많은 경우에 비극적인 방법으로 나타납니다. 아름다움이 극에 달할 때 우리는 가슴에 아픔을 느낍니다. 아픔이 극에 달할 때 우리는 아름다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양 극은 서로 통하는 것 같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도 비극적인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 가장 비극적으로 나타난 사랑은 바로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비극적 사건은 순간적으로 일어난 우연한 사건이라기 보다는 쓰레기 같이 못쓰게 된 인간들을 내 버리시지 않고 그것들을 재생하기 위해서 고심하시고 애쓰시던 하나님의 사랑이 승화되어 나타난 구원 성취의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 아침 "십자가와 나"라는 주제로 네 번째 설교를 합니다. "십자가와 나"는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십자가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극치로 나타난 곳입니다. 오늘 아침 설교의 제목은 "사랑의 극치"입니다. The acme of love, the zenith of love 입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극치의 사랑을 세 가지 나누어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가치 없는 대상을 조건 없이 사랑한 무조건적 사랑이었습니다.

인간의 사랑은 조건적입니다. 예쁘고 가치 있는 것을 사랑하는 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우리 청년들이 나이가 들도록 결혼을 하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너무 조건적이기 때문입니다. 너무 예쁘고 너무 유능한 사람을 찾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종류의 사랑을 가리켜 우리는 에로스적 사랑이라고 합니다. 에로스적 사랑의 강도는 그 대상의 미와 가치에 의해 정해집니다. 진선미와 영원에 대한 인간 본능의 추구적 사랑 즉 에로스적인 사랑은 희랍 종교를 비롯한 대부분의 세계 종교에서 그리고 기독교적 신비주의에서 흔히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그 대상의 미와 가치를 묻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아름답고 가치 있고 의로운 사람들을 사랑한 에로스적인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연약하고 경건치 않은 죄인들과 원수들을 사랑한 무조건적 사랑이요 모순된 사랑이었습니다. Unconditional and paradoxical love 였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랑을 가리켜 아가페적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로마서 5장 본문을 자세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6).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8).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10).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연약한 사람들과 경건치 않은 사람들과 죄인들과 원수들을 사랑한 무조건적인 사랑이요 모순된 사랑이었습니다. 조건이 많고 이유가 많고 따지기를 좋아하는 성품을 가진 사람은 아가페과에 속한 사람이라기 보다는 에로스과에 속한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 행복이 아닌 다른 사람의 행복을 추구하는 이타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인간의 사랑은 자기의 행복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사랑입니다. 에로스의 사랑은 아름답고 가치 있는 대상을 소유하므로 자기의 만족과 자기의 행복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사랑입니다. 따라서 에로스적 사랑의 강도는 그 대상을 소유하므로 내가 얼마나 큰 만족과 얼마나 큰 유익과 얼마나 큰 행복을 얻을 수 있느냐에 달립니다. 행복 추구적 에로스의 사랑은 대부분의 인간의 사랑과 인간의 활동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복 받기 위한 낮은 차원의 신앙 생활 가운데도 이와 같은 에로스적 동기가 숨어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의 만족이나 자기의 행복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자기의 만족과 행복을 포기하고 내어 주는 희생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자기를 포기하는 그래서 다른 사람을 얻는 이타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자기가 사는 사랑이 아니라 자기가 죽는 사랑이었습니다. 자기가 죽고 그 대신 다른 사람을 살리는 비극적인 사랑이었습니다. 포항공대 학생과 40대의 아버지가 그와 같은 사랑을 실천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아가페 사랑의 시조는 하나님 자신이시고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로마서 5장 본문을 자세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6).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8).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10).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를 얻는 사랑이 아니라 자기를 버리는 역설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자기를 버리고 다른 사람을 얻는 희생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자기 유익과 자기 평안과 자기 행복만을 추구하는 성품을 가진 사람은 아가페과에 속한 사람이라기 보다는 에로스과에 속한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셋째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가치 없는 대상속에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창조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인간의 사랑은 자기 성취에 목적을 두는 자기 성취적인 사랑입니다. 에로스의 사랑은 아름답고 가치 있는 대상을 소유하므로 자기가 행복하고 그리고 자기 삶의 목적을 성취하는 데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때는 권력의 쟁취일 수도 있고 어떤 때는 사업의 성공일 수도 있고 어떤 때는 명예의 획득일 수도 있고 어떤 때는 영생의 획득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에로스적 사랑의 강도는 그 대상을 소유하므로 내가 얼마나 크고 높은 목적을 성취할 수 있느냐에 달립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 성취적인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가치 없는 대상 속에 가치를 만들어 내고 아름답지 못한 대상 속에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는 상대 성취적인 사랑이요 가치 창조적인 사랑이었습니다. 경건치 못한 사람을 경건한 사람으로 만들고 불의한 사람을 의로운 사람으로 만들고 죄인을 의인으로 만들고 원수를 화목한 사람으로 만들고 두려워하는 사람을 즐거워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창조적인 사랑이었습니다. 로마서 5장 본문을 자세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니 더운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9). "우리가 원수 되었을 대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10).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 하느니라"(11).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상대 성취적인 사랑이요 가치 창조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아가페의 사랑이 부어질 때 자기만 사랑하던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랑의 사람이 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그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5).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사랑을 체 받은 후 하나님과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랑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5:13,14). 십자가의 사랑은 미움의 사람을 사랑의 사람으로 만듭니다. 상대방에 대한 사랑이나 상대방의 성취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 사랑과 자기 성취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은 아가페과에 속한 사람이라기 보다는 에로스과에 속한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 아침 십자가 사랑의 특징 세 가지에 대해서 말씀 드렸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대상의 아름다움이나 가치를 묻지 않는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자기의 행복을 포기하고 그 대신 다른 사람을 살려서 행복하게 만드는 이타적인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자기 성취에는 관심이 없고 상대방의 성취에만 관심을 두는 창조적인 사랑입니다. 이와 같은 사랑이 십자가에 나타났습니다. 십자가는 멋진 장식품이 아닙니다.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 가장 비극적으로 나타난 곳입니다.

"십자가와 나" 십자가와 나는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십자가의 사랑이 내 가슴에 부어질 때 가치 없던 나의 존재가 가치 있는 존재로 바뀌어 집니다. 아름답지 못하던 나의 존재가 아름다운 존재로 바뀌어 집니다. 의롭지 못하던 나의 존재가 의로운 존재로 바뀌어 집니다. 그리고 남을 무시하고 미워하던 이기적인 나의 존재가 남을 귀하게 여기고 남을 사랑하는 사랑의 존재로 바뀌어 집니다. 가치 없고 아름답지 못한 사람들을 조건 없이 사랑하는 사람의 사람으로 바뀌어 집니다. 사실 이와 같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외국인 노동자 교회의 김해성 목사님과 이선희 전도사님이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들은 대부분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고 한이 맺힌 사람들이고 거친 사람들이고 예의에 벗어난 사람들입니다. 잠시 머물다가 떠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계속해서 베푸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오직 십자가에 나타난 아가페의 사랑을 계속해서 부음 받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5:5).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들과 저의 마음에 부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여러분들과 저를 강권하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가장 아름다운 비극적인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들과 저를 사로 잡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질이 바뀌어 지고 우리의 성품이 바뀌어 지고 우리의 운명이 바뀌어 지고 우리의 삶이 바뀌어 지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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