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자료

[종교개혁주일 설교, 갈2:6] 새롭게 하시는 역사를 따라 _ 유경재 목사

'코이네' 2022. 10. 29. 17:07

새롭게 하시는 역사를 따라

본문 갈2:6-14

서울안동교회/유경재목사

 

 

 

 

오늘은 종교개혁 기념주일입니다. 15171031일 마틴 루터가 95개조 논제를 비텐베르그 성 교회 정문에 써 붙이므로 비화된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주일을 정하여 이것을 기념하는 것은 교회가 그때 새롭게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루터는 로마서 연구를 통하여 로마 가톨릭교회의 공덕사상(功德思想)을 비판하고,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신학의 발견이었으며, 새로운 교회의 출발점이 되었던 것입니다. 루터 이후, 칼빈이나 존 녹스 같은 많은 개혁자들이 나타나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새로운 신학사상들을 발전시켜 나갔던 것입니다. 종교개혁 이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은 보편화되지 못하였고, 말씀에 대한 깊은 연구가 없었던 것입니다. 종교개혁은 인쇄술의 발명과 루터의 독일어 성경번역 등과 더불어 성경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전파하였고, 말씀 중심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것입니다.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성경과, 그리고 믿음을 재발견한 놀라운 개혁이었습니다. 이것들은 오늘날 우리 개신교 신앙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종교개혁의 정신입니다. 과거의 전통과 틀에 매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새롭게 발견하면서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총의 세계를 열어 나가고자 했던 그 개혁정신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계승해 가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시대의 변화에 따라 항상 새롭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지나간 시대의 해석에 얽매서 새로운 해석을 정죄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보수적 경향이 항상 그 교회를 낙후시키고 하나님께서 열어 가시는 새로운 역사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1. 초대교회의 두 사도

 

베드로와 바울은 초대교회의 두 기둥과 같은 사도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직접 따라다니며 말씀을 들었고,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을 모두 목격한 사도라면, 바울은 오히려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던 자였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통하여 변화된 후 기독교의 신학화에 공헌하고, 특히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파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사도입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 교회를 대표한다면, 바울은 이방인 교회를 대표하는 사도라 하겠습니다. 베드로가 유대인 크리스천을 대표한다면, 바울은 이방인 크리스천을 대표하는 사도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직접 모신 제자로서 그의 생애와 교훈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그대로 전달한 전도자였다면, 바울은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한 신학자였다고 하겠습니다. 베드로가 할례를 받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한 사도라면, 바울은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 사도였습니다.

 

베드로가 할례를 받은 유대인에게 국한하여 복음을 전한 것은, 율법을 상징하는 할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반해 바울은, 유대인이 절대시 한 할례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대치함으로서, 그 한계를 넘어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베드로의 신학적 입장은 보수적일 수밖에 없었고, 바울의 입장은 진보적이었습니다.

 

사실상 베드로와 바울의 신학은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로마 백부장인 고넬료의 초청을 받고, 그 집에 가서 경험하였던 일을 통하여 이미 그의 신학이 분명하게 바뀌었고, 그래서 예루살렘 회의에서도 바울의 신학을 지지해 주었던 일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디옥에 내려와서도 이방인 신자들과 더불어 자유로운 교제를 나눌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그의 유대인으로서의 오랜 관습이 그로 하여금 자기도 모르게 이방인과의 구별을 의식하게 하여 식사 자리에서 뒤로 물러나 앉게 만들었던 것뿐이라 하겠습니다.

 

2. 두 사도의 차이

 

그러나 베드로와 바울이 같은 신학 사상을 가지기는 하였지만, 베드로는 그 신학적 입장을 수동적으로 수용한데 반해, 바울은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베드로는 유대인을 위한 복음 전파자가 되었고, 바울은 스스로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자처하면서 3차에 걸친 선교여행에 나섰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고넬료 집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신학적 입장을 수용하기는 하였지만, 그런 입장을 따라 적극적으로 이방인 전도에 나서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베드로는 여전히 율법주의의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반해 바울은 복음의 진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하여 율법주의의 울타리를 과감하게 벗어나 적극적으로 이방인 선교에 나섰고, 그 복음을 수호하기 위하여 과감하게 투쟁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바울의 이런 새로운 신학적 입장이 복음을 이방 세계에 널리 전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아니었다면, 복음은 유대인에 국한되어 오늘의 세계적 기독교가 되지 못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던 선민의식 내지는 특권의식의 장벽을 헐어버리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복음에 대한 깊은 이해와, 새로운 해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의 복음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이방인 선교라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 놓았다고 하겠습니다.

 

3. 새 시대를 향하여

 

복음은 항상 그 시대의 상황에 따라 새롭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군사 독재에 시달리던 남아메리카에서 자연스럽게 해방신학이 대두되었고, 억압당하는 흑인들 속에서 흑인신학이 나오게 되었으며, 분단의 아픔과 군사 독재의 억압하에 있던 한국교회는 민중신학을 태동시켰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새로운 신학이 나올 때마다, 이를 저지하고 반대하며 핍박하는 보수 세력이 항상 있어 왔습니다. 바울의 진보적인 신학을 반대하며 핍박하였던 유대인들이나, 루터의 개혁을 저지하려 하였던 로마교황청이 그런 보수 세력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의 변화는 하나님께서 친히 이끄시는 역사이므로, 누구도 그것을 막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변화되는 역사를 이끌 새로운 일꾼들을 부르시어, 그 시대에 맞도록 복음을 재해석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복음이 가지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에 대하여 열린 마음으로 탐구하는 자세입니다. 복음의 세계는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그 시대마다 새로운 깨우침으로 인도하실 때, 우리가 과거의 전통과 틀에 매이지 아니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항상 우리의 마음을 열어 놓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과학의 발전에 따라, 과거에는 경험할 수 없었던 새로운 사실들을 받아들이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요즘은 특히 정보 통신의 발전이 눈부시게 진행되면서 새롭고 신기한 통신수단들이 대거 등장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어떤 변화가 우리 앞에 다가올지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지금 전혀 생각지도 못하였던 일들이 나타날 것이라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앞으로 올 시대는 무한하게 열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과학자들이 끊임없이 과거의 어떤 규범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그 미래의 세계를 탐구해 갈 때, 새로운 도구나 이론들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나타난 새로운 이론이나 도구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낡은 이론이나 도구를 고집하는 사람이 있다면, 결국 그는 낙후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가령 예를 들어, 어떤 은행이 편리하고 빠른 컴퓨터란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주판과 수작업만을 고집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은행은 곧 문닫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변화하는 시대에 따른 새로운 신학, 새로운 틀이 필요한데, 과거의 이론과 생각만을 고집한다면, 결국 새로운 역사에 대응하지 못한 채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다가오는 21세기는 단순히 정보 통신의 혁명적인 변화만 이루어지는 시대가 아닙니다. 그 변화는 우리의 삶에 변화를 가져올 것이며, 우리의 사고에 변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도 그 시대가 요구하는 신학과 믿음의 형태를 새롭게 해석해 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며, 그것을 따라 교회를 새롭게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예배가 새로워져야 할 것이며, 전도의 방법도 달라져야 하며, 교회의 조직도 변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금은 교회가 개혁되어야 할 시점입니다. 급변하는 시대 정세를 우리가 깊이 있게 통찰하면서 그 속에서 복음의 진리가 어떻게 재해석되고 있는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지켜 온 신앙의 전통을 이어가되 변화하는 시대에 맞도록 재해석하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며, 이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교회의 목회를 개혁하는 작업에 박차를 가하여야 할 것입니다.

 

16세기의 종교개혁은 안일하게 권위주의에 머물던 로마 가톨릭교회를 뒤흔들어 놓았고, 새로운 교회를 탄생시켰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과거의 영광에 연연하여 안주할 때, 하나님의 새롭게 하시는 역사를 통하여 뒤흔들리게 될 것이며, 자칫 잘못하면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자유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리며, 그 부르심에 최선을 다해 응답하도록 준비하여야 하겠습니다. 언제나 자기를 고집하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자유롭게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