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자료

[종교개혁주일 설교, 눅15:3] 목자와 양으로

'코이네' 2022. 10. 29. 17:05

목자와 양으로

누가복음15:3-7

20001029(483주년 종교개혁주일)

 

 

 

미국사회가 골치를 앓고 있는 것 중에 하나는 마약문제입니다. 심각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는 이 마약문제가 미국뿐 아니라 우리 한국사회에도 상당히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전에는 주로 향락업소에 종업원들이나 일부 연예인들에 의해 성행이 되어졌는데 최근에는 청소년 여성, 심지어 주부들까지도 마약이 깊숙이 침투해 있다고 합니다. 한때는 전직대통령의 아들까지도 마약에 중독이 되어 감옥에 들어갔다 온 일도 있었습니다. 이 마약은 한번 중독이 되면 좀처럼 끊기가 어렵고 온 몸과 정신이 다 망가질뿐 아니라 가정이 완전히 파괴되어 집니다.

마약중독자들은 처음부터 중독이 된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재미 삼아 한 두 번 하다가 점점 깊이 마약 맛에 취하고 조금씩 양을 늘려가다가 결국은 중독이 되어 이제 마약이 없이는 살지 못할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어머니가 끓여주는 구수한 된장국도 마약보다 못하고, 아내가 만들어 주는 맛있는 불고기도 마약보다 못하게 됩니다.

 

한 마리의 양이 목자의 눈을 피해 목자가 먹지 못하게 했던 꼴들을 먹습니다. 보기에 탐스럽고 예뻐 보이는 꼴들, 전에는 목자가 옆에서 일일이 간섭하고 먹지 못하게 했던 꼴들도 마음놓고 먹습니다. 입안에서 달콤했고 자극적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증상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몸이 말라가고, 눈이 흐려지기 시작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 꼴을 먹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이미 그 꼴에 중독이 된 것입니다. 그 꼴들은 독초였습니다. 먹으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목자의 눈치를 봐가면서 몰래 먹습니다. 목자가 인도하는 초장에 있는 풀들도 독초보다 맛이 없습니다. 우리 안에 넣어주는 풀도 독초보다 맛이 없고 자극이 없습니다. 점점 그 양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옆에 있는 다른 양들과 관계가 깨어지기 시작합니다.

목자와의 관계도 깨어집니다. 어느날 그 양은 우리에서 보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양은 우리를 뒤쳐 나가고 만 것입니다.

 

성경에 예수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양()이라고 했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목자(牧者)라고 했습니다. 목자는 양을 치는 자이고, 양은 목자에 의해서 살아가는 자입니다. 양이 목자의 인도함을 받을 때 가장 평안하며 가장 만족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목자가 주는 꼴을 먹을 때 가장 안전하고 영양가가 있습니다.

 

시편23편을 보십시오. 경상도 버전으로 읽습니다.

: 여호와는 내 목잔기라 내사 모자랄께 없다아이가

: 시퍼런 풀구디에 날 디비시고

: 퍼질러 앉을만한 또랑가로 델꼬 가신데이

:

: 내 정신 챙기시사 올케 살라카심은

: 내 디질뻔한 골짜기 컴컴한데서도

: 간띠가 부가 댕길수 있음은

: 그 빽이 억빨로 든든한기라

:

: 주의 몽디와 짝대기가 날 지키시고

: 내 웬수 쥑일 놈 문디 앞에서

: 내 기를 이빠이 세워주시고

: 내 평생 동안 지켜준다 캤으니까

: 내싸 우짜든동 그 옆에 딱 붙어가꼬

: 디져도 안 떨어 질란다.

양이 목자를 신뢰할 때 최상급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목자를 신뢰하지 못하거나, 떠나는 양은 살아가고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죽어가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습니다.

 

요한복음10장에서 예수 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고 당신을 소개하십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10:10)고 하십니다. 그리고 16절에 보면 예수 님께서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밖에 있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도 많이 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신앙을 외면하고 교회를 떠난 성도들이 있습니다. 어떤 성도들은 생각합니다. 우리 안은 구속(拘束)이다. 답답하다. 교회 다니니 불편하다. 눈치 보이고 하고 싶은 것 마음대로 못하고, 먹고 싶은 것 먹지 못하고, 가고 싶은 곳 마음대로 못 가고, 말씀대로 살다가는 내 하고픈 것 못하겠다. 라며 떠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신앙은 구속(拘束)이 아니라 구속(救贖)입니다. 즉 모든 억압에서 해방이요 자유입니다. 우리 안은 가장 안전하고 가장 평안하고 가장 좋은 곳입니다.

 

오늘본문에서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어깨에 메고 기뻐하며 돌아와서 벗들과 이웃들을 불러 잔치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잔치비용이 양 한 마리 값보다 더 드는데도 말입니다. 그 이유는 그 양은 자기 양이었고, 목자는 양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떠난 양은 이미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밖에는 온갖 독초가 있고, 혹은 이리떼나 승냥이 떼들이 득실거리기 문입니다. 그 위험에서 건져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의 심정을 그대로 묘사한 것입니다.

시편23편에서 온갖 독초가 있는 곳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디질뻔한 골짜기)"이요. 이리떼나 승냥이 떼들은 "내 원수들(내 웬수 쥑일 놈 문디)"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마틴루터가 종교개혁을 한지 483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1517년 도미니카 수도사 테철이 면죄부를 만들어 판매하는 것을 보고 루터는 당시에 카톨릭의 부패에 관한 반박문 95개 조항을 적어 비텐베르그 성당 대문에 붙였습니다. 이것이 기화선이 되어 교회가 새롭게 탄생하게 된 것이 오늘의 개신교회입니다. 종교개혁의 가장 중심이 되는 원리가 무엇인가 하면 "성경으로 돌아가자"(Back to the Bible)는 것입니다. 즉 말씀의 회복이었습니다. 전통도 아니고 교황의 말도 아니고, 오직 성경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카톨릭은 아직도 교황의 말을 성경만큼이나 권위를 갖습니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종교개혁주일을 맞으면서 우리는 성경말씀대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목자와 양"의 관계임을 다시 한번 확인합시다. 그래서 시편23편 마지막 절에 있는 말씀처럼 "내싸 우짜든동 그 옆에 딱 붙어가꼬 디져도 안 떨어 질란다."라는 고백이 자신의 고백이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 믿는 것이 삶의 장식품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종으로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목자로서 우리를 먹이시고 입히시고 인도하시며 우리 삶을 책임지시는 분이십니다. 어떤 이는 왜 교회에 다닙니까? 했더니 '불자님' 소리 듣는 것보다 '성도님'소리 듣는 것이 더 낫다나! 또 기독교는 깔끔하니까! 고급스러우니까! 등등 그것은 교회 다니는 이유가 아닙니다. 그분은 나의 목자시기에 내가 그 분을 떠나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11월호 교회교육 부록책인 교사클릭에 어느 교회의 교사가 글을 섰는데 아주 감동을 주었습니다. 제목은 "일주일의 시간은 너무 길고 일주일에 한번은 너무 짧다" 였습니다. 글의 서두에 한 방송에서 들은 얘기를 했습니다. 직장 일로 인하여 아이를 일주일동안 한번밖에 만나지 못하는 엄마가 방송상담을 의뢰했는데, 아이가 계속해서 손가락을 빨고 손톱을 물어뜯는 습관이 있다는 고민을 털어놓은 것입니다. 전문가의 답변은 아이가 엄마의 관심을 지속적으로 받지 못하면 엄마의 관심을 대신할 만한 그 어떤 것을 찾는 다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현상으로 나타나지만 그 아이는 손가락을 빨고 손톱을 물어뜯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의 시발점은 결국 일주일에 엄마를 한번밖에 만나지 못한다는 데 있는 것

입니다. 그러면서 글을 쓴 선생님은 '일주일에 한번 만나는 교사와 어린이! 같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까요?'라고 문제를 제기한 것입니다. 일주일에 한번 만나는 그 만남을 통해 얼마나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까? 그래서 결론은 일주일에 한 시간이 아니라, 만남은 가지지 못할지라도 주중에 계속적으로 아이들과 관계를 맺어 가는 방법, 일주일에 단 한번만 존재하는 관계가 아닌 일주일동안 지속되는 관계가 필요하다. 계속적인 관심 속에서 진정한 신뢰와 관심이 적립되어 있을 때, 일주일에 단 한시간뿐인 교회학교 교사와의 만남이 매일 만나는 그 어떤 누구와의 만남보다 큰 의미를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반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란 일주일 동안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 즉 무슨, 무슨 요일에는 전화, 무슨 요일에는 아이들이 선생님께 편지등등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성인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는 예배 한 시간, 주일 하루 만나는 관계가 아닙니다. 매일 매일의 관계입니다. 매일 만나고, 매일 꼴을 받아먹고,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목자장이 되시는 예수 님께서 이 땅에 교회에 목회자에게 양들을 위임해 놓으시고, 신령한 꼴을 먹이시는데, 양들이 과연 일주일에 목자를 한번 만나 한번 받아먹고 제대로 살수 있을까요? 그래서 교회의 목회자는 새벽에, 수요일에도, 금요일에도 꼴을 준비하고 기다립니다.

그러나 먹는 자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새벽마다 말씀을 준비하는 것이 쉬운 것입니까?

여러분 매일 아이들 도시락 반찬 만드는데 얼마나 힘듭니까? 그래도 내 자식이니까 사명감을 가지고 하지 않습니까? 목사가 사명감이 없으면 하겠습니까? 그래도 한 사람이라도 더 먹이려고 매일 화-금요일가지 인터넷으로 올리고 메일로 받아 볼 수 있도록 합니다만 이미 세상 독초에 입맛이 익숙한 자들은 도무지 먹을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내 영혼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무서운 병이 무엇입니까? 암입니다. 암에 특징은 자각증세가 거의 없고 말기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자각증세가 날 때는 이미 때가 늦어 수술도 불가능하고, 의사들이 3개월 밖에 못살겠습니다. 그 때는 울어도 소용없고 아무리 좋은 약이 소용없고, 더 살고 싶다고 몸부림쳐도 때는 늦으리!

 

안 먹고 병 안날 사람 있으면 나와 보세요. 하루 이틀 말이지 한달 두달 먹지 않으면 병이나고 죽을 수밖에 없는 거지요! 별수 없습니다. 목사가 때로는 매일 요리솜씨가 같으니까 식상할까봐 특별식으로 부흥회도 하고, 좋은 곳이 있으면 소개도 합니다. 지난 수요일에 연합집회에 제가 미리 가봤는데, 너무너무 재미있고 은혜스러워 다 연락해서 집회에 참석하라고, 제가 먹여 줄 수 없는 또 다른 맛에 말씀이기에 가라고 했더니 얼마나 왔는지! 차를 보내줘도 안되고, 요즈음은 이들이 정말 주님이 내게 맡겨주신 양인지 의심이 다 되드라니깐요! 많은 성도들이 목자가 주는 꼴보다 독초와 같은 세상교훈과 사람의 교훈에 입맛이 길들어져 가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신령한 것과 독초를 적당히 섞어 먹는데 익숙해 져가고 있습

니다. 영혼이 썩어져 가는 것도 모르면서 말입니다. 영혼이 병들어가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내 영혼이 병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아는 방법 중에 하나님의 말씀이 듣기 싫고 목사의 설교가 듣기 싫으면 병들었다고 보면 확실합니다. ()은 요! 어느 부분에 병들든지 귀가 아프고 안 들린다고 합니다. 배가 아파도 귀가 아프고 안 들리고, 위장에 장애가 와도 귀가 아프고 안 들린다고 합니다. 관절염이 와도 귀가 아프고 안 들린다고 합니다. 말씀이 싫으면 그것은 내 영혼이 병들었다고 생각하고 빨리 치료를 해야 합니다.

종교개혁당시에 카톨릭교회의 수도사들도 말씀은 안 듣고 고행만 하고, 기도문을 외워도 그 내용이 성경 어느 곳에 있는지 조차도 몰랐다고 합니다. 그러니 저들이 심각한 영적인 병을 앓고 있으면서 온갖 타락과 부패를 일삼았는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다 양()입니다. 하나님은 목자입니다. 예수 님은 목자입니다. 목회자는 예수 님께서 위임한 목자입니다. 이것은 성경말씀입니다. 예수 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목자가 주는 영양식을 꾸준히 먹고 그의 인도하심을 계속 받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화 혹은 천국화 되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풍성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지식도 경험도 다 버리고 성경으로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