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히브리서

[어버이주일 설교] 3대가 함께 사는 가정, 황영준 목사 설교

'코이네' 2014. 5. 9. 22:52

어버이주일 설교, 3대가 함께 사는 가정, 황영준 목사 설교




본문  히11:3-11 / 3대가 함께 사는 가정 /광주동산교회 /황영준목사

지난 월요일 무의탁 노인들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여전도 회원들이 모은 구제비를 가지고 임원들과 함께 담양군 용면 추성리 그러니까 담양댐 상류 골짜기에 사는 장씨 할머니와 김씨 할머니 댁이었습니다. 김씨 할머니는 단간 방 뿐인 좁은 집에서 홀로 사는데 아들 하나 있지만 소식이 끊어진지 오래라고 했습니다. 귀가 어두워져서 말도 알아듣지 못하고 돈을 드려도 어떻게 어디다 써야할 줄도 모르는 그런 분이었습니다. 이장에게 봉투를 건네주고 할머니에게 잡수실 것도 대접하고 유익하게 사용해 주시라고 하였습니다. 할머니들은 마을에 또 한 분 어려운 분이 있다면서 도와주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들을 보이셔서 가 보았습니다. 할머니들이 도시 변소 칸 보다 못한 집에 산다고 하더니 그런 헛간 같은 곳에 한쪽은 방이고 한 쪽은 부엌이었습니다. 75세라고 하는데 거동이 불편하지만 교회를 다닌다고 하였습니다. 마침 어디 나가고 계시지 않아서 얼마 되지 않는 금액을 전하고 왔습니다. 또 4가정을 더 찾아보았습니다. 만나지 못한 분들은 면사무소를 찾아가서 부면장에게 전하고 왔습니다. 잘 찾아왔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우리 여전도 회원들의 작은 정성을 하나님께서 무척 기뻐하시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시골 교회 목사님들과 전도사님들에게 송금한 금액도 그렇게 유용하게 쓰일 것입니다. 할머니들 나이가 80이라고 하면, 1910년대에 출생한 분들입니다. 구 한말 어려웠던 시대에나서 일제 시대와 해방, 그리고 6․25동란 등을 겪었을 것입니다. 배고팠던 날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광야 인생을 살고 늙고 무덤에 장사되었습니다.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히11:10)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서 아들 이삭과 손자 야곱과 함께 장막에서 살았습니다. 3대가 한 가정에서 살았던 것입니다. 비록 저들은 좋은 집이 아니라 장막에 거하고 있었고 큰 어려움도 많았지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유대의 왕들이 출생하였고 나중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셨습니다. 육신적으로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1.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 손자 야곱과 3대가 함께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서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였습니다. 순종하여 나가는 길에 하란에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약 속의 땅 가나안에 이르렀을 때 기근이 들어서 애굽으로 가야 했고, 그곳에서는 아내를 잃을 위기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한 언약의 자손을 얻으려고 아내의 몸종 하갈을 맞아 아이 이스마엘을 낳았지만 가정에 불화가 컸습니다. 그의 나이 1백세가 되어서야 언약의 자손 이삭을 얻었습니다. 아브라함은 1백75세에 죽기까지 가나안 땅에서 살았습니다. 광야 인생을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175세에 일생을 마치니 그의 아내가 먼저 묻혔던 막벨라 굴에 장사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나이 늙어서 175세로 세상을 떠날 때, 아들 이삭은 75세의 노인이 되었고, 손자 야곱은 15세 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3대가 함께 살았습니다. 이삭도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창27:1)라고 하였습니다. 그도 늙고 쇠약해졌습니다. 늙어 기운이 진하매 죽어 장사 지낸바 됩니다. 그의 나이 1백 8십세 였습니다(창35:29).

야곱도 아들 요셉이 총리가 된 애굽 땅에 가서 살다가 세상을 떠나 조상들이 묻힌 막벨라 굴에 묻혔습니다. 누구나 세상에 사는 동안 항상 평안(平安)하지만 않습니다. 어느 시대 누구라도 인생 광야 길은 힘들고 어려운 것입니다. 야곱이 노년에 애굽에 내려가서 바로 왕을 만나서 한 말이 있습니다. "내 나그네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47:9)하였습니다. 내 인생 길이 험악했다는 고백입니다. 자녀들은 일생을 살아오면서 고생 많이 하신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려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이렇게 세상을 살다가 갈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가족간에나 일가 친척 간에 어른을 향하여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20:12)는 말씀대로 효도해야 합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렇게 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인륜 가운데 첫째 입니다. 하나님은 부모를 섬겨서 효도하는 후손에게 축복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불효하는 자에게는 화가 미친다고 하셨습니다. 험악한 세상을 살아온 부모를 섬겨 효도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 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5:8) 했습니다. "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출21:15) 했습니다. 이런 계명을 주신 하나님이 불효자를 징벌하실 것이요, 효도하는 자에게는 축복하십니다. 부모님이 살면 얼마나 더 삽니까? 힘들고 어렵더라도 효도하십시오. 큰복을 누릴 것입니다. 자녀를 향하여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유업을 이을 자로 믿음 안에서 살게 하여야 합니다. 저들도 자라면 어른들과 같이 험악한 인생 광야를 가는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2. 아브라함 일가는 언약을 바라면서 소망 중에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인생 광야 길이 겹겹의 장애물이요 험난한 길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습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12:3)하신 약속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니라"(창12:2)는 말씀대로 "육축과 은금이 풍부"(창13:1)하였고,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복을"(24:1)주셨습니다. 아내 사라는 나이 늙었으나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잉태하여 아들 이삭을 얻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이 세상에서 천년만년 살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11:10) 하였습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약속을 다 보지 못하였지만,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면서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사모했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거친 인생 광야를 가면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불평이나 불만보다는 소망의 세계를 바라보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기회 있는 대로 선을 베풀어야 합니다. 성경은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잠15:17) 했습니다. 믿음 안에서 화목하게 살아야 합니다. 야곱도 청년의 때에 욕심도 많고 경건하지 못하여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내가 넷에 12아들을 두었는데 가정에 보이지 않는 갈등이 많았습니다. 나중에는 경건한 믿음의 인물이 되었지만 그도 조상들의 가는 길로 갔습니다. 우리의 인생 길이 거칠고 험하여도 아브라함과 같이 인생 나그네 길에 순례의 길임을 알고 불평하지 맙시다. 포기하지도 맙시다.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이 땅에 보냈으니 내 인생 순례를 다하는 그 순간까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소망의 세계를 바라봅시다. 이 세상 소망은 무너져도 하늘에 예비한 하나님의 축복은 영원합니다. 가족의 믿음 안에서 가정 천국을 이룹시다.

조선시대에 백성들의 신분은 양반과 평민이 있었는데 백정은 평민 보다 더 천대를 받았습니다. 백정은 기와집에서 살 수 없었습니다. 비단 옷이나 짚신도 신을 수 없었고 담배도 피우지 못했다고 합니다. 자기보다 신분이 높은 사람이 지나갈 때도 길옆으로 비켜서서 허리를 구부리고 있어야 했으며, 길을 걸을 때도 허리를 구부리고 뛰어 가듯이 껑충거리며 다녀야 했답니다. 상투를 틀 수도 없고 아들을 날 때까지 머리를 묶지도 못했으며 망건도 쓰지 못했습니다. 혼인을 할 때도 말 대신에 소를 타야 하는 철저하게 비천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박씨라는 백정이 장티푸스에 걸렸습니다.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아서 죽을 형편이 되었는데 에비슨 의사(선교사)가 집에 찾아가서 치료를 해주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집안 식구가 예수를 믿었고 아들은 교육을 받고 세브란스 의학 1회 졸업을 해서 의사가 되었습니다. 박씨는 예수를 믿고 백정들에게 열심히 전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장로가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예수 믿고 장로가 되었으니 복스럽게 변화 받은 분입니다. 교회에서야 평민 양반 구별이 없었습니다. 백정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천하보다 귀한 생명입니다. 양반이라 하여 백정보다 나은 사람이라고 자랑할 수 없는 것이 교회입니다. 유덕용 목사님은 우리 총회신학교를 나와서 우리 교단 목사가 되었습니다. 내가 3학년일 때에 학교의 특별 초청을 받아서 설교를 했습니다. 청년 시절에 문둥병에 걸려서 짐승처럼 천대를 받으면서 소록도로 끌려갔었다고 합니다. 차라리 죽고 싶어서 얼마 동안 식음을 중단하였는데, 어느 간호원의 격려와 사랑으로 교회를 나갔답니다. 그리고 예수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고 간증합니다. 손가락이 끊어져 나가 버린 몽당 손을 보이면서 이것이 오히려 하나님께로 나가는 축복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처음에는 눈물이 핏방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눈물은 다시 감사의 눈물이 된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인생 절망의 깊은 늪에서 다시 태어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교인들이 목사님의 손을 맞잡고 반기면서 위로합니다. 예수 안에는 건강한 사람이나 흉악한 병에 걸리고 불구가 된 사람이나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로 놀랍게 변화한 사람들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직도 거룩하지 못하고 경건하지 못하는 죄와 허물이 많은데도 하나님 앞에서 여러 가지로 신분이 바뀐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대속하시고 죄에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로막혔던 죄의 담을 헐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망에 떨어졌던 우리를 하나님 나라 백성 삼아 주시고 모든 믿는 자들과 믿음의 가족이 되게 하셨습니다. 생각하면 우리는 그리스도밖에 있어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었습니다. 성경은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엡2:11-12)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인 유대인들은 다른 민족을 이방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 때부터 언약 백성의 상징으로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이방인에게는 무할례당이라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한 불쌍한 인생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조상 적부터 하나님의 여러 가지 언약을 소망 삼고 살았는데 이방인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이방인에게도 임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말미암아 어느 민족이라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생각하면 우리도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허물과 죄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죄인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목자 없는 양같이 인생 길에서 방황하였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세상 자랑을 좇아 끝없는 욕망의 노예로 살았습니다. 세상 권세를 잡은 마귀의 올무에 걸려서 운명론(運命論)과 사주팔자(四柱八字)에 인생을 포기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마4:16) 하였는데, 그 예언의 말씀대로 어두움에 살던 우리에게 복음을 듣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나를 구원해 주시고, 여기까지 인도하신 은혜를 깊이 생각하면서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각양 은혜를 주실 것을 소망 중에 인내해야 합니다. 평탄한 길을 갈 때 감사하고 어려움이 있을 때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십자가 은혜로 죄로 막힌 담이 무너졌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엡2:14)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로막혔던 담을 헐어 버리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죄인들은 자신의 공력으로는 하나님 앞에 나갈 길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씻어 정케 하시고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가로막혔던 담도 무너졌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별이 없이 십자가로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된 것입니다. 모든 믿는 자들이 민족이나 신분이나 성별의 차이가 없어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방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곳에 들어가면 사형에 처한다는 경고문이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이방인들은 죄인들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실 때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둘로 찢어져 둘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마27:51). 이것은 대제사장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하였습니다. 누구든지 은혜를 사모하면서 전능하시고 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건물을 이어주는 모퉁이 돌이 되셨습니다.

빌레몬서에 보면 빌레몬이 그의 노예였던 오네시모를 믿음의 형제로 맞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유인이요, 재산이 많은 빌레몬이나 종 신세가 되었던 오네시모가 예수님 안에서 같은 하늘 나라 시민입니다. 예수를 믿는 저들은 세상 제도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주인이었던 빌레몬은 자기의 노예 오네시모에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오네시모는 세상 적으로 보면 종의 신분에서 자유를 얻은 자였지만 자원하여 복음을 위해 바울을 섬기는 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이나 빌레몬이나 오네시모나 변해 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고 그 지체가 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이런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선교사님과 동역 하면서 외국에 있는 믿음의 형제들을 섬깁니다. 장애자들의 영혼을 귀하게 여겨서 위로하고 돕습니다. 그래야 합니다. 남과 북의 성도들이 십자가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는 하나가 되기가 어려운 장애물이 많습니다. 그러나 믿음 안에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부부가 십자가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부모와 자녀가 십자가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교회 성도들이 십자가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들은 계속하여 지어쪄 가는 교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공사 중인 사람들입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온전하게 되어야 합니다. 이방인들이 유대인 보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부족한 점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집으로 지어져 가고 있음을 알고 이해하고 도와야 했습니다. 우리가 성도들을 볼 때에 완전하기를 기대하면 안됩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의 형상을 닮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 하심으로 공사가 진행 중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소망 중에 바라보고 기대하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담을 헐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가야 합니다. 예배와 기도와 찬양으로 아버지 앞에 나가야 합니다.
또 유대인과 이방인의 담을 헐어 주었습니다. 모든 믿는 자들은 지역이나 민족 또는 신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부족함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서로를 사랑해야 합니다. 같은 교회 성도이던지, 부부간이던지, 부모와 자녀간이든지, 친구간이거나 이웃간에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교회는 완전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닙니다. 변화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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