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자료

[환경주일 설교, 시104:24] 피조물의 신음소리 _ 유경재 목사

'코이네' 2022. 3. 31. 20:36

피조물의 신음소리

시 편 104:24-35,  로마서 8:18-25

설교 : 유경재 목사 

 

 

오늘은 총회가 환경 주일로 정한 날입니다. 유엔이 정한 2000년 환경의 날 주제는 "새천년 - 실천할 때"(Environment Millenium- Time to Act)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환경문제의 심각성은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환경보전은 한 마디로 불편함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환경도 지키면서 풍요롭고 편안하게 살수는 없을까 하고 궁리를 합니다. 그것은 마치 생명으로 인도하는 넓은 길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신 것처럼 넓은 길이면서 생명에 이르는 길은 없고, 오직 좁은 길로 나아가야만 생명에 이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편하다고 느끼는 생활은 대부분 환경을 파괴한 결과로 얻는 것이기에 조금 불편하여도 환경을 보전하고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와 그 생명의 흐름을 따르도록 함이 바른 생활입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지고 환경보전 운동을 적극적으로 실천해 가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

 

우리는 먼저 우리가 파괴해 온 자연에 대하여 새로운 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읽어 드린 시편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친히 모든 세계를 만드셨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주님, 주께서 손수 만드신 것이, 어찌 이리도 많습니까 ? 이 모든 것을 주께서 지혜로 만드셨으니, 땅에는 주님이 지으신 것으로 가득합니다. 24

 

이 시편은 하나님이 인간을 손수 만드신 것처럼 모든 생물도 친히 만드셨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은 인간과 자연이 어우러져 살도록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셨음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나 기타 모든 피조물이 다함께 지음 받은 존재임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결코 다른 피조물보다 우월하기 때문에 그것들이 인간에게 종속되고 인간이 그것을 마음대로 개발하고 파괴할 수 있다는 생각은 이 시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다 하나님이 지으시고 친히 다스리시기에 오직 그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만이 우리 인간이 할 중요한 임무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나는 주님을 노래할 것이다. 숨을 거두는 그 때까지 시를 읊어서, 하나님을 노래할 것이다. 35

 

이제까지 우리는 인간이 만물의 영장(靈長)이라고 하면서 만물을 인간의 지배 하에 두었습니다. 그래서 동물들을 먹이로 삼는데 그치지 않고 재미를 위해서 죽이고, 사치를 위하여 동물들의 가죽으로 치장을 하면서 아무런 죄의식을 갖지 않았습니다. 상아로 온갖 장식을 하기 위하여 수많은 코끼리들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삼림을 마구 벌채하여 지구의 많은 면적이 사막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공기와 물을 오염시키고, 쓰레기를 쏟아내어 자연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결국 이런 모든 인간의 문명에 따른 행위가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들을 인간과 동등한 권리를 가진 존재로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른 세계관

 

1854년 미합중국대통령 피어스에 의해 파견된 백인 대표자들이 지금의 워싱턴주에 해당하는 미국 서부지역에 거주하던 두아미쉬-수쿠아미쉬족에게 그들이 살던 땅을 팔면 그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보존 지구를 주겠다는 제안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인디안 추장인 시애틀이 그들에게 답변을 하였는데, 거기에 담긴 자연관은 성서적이며, 우리에게 놀라운 깨달음을 안겨 줍니다. 거기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그대들은 어떻게 저 하늘이나 땅의 온기를 사고 팔 수 있는가? 우리로서는 이상한 생각이다. 공기의 신선함과 반짝이는 물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그것들을 팔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에게는 이 땅의 모든 부분이 거룩하다. 빛나는 솔잎, 모래 기슭, 어두운 숲속 안개, 맑게 노래하는 온갖 벌레들, 이 모두가 우리의 기억과 경험 속에서는 신성한 것들이다. 나무 속에 흐르는 수액은 우리 홍인(紅人)의 기억을 실어 나른다. 백인은 죽어서 별들 사이를 거닐 적에 그들이 태어난 곳을 망각해 버리지만, 우리가 죽어서도 이 아름다운 땅을 결코 잊지 못하는 것은 이것이 바로 우리 홍인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땅의 한 부분이고 땅은 우리의 한 부분이다. 향기로운 꽃은 우리의 자매이다. 사슴, , 큰 독수리, 이들은 우리의 형제들이다. 바위산 꼭대기, 풀의 수액, 조랑말과 인간의 체온 모두가 한가족이다"

 

"모를 일이다. 우리의 방식은 그대들과는 다르다. 그대들의 도시의 모습은 홍인의 눈에 고통을 준다. 백인의 도시에는 조용한 곳이 없다. 봄 잎새 날리는 소리나 벌레들의 날개 부딪치는 소리를 들을 곳이 없다. 홍인은 미개하고 무지하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도시의 소음은 귀를 모욕하는 것만 같다. 쏙독새의 외로운 울음소리나 한밤중 못가에서 들리는 개구리 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면 삶에는 무엇이 남겠는가? 나는 홍인이라서 이해할 수가 없다. 인디언은 연못 위를 쏜살같이 달려가는 부드러운 바람소리와 한낮의 비에 씻긴 바람이 머금은 소나무 내음을 사랑한다. 만물이 숨결을 나누고 있으므로 공기는 홍인에게 소중한 것이다. 짐승들, 나무들, 그리고 인간은 같은 숨결을 나누고 산다. 백인은 자기가 숨쉬는 공기를 느끼지 못하는 듯하다. 여러 날 동안 죽어가고 있는 사람처럼 그는 악취에 무감각하다."

 

우리가 미개한 종족이라고 생각하였던 인디안들이 지금 보면 오히려 바른 생각, 건전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백인들이 이들을 총칼로 몰아냈지만, 백인들은 이들을 몰아내므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훼손하였고, 그 개발의 논리를 세계 속에 전파하므로 마침내 이 지구를 파멸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땅을 어머니로, 아름다운 꽃을 자매로, 사슴, , 큰 독수리를 형제들로 생각하며, 바위산 꼭대기, 풀의 수액, 조랑말 등 모두가 한가족이라는 생각을 가진 인디안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참된 백성이 아니겠습니까?

 

망가지는 금수강산

 

미국사람들의 이런 기계적 자연관이 이 땅에 들어오면서 금수강산이라고 자랑하던 우리 땅이 지금 무참하게 파괴되고 있습니다. 요즈음 조선일보에 연재되는 "망가지는 국토"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국토가 파괴되고 있다. 온 나라의 들과 산, , 바다가 개발이란 이름 아래 무참히 파헤쳐지고 짓밟히고 있다. 뭉텅 뭉텅 베어낸 산허리에 초고층 아파트와 전원주택단지가 들어서고, 숲을 걷어낸 계곡으로 카페와 러브호텔이 파고든다. 호젓했던 강변은 매캐한 냄새를 피우는 음식점과 요란한 간판을 단 각양각색의 업소들에 점령당한 지 오래다. 주위 경관과의 조화를 무시한 제멋대로의 난개발이 광풍처럼 번지면서 우리 국토는 마치 싸구려 파운데이션과 시뻘건 립스틱을 덕지덕지 바른 밤거리 여인처럼 천박한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다.

 

어느 곳을 둘러봐도 똑같다. 생태계의 보고인 개펄, 철새가 쉬어 가는 습지, 얼마 남지 않은 평야, 최후의 녹지 그린벨트. 들리는 것은 온통 포클레인과 덤프트럭의 굉음뿐이다. 전국적으로 지난 18년간 매년 15900의 농지와 7000의 산림이 사라졌고, 생물종은 500종씩 줄어들었다.

 

인간의 탐욕이 빚어내는 무서운 파괴입니다. 이런 파괴는 우리의 어머니를 죽이는 것이며, 창조주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추도예식 때 절하는 문제로 펄펄 뛰던 그리스도인들도 이런 하나님에 대한 모독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오늘의 교회가 이런 문제에 대하여 민감하지 못한 것은 신학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인간과 자연은 하나로 연결된 유기체임을 깨닫지 못한 채 현대 문명의 개발논리에 따라가는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 8장에서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해산의 고통을 함께 겪고 있다는 것을 안다"고 말한 사도 바울이 오늘 살아 있다면 피조물이 신음한다는 표현 대신에 피조물이 통곡한다고 하였을 것입니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셨는데 피조물의 통곡소리를 들으면서 그 소리는 바로 하나님의 신음소리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나서서 더 이상 환경이 파괴되지 않도록 운동하여야 하며, 환경보전을 위한 피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신음소리를 멈추게 하는 일이며, 그 뜻을 받드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과 연결된 나

 

<녹색평론> 최근호에 시인 이성선씨의 글 "생명우주율"라는 글이 실려 있었습니다. 거기에 보면 식물들이 음악을 들으면 잘 자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난화원을 경영하는 분의 이야기로 음악을 들려주면 성장이 현저히 촉진될 뿐 아니라 벌레들로부터 받는 손상의 90%를 막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다음은 농업과학기술원의 이완주 박사의 말입니다. "식물도 음악을 감상할 줄 알며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자란 식물은 더 잘 자라고 예뻐지며 수확량도 많아집니다. 병에 대한 저항력이 높아질 뿐 아니라 채소나 열매의 맛도 좋고 여러 가지 생리적 활동도 우수해집니다."

 

뿐만 아니라 식물이 노래를 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995년 일본의 15세 된 가제오 메르르라는 소녀가 식물에게서 들었다는 음악을 친구들에게 피아노로 옮겨 들려주었다는 것입니다. 이 소녀는 어려서부터 풀잎과 자주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들이 어깨를 툭 치며 다가와 건네는 목소리도 들었다고 합니다.

 

농촌 진흥청에서 다음과 같은 실험을 하였다고 합니다. 실험실에 놓은 작은 뽕나무 잎을 한 연구사가 플라스틱 막대기를 들고 내려칩니다. 비명을 지르며 벌벌 떨고 신경질 부리는 뽕나무의 모습이, 연결된 도표 위에 감정의 곡선을 요란하게 긋습니다. 뽕나무 잎 때리기를 그만둔 연구사가 실험실 밖으로 나가 실험실 창 앞을 왔다갔다 합니다. 연구사가 실험실 밖으로 나갔을 때 잠시 정상으로 돌아가던 나무의 반응이 그의 그림자가 창문에 비치는 순간 갑자기 플라스틱 막대로 얻어맞을 때와 거의 비슷한 상태로 되돌아옵니다. 뽕나무는 연구사가 밖으로 나간 것도 알고 있지만 놀랍게도 창문에 다시 비치는 그의 그림자를 보고 또 놀란 것입니다. 나무는 귀를 가졌을 뿐 아니라 눈도 가졌고 그 눈을 통해 자기에게 접근해 오는 자, 해를 끼치는 자, 기쁨을 주는 자까지 똑똑히 식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시인은 모든 피조물은 한 실에 꿰인 구슬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현대 물리학의 양자이론에는 물체의 가장 깊은 곳에 들어가면 최후의 지점에서 입자와 파동의 경계가 사라지는데 거기서 사물은 어떻게 보면 입자고 어떻게 보면 파동이라 합니다. 이곳은 개인이자 전체를 보는 자리로 우주 속 우리 개체를 정확히 바라볼 수 있는 지점이라 하겠습니다. 우리는 모르고 있지만 우리 저 안의 진짜 생명은 입자이면서 동시에 파동의 상태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지점이 개체 생명체가 우주와 연결되는 문이라고 봅니다."

 

우주와 연결된다는 말은 하나님과 연결된다는 뜻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와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함께 있고 서로 유기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다 같은 하나님의 자녀요, 다같이 하나님의 피조물로 서로를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관계 안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눈으로 만물을 바라보게 되면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기어다니는 미물까지도 나의 분신임을 깨닫게 되고 따라서 생명을 존중히 여기는 자리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환경보전 운동은 결코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바로 나의 생명을 살리는 일이며, 우주를 살리는 일이요, 더 나아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몸을 회복시키는 일임을 알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회복

 

하나님께서 그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은 바로 이렇게 망가져 가는 하나님의 세계를 구원하시기 위하여서입니다. 외아들을 보내시지 않으면 안될 만큼 세계의 구원은 중대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계의 파괴는 단순하게 그것만이 망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기에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통해서 인간의 죄를 대속하심으로 인간을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셨고, 동시에 만물과 화해하게 하셨습니다. 그들 사이에 막혔던 모든 담을 허시고 평화의 역사를 만드셨습니다. 떨어져 나갈뻔 한 인간과 자연을 다시 하나님 안에 이끌어 드리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다시 세우셨습니다. 따라서 환경보전 운동은 바로 하나님 나라 건설하는 운동이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만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 인간과 더불어 모든 피조물이 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온전하게 속량될 그 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환경운동은 단순하게 몇 가지 생활을 고쳐나가는 운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거대한 운동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완성하는 운동입니다.

 

이 운동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보잘 것 없다고 여겼던 미물까지도 사랑하고 그 생명을 존중히 여기는 운동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과거의 생각을 바꾸어서 이제는 땅은 우리의 어머니며, 들에 피는 꽃이나 풀 그리고 나무 모두가 우리의 자매이며, 새나 짐승들이 모두 우리의 형제임을 기억하고 한 가족이 된 자연의 삼라만상을 사랑하고 존중히 여기는 운동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만을 위하여 살던 데서 벗어나 이웃과 자연을 돌아보며 함께 살아가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곧 가난한 삶으로 돌아감이며, 인간의 편리함을 위해 마련된 많은 기계들을 버리고 불편함을 감수하는 일입니다. 곧 좁은 길로 나가는 것이며,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현대 문명이 가져다 주는 안락함에 취하여 거기에 안주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박차고 나와 하나님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야 하겠습니다. 시편의 시인처럼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를 둘러보며 거기에 깃들인 신비를 음미할 줄 아는 고요함과 여유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도시가 만들어내는 온갖 잡음과 소음 속에 파묻혀 자연이 들려주는 바람소리, 별들의 속삭임, 시냇물의 노래를 듣지 못하여 병들어 가고 있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서 내 깊은 곳에서 우주와 통하는 진동을 느낄 수 있도록 조용한 묵상의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환경보전 운동은 우리의 삶의 근본적인 변화를 요청하는 운동입니다. 우리의 거듭남을 요청하는 운동입니다. 우리가 이 부름에 응답하지 않고 그냥 문명의 편리함을 따라 살아갈 때 결국 우리는 이 지구의 파멸과 더불어 멸망에 이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부끄럽게 서서 책망과 채찍을 맞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제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 속에서 들려오는 생명의 소리를 들으며 그 나라를 세우는 일에 발벗고 나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