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마태복음

[마17:1] 신앙의 깊은 세계로 이끄는 변화산의 체험

'코이네' 2021. 11. 13. 17:48

신앙의 깊은 세계로

본문/17:1-8,9:2-8,:9:28-36

 

 

 

오늘 210, 2월의 둘째 주일은 주님의 변모일 일입니다. 금주 수요일 성회수요일 또는 참회의 수요일이라고 하는데 부활주일을 앞둔 46일간을 사순절이라고 합니다. 그중에 주일이 6번 있고 평일이 40일이 되기 때문에 흔히 사순절(Lent) 이라고 합니다. 이 사순절 기간을 새벽 그리스도의 수난을 생각하는 절기로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40일간의 사순절 새벽기도회를 가지며 나머지 한주간 325일부터 331일까지의 고난 주간에는 연속 기도의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사순절이 시작되기 전 주일을 주님의 산상 변모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오늘은 "신앙의 깊은 세계로"라는 제목으로 변화산의 사건을 말씀드리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읽어드린 말씀은 공관복음안에 모두 있는 본문으로 마 17:1-8, 9:2-8 그리고 오른 읽어드린 눅9:28-36입니다.

 

본문의 역사적인 배경을 알아야 말씀을 바로 해석하고 적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사랑하는 제자들을 인도하셔서 이방 땅 가이샤라 빌립보에 가셨습니다. 거기서 유명한 신앙고백인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하는 베드로의 고백을 듣게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이 각오에 대하여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각오없이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잠시는 가능하겠지만 몇일 못되어 실망하여 떠나게 될 것입니다.

 

변화산의 사건을 놓고서 생각해 볼 때 그 사건 하나만 놓고서 보면 안됩니다. 예수님이 깜짝 놀랄만한 일이나 하시려고 변화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시며, 이 세상에 무엇하려 오신 분이며,예수님을 따른다는 최후의 결과는 얼마나 영광스러우냐 하는 것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시기 위함입니다. 가이샤랴에서 있던 사건 즉 베드로의 신앙고백, 제자로서의 각오, 그리고 나서 이제 수난을 향하여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주님의 각오, 그리고 제자의 궁극적인 영광, 이것이 하나의 제인으로 연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산상변모사건은 가이사랴에서 있던 신앙고백의 일과 일주일 정도 간격으로 일어난 사건입니다. 6일후, 8일후하고 다소 엇갈리는 일자 제시로 좀 혼돈이 되지만 오히려 그런 것이 더욱 이 사건은 역사적인 사건이었으며 실재하였던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는 참으로 유익한 증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변화산이 과연 어느 산이냐?하는 것도 흥미있는 연구가 될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산과 깊은 연관을 가지는 종교입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십계명의 계시를 받앗으며 예언자 엘리야도 산에서 하나님을 체험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산상보훈이나 변화사건이나 주님의 여러 기도하신 것이나, 마지막 십자가에 죽기까지 산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변화산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는 갈릴리에 있는 540m의 다볼산이라고한다. 현대에 와서는 북방 가이샤랴 빌립보와 가까운 2,700m 의 헐몬산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마가복음에는 높은 산이라고만 하고 있으므로 두산이 제기되고 있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할 것입니다. 갈릴리의 다볼산이라고 하여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 헬레나가 주후 326년에 다볼산 꼭대기 정상에 예배당을 세운 것을 비롯하여 7세기까지 이곳 다볼산 정상에는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의 이름으로 바쳐진 세계의 성소가 건립되기도 하였습니다. 이 건물들은 모슬렘 교도의 살라딘에 의하여 파괴되었으며 19세기 말 희랍 정통교회에 의하여 예배당과 수도원이 세워졌고 정상에는 수리아 양식의 라틴 교회 서방 카톨릭교회당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렇게 다볼산에 변화산일 것이라고 하고 굳게 믿었지만 현대의 성서학자들은 다볼산보다 가이샤랴 빌립보에서 가깝고 훨씬 높고 꼭대기에는 만년설이 뒤덮힌 헐몬산이 변화산일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어느 산인지는 나중 주님앞에 가서 여쭤 보도록 하고 넘어가야 겠습니다.

 

그러면 이 산에 왜 올라 갔느냐?하는 점입니다. 마태, 마가복음에는그저 산에 올라 가신 것처럼 기록되고 있지만 누가복음에는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사"라고 했으며, "영광 중에 나타나사 장차 예수께서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하셨다고 누가복음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칼빈 주석을 보면 마태,마가 누가복음의 본문을 모두 차례차례 기록하여 놓고 같이 주석하면서 비교 연구함이 특징입니다. 공관복음 대조연구하는 책이나 종합 4보음서 연구 등의 신학 서적을 참고하여 보면 이해에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세 복음서를 대조, 종합하여 보면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셔서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변형되시는데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은 광채가 나는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희어졌다고 하였습니다. 본문 누가복음에는 당시 상황을 좀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변화되셔서 구약의 하나님의 사람, 모세와 엘리야, 율법과 선지자의 대표자들 말씀하시는데 장차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에 대하여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서 구약의 대표자들과 대화를 나누신 것이나 어떤 위로나 얻으려고 만나신 것은 아니요 이 사건은 주님을 위한 사건이 아니라 전적으로 제자들을 위한 사건이라고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변화산의 주된 목적은 예수님의 위안을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제자들을 위함입니다. 1주일전에 십자가의 예언을 듣고 실망하고 있었던 제자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하여서 심히 무거운 심정으로 낙심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영광스러운 존재이시며 구약의 대표자들이 주님의 죽으심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며, 나중 부활하신 모습을 미리 보여 주시려고 하신 전적인 제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계시록에 나타나는 영광스런 보좌에 게신 가장 영화로운 주님의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함인 것입니다. 또한 주님을 따르는 성도들의 영광스럽고 존귀한 변화의 모습을 보여 주어 용기를 갖게 하는 것입니다. 잠시 받는 환난은 극히 가벼운 것이지만 우리의 누릴 영광은 한없이 무거운 것으로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이 과연 누구시냐 하는 것을 잘 모르고 주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은 하였지만 이번에 하나님의 음성으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하시는 말씀을 똑똑히 듣게 된 것입니다.

 

이 변화산의 경험으로 변모되신 영광스러운 주님을 눈으로 뵙고, 하나님의 음성으로 "주님이 누구시냐"하는 말씀을 분명히 듣고 체험한, 신앙의 깊은 세계로 들어간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체험은 우리의 어떠한 어려운 역경에서도 승리로 이끌어 주는 위대한 원동력이며, 영원히 배신하지 않는 굳센 믿음을 주는 것입니다. 깊은 신앙의 체험 끝에 남은 것은 "예수 외에는 보이지 않더라"는 말씀처럼, 오래 신앙생활하고 깊은 신앙의 체험한 사람에게는 오직 예수뿐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지성적인 사고를 요구하지만 결코 이성의 종교가 아니며 대단한 사고력을 요구하지만 결코 철학이 아니요 어떠한 윤리관보다 더욱 바른 윤리 도덕을 가지고 있지만 도덕주의도 아닙니다. 교회는 노회, 총회, 세계교회 등 커다란 조직이나 사업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의 신앙은 영의 문제요, 구원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신령한 영이신 예수님의 영, 성령을 모신 사람이요 우리 몸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령의 성전이며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사람이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으면 구원이요, 그렇지 않으면 버려진 사람인 것입니다. 여기까지 말씀드렸어도 설교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모두 말씀드린 셈입니다.

 

예수님이 변화하신 목적은 제자들이 확신한 신앙을 위함이요, 마침내 깊은 세계, 말씀의 깊은 세계, 예수님만을 모시고 산 신앙을 주시려는 데 있습니다. 변화되시는 그 순간이 얼마나 황홀하였으면 너무 너무 좋아서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였겠습니까? 이런 말을 하고 있으면서도 무슨 말을 했는지 조차 모를 만큼 황홀경에 빠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일련의 일들이 지나고 있을 때 구름이 와서 저희들 덮는데 또 얼마나 두려운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하늘에서 음성이 들리지요 정신 나간 사람이 되고 있을 때 주님이 손을 대시면서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하시니 정신차리고 보니 예수님만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베드로 사도는 일생 잊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의 생애를 바꾸어 놓았으며 일생 변치 않고 훌륭히 사도의 길을 걸어가는 데는, 그때 변화산의 체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후서 1:6 하반적 이하 17절을 보면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지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깊은 신앙 체험은 위대한 믿음을 가져옵니다.

물론 기독교에서 개인의 신앙 체험이 모두 정당하고 성서에 맞고 객관성을 지니어서 누구나에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간증은 좋은 면도 있고 이질적이고 복음의 핵심에서 벗어날 소지도 없지않아 있습니다. 어쩌다 꿈을 꾸고 천국에 다녀왔느니 어디서 아브라함을 보았느니 모세를 보았느니 목사를 보았느니 하는 것은 대단한 문제를 야기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에는 기도의 응답이라는 분명한 약속이 있으며, 말씀의 세계는 구원의 축복이라는 약속이 있는 아주 깊은 세계입니다. 결코 무의미한 시간 낭비가 아닌 무궁무진한 신앙체험과 신비와 오묘한 진리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언제나 얕은 물가에서 놀다만 가겠습니까? 여기에 생명이 있고, 여기에 구원이 있고, 여기에 우리의 신앙에는 천국이 있기에 우리의 시간, 노력, 제물, 건강 모두 바치면서 우리의 인생 전부를 거는 승부수를 띄우는 것입니다.

 

옛날 욥기의 주인공 욥이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외쳤습니다. 요한은 요한일서 1:1에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자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고 하셨습니다. 사도들은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 전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1. 신앙의 깊은 세계는 기도의 세계입니다.

 

신앙의 깊은 세계에는 기도의 세계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기도의 세계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기도하러 갔을때 언제나 제자들은 졸았고 깊은기도를 못하였지만 예수님은 깊은 기도 속에 빠져 들어갔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에는 흐르는 땀방울이 마치 방울과 같았다고 하였습니다. 기도는 신앙인의 호흡입니다. 성도의 살아있는 증거입니다. 신앙의 원동력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기도의 본을 보여 주셨고 기도의 특권, 기도의 무기를 아주 잘 사용하신 가장 기도를 많이 하신 분이시며, 깊은 기도의 사랑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문제가 생길 때 자신의 힘이나 자신의 생각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은혜의 깊은 자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 구하면 들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7:7).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를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58:9).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내게 보이리라"(33:3).

 

온갖 헝클어진 문제를 풀 수 있는 만능 열쇠 마스터 키인 기도가 있는데 한번도 사용해 보려고 아니합니다. 기도의 특권이 주어졌는데 왜 사용하기를 원치아니 하십니까? 깊은 기도에 사로 잡히면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내고 그 뜻을 이루는 큰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10년을 염려할 일이 있습니까? 스펄젼 목사님의 말씀대로 10년을 염려하는 것보다 10분을 기도하는 것이 낫다고 하셨습니다. 56월의 신록의 푸르름처럼, 그렇게 활력이 넘치게 신앙생활하던 형제들이 왜 갑자기 생기를 잃어버리고 기쁨을 잃고 열심이 식어지는 것일까요? 조그만 환난 시험에도 맥을 못추는 나약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기도의 시간을 갖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꼭 어떤 시간이나 틀에 박힌 기도를 강요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안에서 무시로 기도하세요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시간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셔야 됩니다. 억지로 틀에 박힌 기도가 아니라 그야말로 여러분 자신의 인격을 하나님 앞에 쏟아 놓는 기도를 하여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기도가 너무 형식화되었으며, 마음에 없는 기도를 하고 있으며 적당히 때우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저 중언 부언하는 기도였으며, 경건의 모습을 다른 이에게 보여주는 정도에 멈추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기도는 우리의 신앙생활 자체입니다. 우리는 기도로 우리의 생명을 유지합니다.

 

은혜받았다고 하면서 기도 안하면 그 은혜는 엉터리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노라 하면서 기도생활 안하면 마귀의 조정을 받는 육신에 속한 사람이요, 교회를 봉사하면서 기도없는 봉사하면 교회를 어지럽히는 봉사가 되고 맙니다.

 

2. 신앙의 깊은 세계는 변모하는 세계입니다.

 

외형적인 변화와 내면적인 변화가 있습니다. 외부만 변하고 내면적인 변화가 선행되지 못하면 외식이요, 가식이요, 오히려 큰 문제라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용모가 변화되었는데 해같이 빛났습니다. 해같이 빛나는 용모는 재림하실 때의 모습이라고 할 것입니다 얼굴의 변화는 그 성품과 인격의 변화입니다. 얼굴은 감정의 표시판입니다. 마음에 원심이 가득한 자는 그 얼굴이 살기와 독기로 가득차게 됩니다. 평화스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의 얼굴은 부드러운 미소를 띄며, 누구에게나 부담을 주지 않고 다정하게 보입니다. 예수를 잘 믿는 것은 언제나 웃는 얼굴입니다. 4:6-7 가인의 얼굴을 보시던 하나님이 너의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라고 책망하시는 것을 보게됩니다.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주안에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시내산에 40일간 하나님과 대면하고 오는 모세의 얼굴은 해같이 빛났습니다. 세계가 문제입니까? 결국 사람이 문제입니다. 그의 인격이 성품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본받는 성숙한 인격으로 그리고 성품으로 화하여야 합니다. 구원의 감격을 가지고 웃으면서 해같이 빛나야겠습니다.

 

의복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의복 역시 마음을 드러내 주는 거울입니다. 교양 있는 사람의 옷차림은 마음의 질서와 순결 그리고 예절을 드러내고 주고 있습니다. 구두는 흙투성이요, 손톱은 길게 기르고, 손에 온통 시커먼 때가 있습니다. 머리는 산발하다시피 하였으면 그의 인격을 한눈에 알아보게 됩니다. '바보가 유행을 만들고 현명한 사람이 그에 따른다" 프랑스의 말입니다. 의복이 흰눈 같이 변하였습니다. 그 어떤 빨래라도 그렇게 희게 할 수 없도록 빛이나고 희었습니다. 순결이요, 승리를 상징합니다. 우리도 선한 가지를 들고 찬송하는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그 옷을 씻어 희게한 구원 받은 옷이니다. 흰옷을 입고 더러운 가면 금방 더러워지게 됩니다. 우리는 에수님의 죽으신 피공로로 우리의 예복은 희어졌으매 정신으로 변화되어지는 깊은 세계가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도, 우리의 지혜도, 우리의 의지도 모두 주님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데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깡패 김익두가 목사가 되고, 포행자요 행악자인 사울이 변화여 선교사가 되는 근본적인 변화의 깊은 세계가 우리의 신앙인 것입니다.

 

3. 신앙의 깊은 세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입니다.

 

예수님과 구약의 대표자인 모세, 엘리야로 말씀하시는 광경이 있으며, 말씀하신 내용은 예수님이 이제 예루살렘에서 대속의 죽음을 당해야 하는 것에 대하여 깊은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 율법과 선지자의 대표입니다. 구약의 하나님의 종들의 대표와 성경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이 만나신 것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모두 이상한 최후를 가졌던 사람입니다. 모세는 죽었으나 하나님이 그의 무덤을 공개하지 않으셨으며, 엘리야는 불말과 불병거로 데려가셨습니다. 모세는 나와 같은 선지자를 일으키신다고 예수 그리스도의 선지자 되심을 예언하였으며, 엘리야는 그리스도의 선구자로 예언되어진 분이십니다. 율법의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십자가의 죽으심은 구약의 전사건과 예언의 촛점이요,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이시요 다른 방법으로는 구원이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별세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여 보십니까? 주님의 죽으심이 여러분에게 실감이 나야 합니다. 다시 오신다는 주님을 설램과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의 죽으심은 곧 나의 죽음이요, 주님의 다시 오심은 우리 구원의 궁극적인 승리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에 뜻을 모른다면 아직 신앙의 낮은 상태요 어린아이요 얕은 물가의 사람입니다.

 

제자들에게 들려진 성부 하나님의 증언에도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요 나의 택한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성경 읽으시면서 구약에서 감동되어 눈물을 흘리신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창세기 40장에 와서 요셉이 형님들과 동생을 만나는 부분에 와서 진지하게 성경을 읽으신 분들은 감동이 눈물이 아니고서 그냥 지나가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구약 이사야서를 읽으면서 하나님은 우리를 싫어 버리지 아니하신다고 했을때 "감사합니다"라는 고백을 아니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묵상하고 애독하는 데는 깊은 세계가 있습니다. 영의 양식이 되어지며, 삶의 인도자가 되어주며, 삶을 승리로 이끌어 주는 검이 되는 것이 말씀의 깊은 세계입니다. 그 말씀 끝에는 예수님만이 남는 체험이어야합니다. 베드로는 천막 셋을 치고 하나는 주를 위하여 또 하나는 모세를 나머지는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고 했으나 결국 예수님만 남았고 예수님을 모시고 하산하여야 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구름속으로 사라져야 합니다.아무리 그분들이 훌륭하고 신앙이 좋아도 그들이 신앙의 대상으로 남아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오직 주님만이어야 하며, 구름도 걷혔습니다. 영광스럽고 신비한 체험도 잊혀질지라도 예수님만이 남으면 족한 것입니다. 교회도 교회안의 그 어떤 사람도 예수님보다 크게 보여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이 좋아서 예수 믿고, 주님 만나 변화된 이들은 불신에 빠질 수 없습니다. 산상의 종교, 산상 체험, 그것으로 우리 신앙의 종착역은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신하로 간질 병자가 기다리고 온갖 무능력으로 죽어가는 어두움의 세계에 찾아 나서는 능력있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내 믿음에 두며 그 말씀대로 생활하려 할 때 성숙한 변화받은 인격이 됩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척하지만 자기의 짐은 속사람이 가지고 있는 욕망, 이기심, 고집, 죄악의 독소로 인하여 사실 하나님의 말씀이 설자리를 잃고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주님의 말씀으로 무장되고 변화받는 무궁무진한 깊은 세계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것입니다. 주님의 변화하신 날을 생각하며 지키는 이날에 기도의 사람으로 성숙한 인격이 사람으로 주님의 말씀을 듣고 변화받는 성숙한 자리로 나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탐험가 난센이 북극을 찾아 헤매고 있던 어느날 그의 타고가던 배가 깊은 바다속에 잠겨 버린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의 깊이를 측량하려고 했지만 줄이 도무지 그 바닥에 닿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일기에 줄의 깊이를 밝히고 "이보다 더 깊다"고만 했습니다. 다음날 다시 줄을 더 늘여서 물속에 드리웠지만 결과는 마찬가지로 추가 땅에 닿지를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여러 날이 흘러가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의 일기에는 여전히 '이보다 더 깊다' 는 말만 계속 되었습다.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는 깊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깊이는 실로 측량하지 못합니다. 어떤 방법으로 측량한다고 하여도 여전히 "이보다 더 깊다"는 말만 계속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얕은 물가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과 만나는 기도와 말씀의 깊은 세계로, 예수님의 인격의 성숙한데까지 자라나는 기도와 말씀의 깊은 세계로 예수님의 인격의 성숙한데까지 자라나는 "이보다 더 깊다" 고 고백을 할 수 있어야합니다.에스겔이 성전 문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따라 1천척 또는 1천척 또 1천척 또다시 따라 가면서 1천척을 척량하였더니 처음 발목, 무릎,허리,헤엄할 물로 깊어지고 강을 이루었습니다. 날마다 해마다 더 깊은 신앙으로 체험적인 신앙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