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마태복음

[마14:13] 주의 손에 있을 때

'코이네' 2021. 7. 4. 01:16

주의 손에 있을 때

성 경: 마14:13-21

(청년부 수련회 김 성규 목사)

 

 

기독교는 가치 변화의 종교입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던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가치를 가지게 되는 것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히 성경은 어떤 사람이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진리와 또 그러한 예를 허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 마다 죄인들이 예수를 영접함으로 새 사람되는 사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간음을 일삼던 수가성 여인의 변화, 삭개오의 철저한 변화 등은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인간이 자신의 행위를 어떻게 고쳐 나가느냐에 관심을 가지지 아니하며, 인간이 어떻게 되어지느냐에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도덕적인 감화를 주기 위하여 오신 분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 그 자체를 변화시키기 위하여 오신 분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이적을 보게 됩니다. 사실이 이적은 우리의 이성의 판단에 의하면 납득할 수 없는 사건이므로 그 사실 여부에 대해서 많은 논란이 되어온 것이기도 합니다. 원래 이적이란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므로 이를 신앙으로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한 그것이 사실임을 긍정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내용 전부를 이성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 그 자체가 어리석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때는 그리스도의 생애의 절정과 같은 시기였습니다. 이 사건 이후부터 그의 생애는 수난의 생애였습니다. 이 사건 이후부터 그의 생애는 수난의 생애였습니다. 그는 이 때 열두 제자와 함께 갈릴리 호수 동편 비교적 사람의 통행이 없는 한적한 곳을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리들은 그를 잠시하도 쉴 수 있게 가만히 있지 아니했습니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인파가 그를 향하여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가 기록한대로 갈릴리 호수를 중심하여 204개나 되는 촌락이 다닥다닥 붙어있었고 거기에는 1만 5천명 이상이나 되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으니만큼 얼마 후에는 예수를 중심으로 둘러 앉은 사람의 수는 여자와 아이들을 제외하고도 5천명이나 되었습니다. 예수는 무리들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눈에 비친 저 지치고 지쳐 있는 무리, 병들고 쇠약해진 무리, 소망이 없고 꿈이 없는 무리는 그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일어나 허기진 무리의 심령에 복음을 선포하시기 시작했습니다. 어느덧 해가 지고 어두워지기 시작했지만 무리들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아니했습니다. "이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들을 보내어 마을로 들어가서 먹을 것을 사먹게 하소서" 생각다 못해서 나선 제자들이 재촉을 들은 예수는 제자들로서는 도저히 이행할 수 없는 명령을 했습니다. "무리를 마을로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결국 예수는 제자들의 관심에 조차 없는 어린아이의 점심 도시락을 받아들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신 후 모여온 모든 사람이 배불리 먹고 남게하는 이적을 행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어린아이가 바친 그 도시락에는 다섯 개의 보리떡과 강가에서 잡은 작은 물고기 두 마리 뿐이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실로 그 도시락은 시장한 어린아이의 배도 채울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아이가 자신의 도시락을 바칠 때 모여온 무리의 굶주린 배를 채울 수 있으리라는 추측은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것을 어린아이로부터 받아든 후에도 대수롭게 여기지 아니했을진대 무리는 이 일을 알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잘 것 없는 어린아이의 도시락일망정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 그것이 들려졌을 때 놀라운 이적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우리는 본분 속에서 "나는 모든 사물의 가치의 변화를 줄 수 있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을 바치도록 요구하시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는 제자들이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니이다."라고 말했을 때 "그것을 내게로 가져오라" 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제자 안드레가 말하기를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습니까" 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이 보잘 것 없는 도시락이라 할지라도 한 어린아이의 희생적인 정성이 그 속에 담겨 있음을 보았을 것이며 동시에 그는 그것을 내게로 가져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받으신 후 5천명을 먹이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 우리에게 우리가 소유하지 못한 탁월한 무엇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는 언제나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실 것입니다. "너희가 비록 보잘 것 없는 존재일지라도 그대로 오라. 너희가 부족하고 가진 것이 없을지라도 오라. 나는 너희를 통해서 천국의 사업을 이룰 것이다."

여러분! 주께서 우리를 부르심은 우리의 능력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아니했고, 우리의 신분의 높고 낮음에 있지 아니했으며, 우리의 지식의 많고 적음에 그 표준을 두지 아니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정성들여 그에게 바칠 때 우리의 가치를 변화시켜 그의 거룩한 구원의 역사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 속에 이렇게 외쳤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6-29)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셈하시는 가치관은 인간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는 인간적인 차원에서는 무가치한 것들만을 필요로 하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인간은 그가 부자이건 가난한 사람이건 강한 자이건 약한 자이건, 지혜있는 사람이거나 무식한 사람이거나, 높은 자나 낮고 천한 사람이거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죄인이고 가난한 자이며, 약한 자요 무식한 사람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조건에 관계 없이 누구든지 자신을 온전히 그리스도에게 드리기만 하면 그는 그 사람을 새로운 피조물되게 하는 것입니다. 죄인이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멸망의 자식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길 바닥에 굴러다니며 짓밟히고 있는 못 생기고 값없는 돌덩어리라 할지라도 그것이 석공의 손에 들려질 때 값지고 예쁜 조각품으로 변화되는 것처럼, 무가치하고 죄로 더럽혀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대로 예수의 제자들은 그다지 훌륭한 인물들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들이 세상을 놀라게 하고 세상을 뒤집어 놓고 역사를 바꾸어 놓은 인물들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자신의 생명도 시간도 모든 재산도 다 그리스도에게 바쳤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무엇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통해서 그의 백성을 부르시고 먹이시기 위해서입니다. 어떻게? 그것은 우리의 사역이 아니고 우리를 부르신 그리스도의 사역입니다. 그가 능히 우리를 통해서 그의 거룩한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 나의 능력이나 나의 가치때문에 주저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기뻐하셨섭니다. 그는 우리의 부족한 그대로일지라도 온전히 바치려 할 때 우리를 기뻐하실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본문 속에서 "나는 바치되 아낌 없이 바치는 정성을 원한다" 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자유주의자들은 본문의 이적을 할 수 있는 대로 문자적인 해석을 억제하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해석할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어린아이가 자기의 점심 도시락을 예수에게 바치는 것을 본 많은 사람들은 지금까가지 감추어 두고 있던 도시락을 모두 꺼내들고 먹었다는 해석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을 잘못 보는 해석입니다. 본문은 그러한 추측을 허락할 여유를 주지 않습니다. 물론 이 놀라운 수의 변화는 우리의 이성으로는 맞지 않는 변화입니다. 맞지 않을 뿐 아니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변화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입니다. 보리떡과 물고기가 놀라운 수로 불어난 과정과 그 방법은 제자들의 알 바가 아니었고, 그 어린아이의 알 바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다만 있는 것을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게 바치는 일로 족했습 니다. 그 다음의 일은 그리스도에게 관계된 일이요,그만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어린아이가 가진 전부였고, 동시에 그것은 제자들이 가진 전부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어린아이에게는 그것이 아까울 수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처지가 한 조가의 떡이 그 어느 때보다 더 절실히 요구되는 때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두를 예수에게 바쳤습니다. 그리스도는 그것을 들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습니다.

 

여러분!

여기에 하나님의 능력 있는 손을 움직이게 하는 비결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43절 이하를 자세히 보십시요 거기에 생동하는 초대 교회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들 초대 예루살렘교회 교인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다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들은 모든 소유를 팔아 주님께 바쳐 가난한 자들을 구제했습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보세요! 이들은 모든 소유를 바치고가 전 시간을 바쳤으며 그들의 모든 것을 다 바쳤씁니다. 그들의 마음 어느 한 구석도 하나님께 맡기지 않고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영역이 없었습니다. 이들이 자신을 모두 바친 후에 교회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사도행전 2장 마지막 절에 보면 "주께서 구원받은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 는 기록이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온전히 그에게 바치기만을 그는 기다리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라도 그리스도 앞에 완전한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우리의 생활도 완전해질 수는 없습니다. 바울이 로마서 12장 1절에서 우리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제물이라고 말했거니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주님의 제단에 올려놓기에는 너무나도 흠이 많은 제물들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가장 좋은 제물이 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최고의 제물도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남김 없이 그에게로 바칠 때 우리를 기뻐하실 것입니다.

 

스페인 태생으로 유럽과 아시아 그리고 아메리카 여러 곳에서 기독교 교육 기관을 세워 수많은 생명을 구원한 익나티우스 테로올라의 헌신적인 수기는 우리에게 깊은 감명을 주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여! 나에게 있는 자유와 기억력과 이해력과 의지와 그 밖의 모든 것은 다 당신이 나에게 주신 것입니다. 주여! 당신에게 그것을 다 돌리나이다. 모든 것은 다 당신의 것이오니 마음대로 쓰시옵소서. 나에게는 당신의 사랑과 당신의 은혜만 주시면 족하겠나이다."]

여러분!

우리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주님의 것인 줄 아는 태도로 우리 자신을 그에게 바칠 때 그는 우리를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를 통하여 놀라운 복음의 사역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세째로 우리는 본문 속에서 "나의 손에 있을 때는 보잘 것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나는 그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만족을 줄 수 있다" 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시장한 어린아이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혼자 먹었다고 해도 그는 그것으로 그의 허기진 배를 채울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것을 그리스도에게 바치고 나니 5천명을 먹이고도 12바구니에 가득차게 남았습니다.

 

여러분!

나의 헌신은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시며 그는 나 자신에게는 물론 다른 사람에게도 만족을 주는 일로 바꾸어 놓기도 하십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에게 온전히 드릴 때 우리 자신에게도 큰 기쁨과 만족을 허락하시며 나아가서는 나를 통하여 저 영혼의 기갈상태에 울부짖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게 하심으로 그들의 심령에도 기쁨과 만족을 주십니다. 일생을 그리스도와 이웃을 위해 살다가 간 슈바이쳐의 헌신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영과 육이 병들고 시들어 가는 저 버림받은 생명들에게 광명을 비추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시간 분명히 기억할 일은 하나님께서는 지금 나에게 가장 귀한 일, 가장 큰 일을 맡기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로 이 시간 우리 자신을 온전히 그에게 바쳐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는 작은 시간,작은 봉사의 기회가 곧 주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시는 시간이요 기회임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그 시간과 기회를 놓쳐버리지 말아야 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시간이 그리스도에게 바쳐진 시간이 되게 하십시다. 그리하여 그가 나를 통하여 나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그가 주는 기쁨과 만족을 주실 수 있도록 하십니다.

 

이 시간 우리는 벧세다 광야에서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이적을 통하여 그가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는 지금 우리 자신을 그에게 바칠 것을 요구하십니다. 물론 그는 이미 우리 자신의 부족함과 보잘 것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를 그의 목적에 합당한 가치 있는 사람으로 바꾸실 것입니다. 그는 지금 우리가 우리의 모든 것을 아낌 없이 바치기를 기다리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낌없이, 어느 한 부분도 남김 없이 그에게 바치기만 한다면 그는 우리를 통해서 많은 사람에게 기쁨과 만족을 주시는 도구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의 손에 있게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주여, 나는 극히 보잘 것 없고 약한 사람이오나 나의 전부는 당신의 것입니다." 라는 고백을 해야 하겠습니다. 그 때 그리스도는 나를 그의 필요한 사람으로 사용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