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자료

[송구영신]요3:1_ 거듭나야 한다

'코이네' 2020. 12. 29. 20:50

거듭나야 한다

3:1-15

 

거듭나야 한다는 말은 가끔 사회에서도 쓰여지고 있습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국가와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하지 않고 자신의 세력 쌓기나 당의 이익만을 위할때는 정치계가 거듭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교사들이 촌지나 거액과외를 할 때는 교사들이 거듭나야한다고 합니다.

사회에서 말하는 거듭남은 어느정도의 자기 기능을 회복하는 것을 거듭남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의 거듭남은 그런 말이 아닙니다.

거듭난다는 말은 다시 태어난다는 말입니다.

 

전에 고등부아이들을 가르칠 때 수련회에서 물어보니까 어떤 아이는 자기는 다른 환경에서 다시 태어났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어떤 여자아이는 남자로 태어났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실수나 유혹을 인생을 망친 사람들이라면 다시태어나고 싶은 생각이 들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부조리와 죄와 불법이 없고, 죽음이 없고, 영원한 생명이 있고 영원히 행복한 삶을 살려면 거듭나야 합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이 땅에서의 불합리와 죄와 유혹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사회에서 봉사 활동하다가 거듭하는 일을 경험하고, 조용히 집에서 자기 반성을 하다가 거듭나는 일이 있다면 굳이 신앙생활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이 세상을 만드시고 나를 창조하신 분에게로 돌아가서 그분으로부터 새롭게 지음 받는 것만이, 부조리와 죄와 불법과 죽음이 없는 영원한 생명과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문제로 고민하던 니고데모라고 하는 사람이 주님께 찾아왔습니다.

이 사람은 유대사회를 이끌어가는 70명으로 구성된 산헤드린 공의회 의원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똑똑한 것만큼 자신의 노력과 그들의 율법으로 이스라엘을 새로운 나라로 만들고 싶어했습니다.

 

그런데 중에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보고서 깨달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이 아니면 절대로 하실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2절에서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이 끝나자 마자,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니고데모가 본 것은 이스라엘의 번영과 주권회복 적인 차원에서 보았을 뿐이지 예수님께서 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죄인들과 헐벗은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시며 바리새인들의 죄를 지적하시고 책망하시는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지 못하는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거듭나야만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에 대해서 타종교와 특별이 다른 점을 보지 못합니다.

타종교보다 조금 더 선행을 많이 하고 조금 더 사회의 유익을 위해서 활동한다는 것 정도뿐이지 그 이상의 절대적인 부분을 보지 못합니다.

 

오직 교회만이, 오직 기독교만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를 용서해주시고 참 생명과 영원한 삶을 주신다는 사실을 알려면 거듭나야 합니다.

교회에 나오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하고 예배에 참석하는 정도라면 아직 거듭남이 무엇인지 모를 것입니다.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왜 헌금을 하는지, 십일조라는 거금을 바치는지, 내세울만한 좋은 일들을 해놓고서도 내세우지 않고 무명으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헌신하는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거듭나는게 무엇입니까?

세상이, 사회가 거듭나는게 무엇인지 모르듯이, 산헤드린 공의회 의원이라는 니고데모도 몰랐습니다.

 

니고데모가 "사람이 어떻게 다시 날 수 있습니까? 두번째 어머니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을때 예수님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이면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한번 태어난 것은 죄 때문에 결국 그 생명은 지옥으로 가게 되어있습니다.

아무리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선한 일을 많이하고, 많이 배우고 정직하게 살았어도, 모두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육신으로 태어난 인간은 아무리 선한 일을 많이 한다고 해서 영적인 모습으로 바뀌지 않기 때문입니다.

육신을 입은 인간이 천국에 가려면 영으로 다시 태어나는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거듭나야만 새로운 삶을 살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것으로 영적인 것은 이해할 수 없지만, 그래도 자연속에는 영적인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기초적인 원리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듭난 사람만이 갈 수 있는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려고 자연을 통해서도 거듭남의 원리를 알수 있게 하셨습니다.

 

<모든 생명체도 거듭남이 있다.>

 

씨앗이 땅에 떨어져 싹이 트고 자라려면 땅에 떨어진 씨앗이 죽어서 썩고 다시 태어나야만 꽃이 피고 생명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곤충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미에게서 알로 태어났다가 굼뱅이가 됩니다.

굼벵이가 뭔지 모르는 사람은 구데기를 생각하면 됩니다.

이 굼벵이는 굼벵이로 살다 죽고 끝나는게 아닙니다.

굼벵이가 살다 죽을때쯤 되면 죽지않고 번데기가 됩니다.

굼벵이가 번데기가 되는 것은 다시 태어나기 위한 방법입니다.

 

아이가 태어나려면 모태에서 10개월 있어야 나오는 것처럼, 굼벵이도 화려하게 나방으로 다시 태어나려면 고치상태로 몇 달이고 몇 년이고 있어야 됩니다.

유충이라고 말하는 고치상태로 있는 것은 거듭나기 위한 방법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거듭나게 되면 과거 굼벵이로서의 생활과 나방의 생활은 180도 달라집니다.

아름다운 나비도 되고 잠자리도 되고 매미도 되어 자기 세상인 듯 하늘을 훨훨 날수 있으려면 곤충도 거듭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평생 화장실이나 썩은 생선이나 뒤지는 굼뱅이로사는 것입니다.

화장실 뒤지는 굼벵이가 나비의 화려함을 알겠습니까?

 

날짐승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들도 알을 낳습니다.

그 알이 그대로 있으면 살긴 살았으나 죽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다가 밟게 되면 그대로 없어져 버립니다.

 

그러나 그 알이 어미 품에 일정한 기간 동안 있으면 생명이 기적이 나타납니다.

알속에 있던 액체가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실핏줄이 나타나고, 뼈가 생기고, 살이 붙고, 심장, , , , 사지백체가 생겨나서 병아리가 됩니다.

 

이렇게 다시 나야만 알이 새가 되어 생명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알이 거듭나는 방법은 한 가지 뿐입니다.

따뜻한 어미 품에 일정한 기간 동안 안겨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생명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한다고 해도 알을 당장 새로 만들지는 못합니다.

이것이야말로 기적입니다.

생명의 신비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6절에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인간이 비록 만물의 영장이긴 하지만, 사람이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그대로 있으면 짐승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한번 태어난 사람은 인간은 분류할 때 동물로 분류한다는 것입니다.

인간도 한번 태어나면 동물에 속합니다.

인간은 사회적동물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다 동물이라고 인간스스로가 그렇게 고백을 합니다.

인류학자도 인간을 동물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동물은 아니지만 동물과 다를바가 없습니다.

어쩌면 동물만도 못할 것입니다.

동물은 살다 죽으면 영혼도 없어서 흙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지만, 인간은 살은 썩어 흙이 되지만 영혼은 지옥으로 가기 때문에 짐승만도 못한 것입니다.

 

이 짐승이 인간이 되려면, 영원히 하나님과 같은 수준의 부류가 되려면 거듭나야 됩니다.

굼벵이가 나비가 되려면 거듭나야 되듯이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어린 시절의 생각을 버리고 성숙해지면 "철이 났다"고 합니다.

남자는 군대를 갔다와야 철든다고 하고, 여자는 시집을 가야 철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되어간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정신적인 변화가 있어야 바뀝니다.

그래서 우리는 배우고 단련합니다.

이런 많은 변화를 통해서 인간은 인간다와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거듭남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거듭남은 철들었다는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주님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원받는 것은, 캠프화이어 할 때 기름에 범벅이 되어 타오르는 장작더미에서, 불에 타고 있는 장작하나를 막 꺼내어 내놓는 것을 '거듭났다'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릅니다.

우리는 기름에 범벅이 된 채 무섭도록 타오르던 불구덩이 속에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에 있었고 그 누구도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에 빠져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우리들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로 하여금 우리를 구원케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거듭날 수 있겠습니까?

니고데모가 물은 이 물음을 통해서 우리는 거듭남의 비밀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주님을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자신이 예수님 앞에 나왔지만, 예수님 앞에 나온 것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교회나왔다고 다 천국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앞에 나왔던 눅18:18장의 돈 많은 젊은 관원은 돈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지 못했습니다.

주님을 만난다는 것은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어떻게 하셨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느낌으로서의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2000년전에 나를 구하시려고 불구덩이에 들어가신 예수님을 만나야 됩니다.

 

2000년 전에 두손과 양발과 옆구리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예수님을 만나야 거듭난 것입니다.

생각이나 이념으로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그런 만남으로 그 사람의 사고나 인격이 바뀔 수는 있지만 거듭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제 상상력에 의해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14-15절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라고 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생활을 끝내고 마지막 가나안을 향해서 들어가면서 험한 길과 배고픈 문제로 하나님을 또 원망했습니다.

그때 불뱀이 나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어 다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들어 올리고 그 장대에 매달린 놋뱀을 본 사람은 살게 했습니다.

 

이 놋뱀은 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미리 보여준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이 장대에 매달린 뱀을 보고 살수 있었듯이, 오늘 우리도 죄와 불와 사망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만나면 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거듭나게 하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15절에,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결론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잘 외우는 성경구절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의 결론인 3:16절 말씀 아닙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결론입니다.

 

그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3:20절에서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말씀하신대로 지금도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새천년이라고 하면서 들뜨고 흥분했던 한해는 우리에게 실망만을 안져주고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세상 것은 우리에게 남겨주는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돈도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권력도 절대 권력일 것같지만 한순간입니다.

지나간 2000년 한해를 보면 더욱 그렇다는 것을 느낌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것은 지나간 한해뿐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것은 다 그렇습니다.

니고데모가 그런 기대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실망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니고데모는 주님을 발견했습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사역과 표적들을 보고서 저분이 하늘에서 오신분임을 알았고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2000년도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마지막주 설교를 "새롭게 태어나자, 다시 태어나자, 주님을 만나자"라는 제목을 정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주님을 만나지 않을 채 종교적인 생활만을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지만, 저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종교생활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이 다른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시간 우리는 주님을 만난 사람이건 만나지 못한 사람이건 모두다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거듭나지 아니한 사람은 아무리 열심히 교회 다니고 종교적인 생활을 열심히 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너무도 선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좇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리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무서운 말씀입니다.

이들은 거듭나지 아니한 자들이며 주님을 만나지 못했던 자들입니다.

그저 교회에 다니며 자기의 행위를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했고, 때로는 종교적인 감동으로 일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손이 모르도록 겸손하게 하기보다는,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좇아냈다고 동네방네 나팔불고 다녔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종교적인 행위를 통해서 인생의 의미를 찾았을 뿐이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했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 중에서도 주님을 만나지 못한 채 종교적인 열심이나, 자기의 의만을 드러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시간 거듭날 수 있기를 주님께 간구 하시기를 바랍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되겠다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처음부터 개로 태어난 것은 개요, 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개가 개지 개가 사람일 수 있습니까?

이것은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무엇으로 바꿀 수 있겠습니까?

개가 선한 일을 많이 한다고 해서 사람이 됩니까?

개가 옷을 입고 사람처럼 아파트 안에서 침대 위에서 사람하고 같이 잔다고 해서 사람이 되나요?

육은 육이란 말씀은, 개는 개란 말씀입니다.

조금 전에 사람이 열심히 종교적인 생활을 하고 선을 행한다고 해도,

거듭나지 아니한 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에 대해서 이해가 잘 안갈 수도 있습니다.

 

거듭나는 게 뭔데 열심히 교회에 다녀도 천국에 못 갈까?

여러분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면서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좇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했어도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시겠습니까?

 

개는 개입니다.

개가 제아무리 주인의 이름으로 집을 지키고 도둑을 잡아도 개는 개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개가 사람되는 딱 하나의 방법은 거듭나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입니다.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역을 지나실 때 가나안의 한 여인이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소리를 지르는 데도, 주님은 들은 척도 아니하시고 그저 묵묵히 지나가십니다.

그러다가 하도 시끄럽게 간청을 하니까 제자들이 주님께 좀 어떻게 해보시라고 말씀을 드리자, 주님은 기껏 하신다는 말씀이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에게 던지는 것은 마땅한 것이 아니라고 하시며 그냥 걸어가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이 여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옳소이다 하지만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이 여인은 자신이 거듭나지 못한 자 이며 육에 속한 자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주님을 통하여 거듭나고자 했던 것입니다.

남들처럼 화려하게 제자가 된다거나 늘 주님 곁에서 주님을 섬기던 여인처럼 될 수도 있었는데, 단지 주님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만으로라도 거듭날 수 있다면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개가 사람 된는 것, 이것은 거듭나는 비밀이요, 엄청난 축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는 개요, 사람은 사람인 상태에서 내가 개인 너에게 사람되어야 한다는 이 말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주님께서 지금 그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설복교회 성도 여러분!

거듭나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 말을 흘려보내지 마시고, 오늘 이 시간을 통해서 거듭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거듭나는 것은 주님을 만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려면 먼저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청할 때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거듭난 경험을 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다 열심히 자신의 죄를 회개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자기의 죄를 회개할 때에 주님은 그의 마음의 문을 열고 들어오셔서,

자기의 오만으로 쌓여있던 것들을 녹이시고 참된 겸손과 사랑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회개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불신자가 주님을 믿기로 결심하고 교회에 나온 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건달이나 사기꾼이 나쁜 습관을 버리고 교회에 나온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또 하나는 불신자가 아니라, 이미 교회나오고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만남으로 잘못된 부분이 깨지고 변화되는 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길을 잃은 한 마리의 양이 우리 안으로 돌아오는 것만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있던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이 오만과 자존심으로 점철되어진 고집불통이 깨어져서,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께 돌아오는 것을 주님은 회개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이시간 우리가 기도해야 할 부분은 집을 나간 동생이 아니라 집안에 있는 형의 모습입니다.

형은 집에 있으면서 마음으로는 이기심과 질투로 가득찬 변화되지 않는 죄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주님뜻대로 살려고 하지 않고 교회 다니면서도 자기 이익과 자기 자랑만 일삼아온 사람입니다.

 

누가 이런 사람입니까?

이 사람은 다름 아닌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여러분들은 지난 일년동안 어떻게 신앙생활 하셨습니까?

교회 나오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까?

 

누가 새로 교회에 오든 말든, 전에 교회 나오다가 안나오던 사람이 얼마만에 새로 오든 말든, 나만 교회 나오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까?

집에 있던 형은 집을 나간 동생이 집으로 온 것에 대하여 반가와 하지도 않았습니다.

집에서 아버지를 도왔던 형은 집을 나갔던 동생을 보고도 동생이란 말 한마디하지 않았습니다.

관심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아버지가 돌아온 아들에게 금가락지를 끼워주고 잔치를 베풀어주는 것을 보고 싫어했습니다.

동생이 돌아옴으로 자기의 몫으로 남겨놓은 것마저 빼앗길까 걱정을 하였습니다.

참된 회개는 이러한 더러운 마음들이 하나님 앞에서 발각됨으로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과 같은 이 형의 마음을 혹 여러분은 갖고 있지 않습니까?

교회와 성도들에 대해 어느 정도의 관심을 갖고 있습니까?

여기 집에 있던 형처럼 자기 혼자 교회나오는 것으로 만족하지는 않습니까?

이런 모습이 부끄럽게 생각되어져야 합니다.

 

회개는 먼저 자기의 죄가 보여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자기 죄가 보이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있다고 볼 수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만났다고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의 죄가 보여야 합니다.

잘못된 것이 무엇인지 보여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의 죄는 무거운 것이 있고 가벼운 것이 있습니다.

한 사람을 죽인 것과 세 사람을 죽인 것과는 분명히 형량에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죄는 가볍게 타일러 보내기만 하는 죄도 있고, 어떤 죄 사형에 처하는 죄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다릅니다.

성경은 회개하지 아니하면 모두 망한다고 말합니다.

생사의 결정적인 열쇠는 회개의 여부에 달려있습니다.

회개는 사느냐 죽느냐의 분기점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일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출세보다 학교보다 우선 살아야 합니다.

회개하는 길이 사는 길입니다.

부활도 회개해야 되고, 거듭나는 것도 회개하야 됩니다.

거듭나는 것은 인간의 노력이나 힘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거듭나는 것은 하나님의 혈통을 계승하는 일이기 때문에 우격다짐이나 잔꾀 부려서 될 일이 아닙니다.

 

야곱이 팥죽 한그릇으로 장자권을 샀다고 했는데 본질은 그것이 아닙니다.

야곱이 아버지의 혈통을 이어받는 것은 팥죽 한 그릇이 아니라 축복에 있었습니다.

그가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권을 빼앗았다면 뭐하러 저주받을 짓을 무릅쓰고 장자의 축복을 받으러 아버지에게 갔겠습니까?

가문의 혈통을 이어받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아버지의 직접적인 축복에서 오는 것입니다.

 

부자관계는 오직 아버지의 혈통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낳으셔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나는 원리입니다.

 

거듭나는 것은 우격다짐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남들이 거듭났다고 인정한다고 해서 거듭난 것도 아닙니다.

회개입니다.

회개는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고 하나님의 혈통을 이어받는 길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회개해본 적이 있습니까?

정말 간절하게 하나님을 부르짖으며 찾아본적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주님께 드린다는 성급한 고백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것은 교만한 모습을 버리고 회개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몸만이 아니라 마음을 원하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오늘 설교를 통하여 회개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들을 억누르지 마시고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하늘로부터 회개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역사 한다면 억제하지 마시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이 시간 성령님께서 역사 해 주실 것입니다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만나고 그의 삶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18:18장의 돈많은 청년 관원은 예수님을 따라오라는 말씀에 근심하며 돌아갔지만 바리새인이면서 산헤드린 공의회 회원으로서 아주 높은 신분이었던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만난 이후 완전히 거듭난 삶을 살았습니다.

니고데모는 제자들까지도 핍박에 두려워 도망치는 현장에서 예수님의 장사를 위해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나설 수 있는 확신있는 믿음을 갖었던 것입니다.

 

설복교회 성도 여러분!

2000년도를 보내고 2001년을 맞기 전에 모두다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는 것은 연습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컴퓨터 기사가 되고, 비행기를 운전하는 조종사가 되고, 축구의 유능한 골게터가 되는 것들은 부단한 연습으로 가능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거듭나고 영원한 생명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연습이 먼저가 아니라 우선적으로 다시 태어나야 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모습 속에서 늘 확인하고 간구해야 하는 것은,

기도할때마다, 찬송할때마다, 예배드릴때마다 장대에 높이 달리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만나느냐입니다.

 

29:13절에서 주님은,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고 했습니다.

 

2001년은 주님과 함께 사는 해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000년을 보내는 마지막날 잘못된 것 모두다 회개하시고 새롭게 거듭난 모습으로 2001년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