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자료

구원파의 발생과 유병언의 사업확장 그리고 구원파의 교세는?

'코이네' 2014. 4. 24. 22:49

구원파는 어떤 종교? 구원파의 발생과 분파 현황




이번 세월호 침몰 사건은 이 배의 선사인 청해진 해운이며, 이 회사는 구원파의 교주였던 유병언씨 소유인 것이 드러나, 세간에는 구원파에 대한 관심이 폭주하고 있다. 우리나라 기독교 이단의 대표적인 한 집단인 구원파는 도대체 어떻게 생겨났으며, 지금 어떻게 활동하고 있을까? 오늘은 그 구원파의 정체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어보고자 한다.

아래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통합교단의 이단사이비 대책위원회 서기였던 이정환 목사님이 이단대책위원회에 보고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1. 구원파의 시작  

1961년 11월 네델란드 선교사 길기수(Case Glass)의 영향으로 ‘죄사함을 깨달았다’는 대구칠성장로교회 목사 권신찬과 1962년 4월 미국인 독립 선교사 딕 욕(Dick York)의 영향을 받은 당시 대구문화장로교회 교인이었던 유병언에 의해 대구에서 시작되었다(권씨와 유씨는 그 후 장인과 사위의 관계가 되었다). 이로 보건대 구원파는 우리나라에서 자생한 이단이 아니라 외국에서 수입된 이단이라 할 수 있다. 

2. 극동방송과 구원파

이 두사람은 공통적으로 ‘복음과 죄사함을 깨달음으로 구원을 확신’하고 1963년 선교사들과의 관계를 끊고 독자적인 선교활동을 하다가 1966년 2월 현 극동방송의 전신인 국제복음주의 방송에 방송선교 담당목사로 부임하였다. 방송선교활동을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설파하던 중 1969년부터 1982년까지 ‘평신도 복음선교회’라는 명칭으로 청취자들을 규합 활동하였다. 
 
1974년 2월 정통교회인 한국기독교장로회를 비롯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 기독교대한성결교회, 기독교대한감리회, 하나님의성회, 구세군, 복음교회가 공동으로 ‘권신찬 목사의 잘못된 설교가 시정되지 않을 경우 극동방송 청취 거부운동을 전개하겠다’는 질의서를 극동방송에 전달하였다. 당시 극동방송을 운영하던 TEAM 선교부는 숙의 끝에 극동방송 탈취음모를 꾸미던 구원파 직원11명을 1974년 7월 30일자로 해고하고 권신찬 목사를 해임하였다.

 
3. 기독교복음침례회의 창립과 유병언의 사업


모임의 구심점을 상실한 이들은 1981년 ‘기독교복음침례회’를 창립하여 교파를 형성하고 본격적인 포교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60년대 초 유병언과 함께 딕 욕의 성경학교 동문인 박옥수목사는 “죄사함 거듭남의 비밀”을 설교하며 일찍 독자노선을 선포하고 1982년부터 ‘대한예수교침례회’라는 간판을 걸고 활동하기 시작했다.


한편 유병언은 교인들의 헌금으로 삼우 트레이딩이라는 자수회사를 인수하여 사업을 경영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반대하여 1978년에는 이창범목사(인천지부 책임자)가 500명의 교인들을 이끌고 집단이탈 하였으며, 1983년에는 이복칠(이요한)목사가 역시 유병언의 사업을 비판하다가 집단폭행을 당하고 전국적으로 5천명의 교인을 이끌고 이탈하였다.
 
 
유병언은 교인들의 헌금으로 주식회사 삼우 트레이딩, 주식회사 세모, 세모 스쿠알렌, 세모관광등의 회사를 운영하다가 1991년 50명의 고소인에 의해 사기죄로 구속되어 1992년 1.30. 8년형을 선고 받았다(송재화 여인을 통해 사업자금을 모으기 위해 사채모집의 사기를 행한 것이 인정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또 한국사회를 경악시키고 이단집단의 폐해를 극단적으로 보여준, 그러나 아직까지 미해결 사건으로 남아있는 박순자 여인과 오대양 집단변사사건(1987년)도 구원파와 연관이 있다는 주장이 널리 퍼져있었으나 물증을 확보하지 못함으로 당시 구원파에 몸담고 있던 신자 6명이 위장자수하는 선에서 수사는 종결되었다.

 
4. 구원파의 분파와 교세  

현재 구원파는 권신찬 유병언에 의해 설립된 ‘기독교복음침례회’와 여기서 이탈한 이복칠(이요한)의 ‘대한예수교침례회’, 그리고 박옥수의 ‘대한예수교 침례회’등 세갈래로 나뉘어 활동하고 있으나 신학적 뿌리가 같으므로 가르치는 내용이 동일하다. 

구원파는 1974년 극동방송 탈취음모를 저질렀다가 사전에 발각되었으며 1983년 신도들의 헌금으로 사업하는 것을 반대하던 구원파 신도 폭행사건으로 5명이 구속되었으며 1987년 오대양 변사사건(32명 살해당함)의 유력한 혐의자로 지목 받았으며 이 사건으로 구원파신도 6명이 구속되었으며(위장자수) 구원파의 기름부음 받은 종 유병언은 사기혐의로 1991년 구속되어 8년형을 선고 받기도 하였다. 

한편 권신찬은 1964년 대한예수장로회(통합) 경북노회에서 목사직 면직과 출교처분을 받았으며 1984년 예장 총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를 받았으며, 그 후 기독교복음침례교회(구원파)는 대한민국의 모든 기독교 교단에서 이단으로 정죄 되었다.
 
현재도 구원파중 유병언이 이끄는 복음침레교회는 지금까지 지속해 온 포교활동과 사업을 계속하고 있으나 지금은 그 세력이 많이 약화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반면에 박옥수계열은 그 세력을 더욱 확장하여 대형집회 및 방송매체를 활용한 포교활동과 함께 학원선교 및 직장선교에 주력함으로 그 세력이 크게 신장되고 있다.

 
구원파의 교세는 국내에 약180여개 지역교회와 미국, 캐나다, 독일등 주요도시지역 교회와 남미의 브라질 등 50여개의 해외교회를 두고있으며 방송매체를 이용한 포교활동에도 적극적이다. 또 현재 중국에 비밀리에 사업을 한다는 명목으로 선교사를 파송하여 포교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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