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데살로니가

[살전3:6] 주님의 자존심 / 이근호 목사

'코이네' 2019. 11. 8. 21:48

주님의 자존심

본문: 살전3:6-10

설교 : 이근호 목사

 

 

디모데가 전한 기쁜 소식

 

신약성경은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그래서 자칭 교회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편지를 잘 받아야 합니다. 편지의 내용대로 믿고 또 살아야 합니다. 한국 교회와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는 성경과 일치점이 있어야 합니다. 일치해야 그것을 교회라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라고 간판만 붙여 놓고 엉뚱한 길로 나간다면 그것은 교회라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데살로니가에 보내는 편지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고 있는 교회의 모습이 어떤 것일까? 그리고 현재 우리 자신들의 교회와 주변의 교회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는 교회들인가를 검토하고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성경 내용은 어떤 내용입니까? 하나님의 사자 사도 바울이 자기와 함께 일하고 있는 젊은 일꾼을 데살로니가 교회에 파송했습니다. 그가 가서 기쁜 소식을 전해 왔습니다. 기쁜 소식을 전해 왔다는 것이 교회가 재벌이 많아졌다든지 교회 부동산 값이 올랐다든지 하는 게 아닙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기쁜 소식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늘 나라는 권력이나 돈이나 사람 숫자로 가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수십 억이 밀어붙여도 끄떡하지 않습니다. 천국은 들여보낼 자만 들여보내 주십니다. 자격도 없는 사람 수십 억이 밀어붙이니까 너희들을 내가 못 당하겠다 하시면서 들여 보내주는 곳이 아닙니다.

 

주님의 자존심을 생각합시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교회를 말할 때 얼마나 많이 모이느냐? 얼마나 많이 득실거리느냐를 먼저 생각하지 말고 슬금슬금 들어와 천국가려는 사람은 사전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는 곳이 교회여야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구원받으려고 하는 이런 얌체 같은 사람을 철저하게 가려내서 아닌 사람은 쫓아내는 곳이 제대로 된 교회입니다. 사람이 많이 모이면 신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나는 게 문제가 아니고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편지라는 내용과 일치하지 않으면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자기 가족과 자기 민족을 사랑해서 교회에 오는 사람은 교회를 떠나도록 떠밀어야 합니다.

그래도 자존심이 있을 텐데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자존심 하나를 위해서 교회에 오는 사람 같으면 그것은 우리가 무시하지 않아도 주님이 무시합니다. 주님이 무시하는 사람 같으면 우리도 마음껏 무시합시다. 주님은 자존심을 내세우는 사람을 무시합니다.

제가 무시하라는 말은 사람 대우하지 말자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믿음도 없는데 왠지 오늘날 교인들이 세상 권력에 기초해서 그를 두려워하고 존경하고 부러워하는 세상 풍조 때문에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 앞에 그가 권력과 돈을 가졌다는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그 앞에서 두려워 떠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권력 있는 사람 앞에서 두려워 떨었습니까?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을 보면 그 특징이 예수님에게는 무서운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나와 있는 사도들의 특징은 세상 천지에 무서울 게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걸 두 자로 자유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 교회는 왜 그렇게 무서운 사람이 많은지요. 이런 걸 보면 교회 아닌 게 분명합니다. 세상에 교인들이 목사를 무서워하고 노회장과 총회장을 무서워합니다. 이 말은 좋게 말하면 권위를 인정한다는 말이 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주님을 전혀 믿지 않고 있다는 말입니다. 주님을 믿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덜렁거리는 사람이 어떻게 무서울 수 있으며 사람의 눈치를 볼 수 있습니까? 이건 분명히 제가 볼 때는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화장을 지우는 곳입니다.

 

제가 한국 교회를 비판하니까 어떤 목사님이 옆에서 저에게 하는 말이 자네는 뭘 믿고 그렇게 까부나!” 말씀합니다. 그분은 사실은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입니다. 그분은 목사로서 예수 믿는다고 말은 하면서 예수 믿는 게 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결국 교인들이 목사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전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의 믿음 없는 것을 감추기 위해 목사 앞에서 알랑방구를 뀌는 것으로밖에는 달리 해석이 안됩니다.

이것은 보통 한심한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자존심을 깨야 합니다. 일반 교인들이 한국 교회와 목사를 비판하면서도 손톱만큼도 믿음이 없는 이유가 주님을 믿고 섬기기 위해서가 아니고 지옥이 있다고 하니까 장차 그곳에 가기 싫어서 그런 것입니다. 지옥가기 싫어서 보험하나 드는 심정으로 교회에 다녀주는 것입니다.

전혀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여전히 자신만을 살리고 사랑하기 위해서 교회에 나왔기 때문에 그렇게 교회 안에서 두려워 할 사람도 많고 눈치볼 사람도 많은 것입니다. 이게 무슨 자유며 이게 무슨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까? 교회는 믿음 없는 사람은 절대 넣어주지 않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한 가지를 더 알려 드리겠습니다. 여자분들이 예쁘게 보이기 위하여 화장을 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그 화장을 지우는 것입니다. 화장은 자기를 위장하는 것입니다. 더 젊어 보이기 위해서 껍데기를 걸치는 것입니다. 일종의 가면입니다. 신앙은 자신을 가리고 있는 가면을 깎고 대패로 밀어버리는 것입니다. 자기의 본모습을 그대로 주님 앞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화장은 하는 것보다 지우는 게 더 중요합니다.”

 

거룩한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습니다. 홍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갈라졌습니다. 세상이 창조될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천국가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일방적인 하나님의 능력이 와야 합니다. 일방적인 하나님의 능력인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돼지한테 진주를 던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꼭 믿을 사람에게만 주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돼지는 줘도 귀한 줄을 모릅니다. 자기의 야욕과 탐심과 야망을 위해서 그 말씀을 등쳐먹더라는 말입니다. 그런 인간에게는 말씀을 줄 가치도 없고 그냥 떠밀어 버려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교회에 한 다리 걸쳐서 천당가려고 하는 사람은 못 오게 막아야 합니다. 나가라고 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능력의 말씀인데 그 말씀에 누수를 일으킬 수 있습니까? 이 가뭄 때에 어떻게 은혜의 강물을 엉뚱한 데로 흘러가게 할 수 있습니까? 그 물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볼 때 그 물이 얼마나 아까운 물입니까? 마찬가지로 주님 말씀은 하늘 나라의 생수인데 그 생수를 천당가기 위한 사람이 아닌 이 땅에서 자기가 자존심을 지키고 영웅이 되기 위하여 그것을 이용한다면 그런 인간들은 말씀을 받을 가치가 없습니다.

 

교회는 천국가는 동행자들의 모임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디모데가 관찰하고 돌아와서 다른 소리 안했습니다. 믿음있더라. 믿음 이야기했습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그들에게는 믿음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바울은 좋아서 어쩔 줄 모르면서 축복의 말을 전했습니다.

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전3:13)

중요한 것은 교회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나를 능히 구원하실 수 있는 능력있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게 믿는다는 뜻입니다.

교회를 건물이나 장소라고 한정해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본질적으로는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천국가는 길에 동행자입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손잡고 나란히 가는 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목사 있고 장로 있고 집사가 있는 건물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이런 것만 연구하니까 교회가 엉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건물이 주가 아니라 사람이 주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천국가는 사람이 주입니다. 그러나 또 그 사람만 있다고 되는 게 아니고 같이 나란히 천국가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천국가는 길이 얼마나 외롭습니까? 사람이 서로 만나도 마지막 그들의 관심사가 하나가 될 때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친구가 열 명이 되고 백 명이 돼도 마지막 관심사가 서로 틀리면 언젠가는 헤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두 사람이 있었는데 서로 술을 좋아하고 잘 마셔서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하나가 교회에 나가 되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알고부터는 관심이 술이 아니라 하늘 나라에 쏠리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이 둘은 대화가 안 통하고 관계가 멀어지는 것입니다. 술친구일 때는 새벽까지 마셔 대도 대화가 끊이지 않았었는데 한 친구가 천국에 대하여 관심을 두고 살아가니까 둘 사이에 틈이 생기기 시작해서 결국은 헤어지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사람이 교회에 와서 관심사가 머리 헤어스타일, 옷 등에 쏠렸었는데 그중에 한 사람이 은혜를 받고 성경보는 것과 기도하는 것에 관심이 집중될 때 옆자리에 앉아 있어도 대화가 안 되는 것입니다. 동행자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어떻게든 사람을 끌어모아 직분주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세운 건물이 아닙니다. 천국을 향해 함께가는 동행자가 누구냐? 그 사람들만 교회고 나머지는 교회가 아닙니다. 그는 신자가 아닙니다. 디모데가 데살로니가 교회에 와서 관찰하고 관찰한 것이 진짜 하늘 나라에 가고자 하는 마음이 그들에게는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 대한 믿음의 보고를 듣고 바울이 그 모습을 주님이 보시고 얼마나 기뻐하실까? 주님 강림하실 때 그들이 함께 천국에 올라가겠구나 하는 것입니다.

 

혹시 천국갈 사람 없습니까?

 

누가복음 10장에 이웃이 누구냐 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웃은 동행자입니다. 내가 구원받은 자가 되는 것처럼 상대방도 구원받은 자가 될 때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모든 소유를 빼앗기고 맞아서 거반 죽게 되었습니다. 그 옆을 제사장이 그냥 지나가고 레위인들도 그냥 지나갔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제사장, 레위인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조직과 제도를 항상 중시했습니다. 그러나 조직과 제도가 사람을 구원하는 게 아니고 먼저 구원받은 사람의 사랑으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사마리아인이 그 옆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이 보면 꼭 지옥갈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가 그 강도만난 사람을 보고 주막으로 데려다가 치료하고 주인에게 잘 보살펴 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이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입니다. 이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라는 것은 그가 사랑을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이같이 사랑하라. 이 말씀이 그 뜻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무엇입니까? 바울과 디모데처럼 강도만난 사람을 찾아다니는 사람을 말합니다. 혹시 천당갈 사람이 있을까 싶어서 찾는 것입니다. 거기에 관심을 두고 찾을 때 비로소 거기서 자기의 동행자가 발견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부터 전도합시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여러분, 전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어디에 가서 전도합니까? 박사 교회 내부에서 하시기 바랍니다. 동네 사람들을 전도하려고 하지 마시고 옆에 있는 사람부터 전도를 하는데 생각을 하나로 모으시기 바랍니다. 다같이 천당가는 동행자가 되자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는 손톱만큼도 관심사가 없고 하늘 나라에만 관심을 갖는 자들의 모임으로 뭉치자는 말입니다. 오직 하늘 나라만을 목적하는 사람들이 되자는 것입니다.

그래야 교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놀러 다니는 인간의 모임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음을 하나로 모읍시다. 물론 그것이 하루아침에 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이것저것 다 실패하고 난 뒤에는 각자가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늘 나라에 대한 마지막 애착과 희망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박사 교회 성도들은 세상 천지에 무서울 것이 없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목사 눈치보지 않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신 말씀을 따라 참된 신앙생활을 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