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에베소

[엡2:11] 예수_우리의 화평 / 김명혁목사

'코이네' 2018. 8. 20. 22:51

예수_ 우리의 화평

2:11-19

설교 : 김명혁목사 (강변교회)

 

 

오늘 아침 "십자가와 나"라는 주제로 세 번째 설교를 합니다. 여러분들은 "십자가와 나"라는 말을 들을 때 무슨 느낌과 무슨 감동을 받습니까? 황관창씨는 "십자가와 나"라는 설교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 마음에 깊은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이주희씨는 십자가 설교를 들을 때마다 은혜에 흠뻑 빠져 눈물을 흘린다고 고백했습니다. 끌레르보의 버나드는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오 거룩하신 주님 그 상하신 머리"라고 울면서 십자가 찬송시를 썼습니다. 진젠돌프 백작은 십자가 성화 아래 무릎을 꿇고 한 없이 울고 또 울었습니다. "십자가와 나" 십자가와 나는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오늘 아침 세 번째 설교를 합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화평입니다.

 

1. 인류: 불화와 원수 됨

 

인류의 역사는 불화와 원수 됨의 역사입니다. 아담이 범죄 한 후부터 세상에는 화평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과 멀어졌고 부부와 멀어졌고 형제와 멀어졌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과도 멀어졌습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고 사람들과 원수가 되었고 자기 자신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결국 아담은 에덴에서 쫓겨났고 가인은 정신이 나가서 동생 아벨을 쳐서 죽였습니다. 이것이 인류 역사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을 떠나고 사람들을 미워하고 죽이는 것, 이것이 인류의 역사가 되었습니다. 유대인도 하나님을 떠났고 사마리아인도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은 서로 미워하고 서로 저주했습니다. 바벨론도 앗수르도 애굽도 유대도 모두 하나님을 떠났고 그리고 서로 미워하고 서로 저주하고 서로 죽였습니다. 이것이 인류의 역사입니다. 화목과 화평대신 떠남과 불화와 원수 됨이 인류의 역사가 되었습니다. 로마시대가 되었을 때는 로마도 이스라엘도 모두 하나님을 떠났고 그리고 서로 미워하고 서로 저주했습니다. 이 떠남과 불화와 저주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남쪽도 북쪽도 모두 하나님을 떠났고 그리고 서로 미워하고 서로 저주하고 있습니다.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자기들의 미움과 원수 됨을 정당화하려는 거짓된 장식품에 불과합니다. 민족과 국가간의 불화와 갈등뿐 아니라 부부간의 불화와 갈등 부모와 자식간의 불화와 갈등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불화와 갈등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가정불화와 정신분열과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불행한 인류의 역사입니다.

 

2. 십자가: 화목과 화평의 다리

 

하나님의 마음에는 서로 원수 된 인간들을 어떻게 하면 화목 시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항상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원수 된 인간들을 하나님 자신과 화목 시키고 어떻게 하면 인간들과 서로 화목 시킬 수 있을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깊은 관심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갈라져서 원수 된 인간들이 모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라 오라" 라고 애타게 부르시기도 했습니다. "이 둘이 하나가 되리라" 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죄 사함과 병 고침을 받으라고 초청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화목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화평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마음의 평안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마지막 방법이 십자가로 화평의 다리를 놓는 것이었습니다. 77석 날 까치들이 오작교를 놓아서 견우와 직녀가 만나게 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다리를 놓아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게 했고 사람들이 사람들끼리 서로 만나게 했다는 말입니다. 10:20에 보면 예수님께서 인간들이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길을 마련했는데 그 길은 자기의 육체로 만든 십자가의 길 이라고 했습니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며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사실 아담 이후 아무도, 대제사장 이외에는 아무도,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모세까지도 하나님 앞으로 가까이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십자가의 다리를 밟고서 누구라도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과 화목을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서로 만나서 화목을 이룰 수가 없었는데 이제는 십자가의 다리를 밟고서 서로 만날 수 있게 되었고 서로 화목을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만남의 장소에서 자기 자신과도 만나서 화평을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말씀의 요점입니다.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인간들이 십자가의 피로 하나님과 화목 되었다는 말입니다. "둘로 하나를 만드사." 서로 원수 되었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십자가의 피로 서로 화목 되었다는 말입니다.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개인개인이 십자가의 만남의 장소에서 심령의 평안을 누리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결국 십자가는 우리의 화평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평과 인간들과의 화평과 자기 자신과 화평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십자가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십자가의 수직의 나무는 하나님과 인간을 화목시키는 화평의 나무가 되었고 십자가의 수평의 나무는 인간과 인간을 화목시키는 화평의 나무가 되었고 십자가의 중심은 나를 나 자신과 화목시키는 화평의 중심나무가 되었습니다.

 

십자가가 있는 곳에는 인종의 차별이나 갈등이 모두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에는 유대인도 헬라인도 로마인도 그리고 흑인까지도 함께 있게 되었습니다. 노예도 귀족도 가난한자도 부자도 모두 함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과히 혁명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을 이렇게 외쳤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3:28). 십자가 아래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 강변교회에는 경상도 사람들도 있고 전라도 사람들도 있고 충청도 사람들도 있고 북한 사람들도 있고 강원도 사람들도 있고 경기도와 서울 사람들도 있습니다. 중류층도 있고 하류층도 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가 있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십자가가 있는 곳에는 화목과 화평이 이루어 집니다.

 

3. 십자가: 버림 받음과 저주의 장소

 

어떻게 십자가가 화목과 화평의 다리가 될 수 있었습니까? 사실 십자가는 본래 화목의 상징이기 보다는 원수 됨의 상징이었고 화평의 상징이기 보다는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십자가는 멸시와 끊어짐과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신구약 성경에서도 십자가는 본래는 끊어짐과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 이니라"(21:23).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22:1). 십자가는 버림 받음의 상징이었습니다.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십자가는 멀리함의 상징이었습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22:6). 십자가는 멸시와 조소의 상징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27:47). 십자가는 버림받음과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위에서 하나님과 인간으로부터 멸시와 조소와 끊어짐과 버림 받음과 저주를 받으므로 우리들이 그분 대신 화목과 화평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며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3:13). 십자가의 끊어짐이 우리의 연결이 되었고 십자가의 저주가 우리의 화평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교환의 신비요 놀라운 교환의 은혜입니다. 누군가가 대신 버림을 받으므로 내가 찾은 바가 되었고 누군가가 대신 저주를 받으므로 내가 화목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아침 교회로 오는 길에 방송 뉴스를 들으니까 40대의 아버지가 불이 난 집에서 6살 난 딸을 살리기 위해 딸을 안고 아파트 위에서 30미터 아래로 뛰어 내려 자기는 죽고 딸은 살렸다고 합니다. 이것이 교환의 은혜입니다. 자기가 죽고 다른 사람을 살리는 것, 자기가 저주를 받고 다름 사람을 복 받게 하는 것, 이것이 교환의 신비요 은혜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화평입니다. 나 대신 버림을 받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몸을 밟고서 우리는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서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다른 길로 가려는 사람들은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나 대신 저주를 받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몸을 밟고서 우리는 어떤 종류의 사람에게도 가까이 가서 그들과 화평을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 대신 몸과 영혼이 파손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십자가를 만지며 우리는 우리가 처한 정신분열과 우울증과 절망의 질병에서 치료를 받아 자유와 평안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붙잡을 때 이와 같은 화평의 일이 일어납니다. 자유와 평안이 주어집니다.

 

십자가를 붙잡을 때 하나님과 멀어졌던 죄인이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게 되고 십자가를 붙잡을 때 이웃과 멀어졌던 사람이 이웃과 화평을 이루게 되고 십자가를 붙잡을 때 자신과 분리되었던 사람이 자기 자신과 화평을 이루고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복음 찬송 가운데 이런 찬송이 있습니다. “화해하세요 인사를 하세요 십자가 바라보세요 누구의 죄 때문인가요 손을 붙잡고 인사를 하세요 화해를 하세요이 찬송을 함께 부르면 좋겠습니다. 먼저 하나님과 화해하면서 그 다음 이웃과 화해하면서 그리고 자기 자신과 화해하면서 이 찬송을 함께 부르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시간 우리 마음의 현주소가 어디인지 살펴 보십시다.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습니까? 부부간에, 형제간에, 부자간에, 성도들간에, 서로 멀어져 있습니까? 자기 자신과 멀어져 있습니까? 십자가만이 우리의 화평이십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를 붙잡을 때 화평이 이루어집니다. . “화해하세요" 찬송을 함께 부르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