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에베소

[엡4:1] 코이노니아 / 조성노목사

'코이네' 2018. 2. 10. 22:21

코이노니아

설교본문 : 엡 4:1-6
설교자 : 조성노 목사
설교일자 : 2016-01-17
설교듣기 http://file.ssenhosting.com/data1/thegreen/20160117m.mp3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우리가 교회의 고유한 사명, 사역, 역할, 기능을 얘기할 때 4가지를 꼽습니다. 첫째, 케리그마(kerygma), 곧 선포, 설교입니다. 둘째, 디아코니아(diakonia)는 봉사, 헌신, 구제입니다. 교회는 처음부터 이를 중요한 사명으로 인식했습니다. 그래서 교회 직제 가운데 가장 먼저 세운 직분이 집사(diakon)입니다. 사도는 어차피 주님의 제자를 말하고, 교회가 조직되고 난 뒤에 제일 먼저 등장한 직제가 집사입니다. 초대교회가 제일 먼저 일곱 집사를 세웠고, 최초의 순교자도 일곱 집사 가운데서 나왔습니다. 사도들은 케리그마를 전담하고, 집사들은 디아코니아를 담당했습니다. 셋째, 디다케(didache), 교육입니다. 교회는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곳이었습니다. 교회의 교자가 가르칠 교(敎)자입니다. 어느 나라나 교회가 가르치는 데 힘쓰는 것도 이것이 교회의 본연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기 직전에 제자를 모아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가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교육의 사명은 주님의 유지입니다. 넷째, 코이노니아(koinonia), 교제, 교통, 사귐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조직이 아닙니다. 교회는 코이노니아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훗날 영원히 교제하며 더불어 살 천국 공동체의 모형입니다. 여러분, 장차 천국 갈 사람들은 천국의 모형인 교회생활을 잘 해야 합니다. 지상에서 교회생활의 연장이 천국생활입니다. 물론 이 땅에 있다는 환경적 한계 때문에 교회는 불안정하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교회는 천국의 모형입니다. 천국은 교회생활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이 땅에서 천국의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코이노니아입니다.

 

초대교회 때는 이런 교회의 여러 기능과 역할이 잘 작동했습니다. 사도행전 2장 14절입니다.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베드로를 위시한 사도들의 불같은 케리그마가 이루어지는 현장입니다. 이렇게 복음이 선포되니 사람들이 어떻게 됩니까? 37절 이하입니다. “[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41절도 보십시오.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42절을 보면 그들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합니다. 디다케입니다. 교육이 이루어지는 현장입니다. 주님을 직접 모시고 다녔던 사람들인 사도들이 성도들을 가르쳤으니 그 교육이 얼마나 생생했겠습니까?

 

44절 이하를 보십시오. “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자발적이고도 능동적이며 희생적인 디아코니아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구제, 봉사, 헌신입니다.

 

46절을 보십시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코이노니아입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교회에서도 모이고, 음식을 나누며 가정에서도 모였다는 겁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47절입니다. “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온 백성의 칭송을 받고, 구원 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해졌습니다. 설교과 가르침과 봉사와 교제를 잘 하면 칭송을 받을뿐만 아니라 구원 받는 사람도 늘어납니다.

 

여러분, 교회는 근본적으로 교제 공동체입니다. 그렇다고 친목회는 아닙니다. 성찬을 통해 주님의 살과 피를 함께 나눈 사람들끼리 모여 깊은 연대의식과 동질성을 확인하며 영원히 함께 갈 사람들로서 서로 이해하고 공감하고 성원하는 격려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오늘 본문 에베소서 4장 2절 이하입니다.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올해 우리 교회 주제 요절인 로마서 12장 15절도 그렇습니다. “[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이것이 코이노니아 공동체입니다. 주님은 이런 코이노니아 공동체를 실천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할 때,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 성도 간 코이노니아가 주님의 뜻임을 믿는다는 고백입니다. 신앙고백은 이렇게 해놓고 교회 나와도 아는 체 하지 말고, 심방도 하지 말고, 몇 주 안 나와도 전화나 문자 보내지 마세요, 국수 먹고 가라고 붙잡지 마세요 라고 부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미안하지만, 그런 분들은 아직 교회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은 짐을 나눠지고 피차 위로를 받고, 서로 용납하고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마다하시면 코이노니아는 언제 실천합니까?

 


 

물론 교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문제가 많은 곳입니다. 교회는 착한 사람만 모여 예쁜 일만 하는 곳이 아닙니다. 현실 교회는 노아의 방주와 같습니다. 노아의 방주는 분명 유일한 구원의 방편이지만, 그 방주의 형편은 쾌적하지 않았습니다. 하늘로 난 창이 달랑 하나만 있었습니다. 창은 하나인데 짐승은 많았으니 그 갑갑함과 악취가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그러나 노아의 8가족은 거기에서도 하나가 되었습니다. 만약 노아의 가족이 거기에서 탈출했다면 수장되었을 겁니다. 방주를 떠나지 않고 끝까지 서로 격려하며 견뎠기 때문에 모두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합니다. 코이노니아로 하나 됨을 실현하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교회 공동체로 하나 되게 하십니다. 교회는 성령께서 만든 조직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교회는 운명적이고 절대적입니다. 예를 들어 가정이란 공동체는 부부의 피를 함께 나눠가진 혈연 공동체이기에 세상 어느 집단보다 질긴 운명 공동체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집니다. 성도들은 모두 주님의 살과 피를 나눈 형제자매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본문에서 계속해서 강조하는 것은 우리는 한 몸, 성령도 한 분, 천국이란 소망도 하나, 믿음도 하나, 세례도 하나, 하나님도 한 분이시기에 우리는 당연히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하나 됨을 지키라는 것은 하나님의 엄숙한 명령입니다. 하나 됨은 결코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라 하나 됨을 지키려는 노력이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하나 되게 하신 부부도 그 가정을 지키려는 노력이 있어야 건강한 가정으로 유지됩니다. 우리나라도 요즘 이혼율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요즘 와서 옛날에 없던 이혼 사유가 급증해서 그렇습니까? 그것보다는 옛날에는 필사적으로 가정을 지키려고 노력했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교회는 이런 것을 닮으면 안 됩니다. 나만 교회를 떠나면 그만인 게 아닙니다. 우리는 다 천국에 가서도 만날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여기서부터 잘 지내야 합니다. 여기에서 다 털고 가지 않으면 훗날 천국에 가서도 난처해집니다.

 

요즘 가나안 신자라는 말이 자주 들립니다. 가나안 교회 성도라는 뜻이 아닙니다. 가나안을 거꾸로 하면 안나가입니다. 주님을 믿지만 교회는 안 나가는 사람을 가나안 신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점점 더 늘고 있다고 합니다. 가나안 신자들은 수년 동안 여러 수십 교회를 전전하며 자기가 생각하는 교회다운 교회를 찾다가 이제는 지칠 대로 지쳤습니다. 더는 어디를 찾아다닐 여력이 없어진 겁니다. 그래서 이럴 바에는 차라리 교회를 안 나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해서 주일에는 가족끼리 예배를 드립니다. 이게 훨씬 더 편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맞습니다. 요즘 교회가 더는 교회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가나안 신자가 찾는 교회는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교회다운 교회를 찾고 고르는 일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저는 남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권한 이후가 막막합니다. 교회를 소개해야겠는데 선뜻 소개하고픈 교회가 없습니다. 자칫하면 교회가 복이 아니라 화가 될 수도 있습니다. 교회 안 나가는 게 더 복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나 판단은 위험합니다. 여러분은 교회에서 아무 문제가 없어서 교회생활을 이루어 가십니까?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내하며 하나 됨을 지켜가고 있습니다. 주님의 명령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천국이라는 영원한 교회로 옮기면 다 보상될 것입니다. 주님의 바람과 분부가 있기에 여러분은 이 현장에서 하나 됨을 지켜가고 있습니다. 교회생활이 마냥 행복하거나 문제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겸손과 온유와 사랑과 용납과 평안의 매는 줄로 힘써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켜갈 뿐입니다. 저는 가나안 신자를 비난할 생각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분들에게 격려하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그분들께 한 말씀 드리자면, 피를 흘리더라도, 견딜 수 없는 아픔이 있을지라도,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함께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탈도 많고 분열이 극심했던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교회를 떠나거나 가나안 신자가 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고린도후서 13장 11절입니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절대 교회생활을 접으라고 하지 않고 견디고 용납하라고 했습니다. 상대가 문제가 많으면 너에게도 문제가 있으니 겸손하라고 했습니다. 어떻게든 방주 안에 머무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교회를 떠나는 분을 못 잡습니다. 다른 교회를 가서라도 방주 안에 있어야 합니다. 내게 아픔을 준다고 방주 자체를 버리면 안 됩니다. 그래서 바울이 본문을 통해 강조하는 것이 겸손과 온유, 인내, 성찰입니다.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이니 힘써 지키라고 합니다.

 

교회는 국방의 의무를 감당하듯 하는 곳이 아닙니다. 성도 모두가 기대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교제하고 소통하는 곳입니다. 교회 나와 예배드리며 주님만 만나고 가면 그날 예배는 반만 성공한 것입니다. 교회 예배에서는 주님도 만나고 이웃도 만나고 가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초대교회처럼 모두 기쁜 마음으로 모이고, 모였다면 서로 깊이 교통하고 소통하고, 언제나 함께 기뻐하고 함께 우는 운명 공동체, 구원 공동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원문 : http://thegreen.or.kr/sermon_m/50847)

 



by 코이네설교자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