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에베소

[엡3:16] 속사람을 강건하게 한다는 말의 의미

'코이네' 2018. 1. 20. 08:18

속사람의 변화는 무엇일까요? 

 

엡3:16 보면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속사람과 겉사람을 구분짓습니다. 비록 겉사람은 세월과 함께 후패해져 갈지라도 속사람은 복음 안에서 날로 젊어지고 싱그러워진다고 바울사도는 말했습니다. 속사람이 강건하다는 것은 '건강한 인격'을 말하는 것인데 몇가지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칼 융(Carl G. Jung)이라는 심리학자는 '존재에 대해서 개별화된 의식을 가진 사람이 건강한 사람이다'라고 '존재의 개별성'을 말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요즘 소위 신세대들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남의 눈치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자기나름의 자기주의가 강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나만 잘 살고 나만 부자되겠노라는 '이기주의적 개별성'과는 다릅니다. 그런 입장에서 이들의 개별성을 '자기중심적 개별성'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남과의 비교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나는 나고 너는 너다', 이것은 바람직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매사에 자기 것과 남의 것을 비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니가 크니 내가 높으니' 이런 사람은 건강한 인격체가 못됩니다. 건강한 사람은 자기를 남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남한테 질질 끌려다니지도 않습니다. 사람은 각기 개성이 있고 장단점이 있다는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 두 달란트 받은 사람, 한 달란트 받은 사람 다 자신에게 적절한 달란트를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 겁니다. 반 달란트면 어떻습니까? 작으면 작은대로 좋은 데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자꾸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비굴의 노예가 되고 자기정체성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병든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건강한 사람은 존재를 개별적으로 생각하여 남과 비교하지 아니하고 항상 개별성을 지니고 살아 가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롤로 메이(Rollo May)라는 심리학자는 건강한 사람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건강한 사람이란 수용성이 큰 사람, 즉 마음이 큰 사람이다...' 건강한 사람은 마음이 항상 열려있다는 것입니다. 남의 충고를 잘 받아들이고 누구의 이야기도 잘 듣습니다. 다 받아들이고 다 수용하며 좀더 깊이 사고 하는 사람, 그가 바로 건강한 속사람을 가진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건강치 못한 사람은 대수롭지 않은 소리를 들어도 발끈합니다. 화를 잘 냅니다. 아직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해질 필요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 다음 우리가 잘 아는 에리히 프롬(Erich Fromm)'생산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할 때마다 '죽겠다, 망했다, 안된다'라고 말합니다. 항시 부정적이고 비생산적입니다. 이런 사람 인격적으로 문제있는 사람입니다. 왜 죽고 망하는 얘기만 하는 겁니까? 살고 흥하는 얘기 좀 하면 안됩니까? 특히 지도자가 이런 의식에 사로잡혀 있으면 큰 일입니다. 생산적이고 진취적인 사고를 가져야 합니다. 남을 독려하고 격려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항시 소망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말 한마디를 해도 상대방을 일으키는 말을 해야지 상대방을 주저앉게 하는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불씨에 기름을 갖다 끼얹어야지 불씨에 찬물을 갖다 끼얹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건강한 인격은 건강한 영혼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은 속사람을 향해야 합니다. 속사람이란 믿음으로 거듭나 새롭게 창조된 자아로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 속사람이 겉사람을 주도하는 그러한 인격으로 발전되어야 합니다. 그럼 무엇으로 속사람이 강건해질수 있는 겁니까? 16절의 사도의 기도에 다시 귀기울여 보십시다.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여기 보면 '성령으로 말미암아'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이겠습니까? 속사람은 성령의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속사람은 성령을 통해서만이 가능한 실존이라는 것입니다. 속사람을 새롭게 하고 강건케 하는 것은 성령의 소관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그를 주장할 때 하나님에 의해서 의도된 목표로 참된 의로움과 거룩함이라는 새로움을 입는 존재 상태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성령에 의해서 만들어져 가고 있습니까?... '생각하는 사람'으로 유명한 조각가 로댕이 그런 말을 남겼습니다. 한 미술학도가 찾아와서 '선생님, 선생님은 어떻게 그렇게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내십니까?' 그랬더니 로댕의 대답이 이러했답니다. '나는 불필요한 부분만을 깍아 냅니다. 그러면 이런 작품이 나오지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레이져로 수술을 많이 합니다만은 속사람의 강건함은 그렇게 불필요한 부분을 성령의 빛으로 쪼여 잘라내고 깍아냄으로서 강건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늘의 영광을 보아야 내적 건강이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내 영혼의 건강이 땅에 있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내 영혼의 건강은 하늘에 있습니다. 하늘의 하나님의 영광을 보아야 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의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자만이 그 심령에 평강을 누리고 강건함의 은총을 누리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그러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복음을 전하다 돌에 맞아 죽습니다. 하지만 죽어가는 가운데에도 하늘을 우러러봅니다.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그를 맞으려 서 계신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그 순간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이 되었고 자기를 죽이는 저들을 용서해 줄 것을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의 속사람의 모습입니다. 주님도 그러했습니다. 한많은 십자가 위에서 당신께 창을 꼽는 자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속사람이 강건한 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우리는 스데반이나 주님에게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영적 건강의 절정은 모두 하늘의 영광의 풍성함을 바라봄으로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바로 '영성의 핵심'이 있습니다.

 

하나님 영광의 풍성함, 이것을 깨닫고 보는 순간, 그 안에서 내 영이 소생함을 입습니다. 나를 통해 이루시는 하나님의 큰 영광을 바라볼 때에 병든 영혼이 고침을 받습니다. 성령께서 그것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성화케 하는 영이고 사명을 깨우치는 영입니다. 이 영이 우리와 함께 함으로 우리 속사람은 강해질 수 있고, 하늘의 풍성함을 바라봄으로 현실의 고난과 아픔을 승화하여 삶의 원동력으로 삼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분명한 하늘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고 그 사랑에 뿌리를 내려 더욱 주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알아가고 하늘의 온갖 충만한 것으로 자신을 충만히 채워 그것으로 자신의 삶을 영위해 갈 때 그는 참으로 참신자, 올바른 그리스도인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본문에서 내적으로 연관성을 갖는 세 가지 것을 연결지었습니다. 성령을 통해서 속사람이 굳세어지고, 믿음으로 인해서 그리스도를 모시게 되고, 그 사랑의 실체를 더욱 알고 깨달음으로 하나님의 온갖 충만한 것으로 자신을 채워, 진정으로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사람으로 저들이 살아가게 되기를 빌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영락의 가족들도 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자신을 채워가시기를 바랍니다. 글레멘스톤이라는 사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마음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게되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게되고, 습관이 바뀌면 인격이 바뀌게되고, 인격이 바뀌면 운명이 바뀌게 된다...' 팔자 한탄은 금물입니다. 생을 속단하는 것도 금물입니다. 운명은 내 마음에 달려 있고 내 마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달려 있습니다. 내 마음이 거듭남을 체험하는 순간 운명도 바뀝니다. 내적 존재가 변할 때에 운명이 바뀌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당신이 가지신 부요함을 하나님 자신을 위해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아십시다. 9:23절을 한번 읽어보십시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이 영광받도록 미리 준비하신 긍휼의 그릇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그릇 속에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의 부요를 담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그릇이 누구겠습니까?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들 속에 하나님은 당신의 온갖 충만한 것들로 채워주시기를 원하시고 바라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제 이 바울사도의 진지하고 간절한 기도에 '아멘'으로 응답하십시다. 오늘 우리 시대의 문제는 속사람의 변화에 있습니다. 속사람이 변화되지 아니하면 이 시대는 희망이 없습니다.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학식이 문제가 아닙니다. 속사람이 변화되지 아니하면 그것들은 모두 악의 도구들이 되고 말 뿐입니다. 그러나 속사람이 변화될 때에 그것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오는데 일익을 감당하는 유익한 도구들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by 코이네설교자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