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고린도서

[고후10:3] 복종의 근거

'코이네' 2017. 8. 30. 19:06

   복종의 근거

성경 본문: 고후 10:3-6

 

 

얼마 전에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자기 담임목사님께서 교회를 건축하는데 돈이 부족하니 그 친구의 집을 저당 잡혀서 은행에서 대부를 받겠다는 것이다.그리고 덧붙여서 "순종이 제사보다 나으니 순종하시오"하더란다. 그래서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는 것이다.그래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마음으로는 그러고 싶지 않은데 하나님이 두렵다 는 대답이다. 바로 이것이 교인들로서는 가장 두려워하는 상황이다. 부담스러운 그 무엇을 요구하면서 마치 하나님의 명령처럼 한다. 그리고는 복종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런 일은 권위를 강조하는 사람일수록 심하다. 목사가 마구 교인들에게 하나님을 빙자해서 순종하라고 한다. 또한 기도하고 예언한다는 소위 은혜 받았다는 이들이 하나님이 말씀이라고 마구 복종을 요구한다.

그래서 이 순종이란 단어는 신앙을 강조하는 모임에서 가장 강하게 휘두르는 단어가 되었다. 열심 내는 교회나 기관에서는 항상 이 말이 사용된다. 이단의 우두머리일수록 순종이란 말을 가장 미화시키기 마련이다. 이 단어만 나오면 교인들은 아무 말도 못하지만 마음속에서는 질문이 일어나게 마련이다."도대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과 이 순종이 같은 것인가?" 무엇이 복종의 근거인가?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과 하나님 순종하는 것은 같은 것인가? 목사님이나 어른들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처럼 생각해야 하는가? 물론 많은 부흥사들이 그래야 된다고 가르쳐왔다.

 

루터가 자기 상관이요 당시 교회 그 자체였던 교황과 육신 세계를 지배 하던 황제 앞에서 같은 고민을 했었다. 그는 교황과 황제에 복종해야 했었다. 그러나 그는 대항했다. 그는 황제를 존경하고 교황에게 복종하기를 원했다. 기꺼이 그러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하게 하는 그 무엇이 있었다. 교황의 가르침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서로 대치된다는 사실이었다. 교황은 교회가 구원을 준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교회의 머리는 교황 자신이었다. 교회는 성경보다 더 권위 있는 곳이었다. 교회는 신자들이 구원 얻기 위해서 행할 일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렇게 쓰여 있지 않았다. 거기에는 루터는 교회가 성경보다 더 우위에 설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구원은 오로지 하 나님이 주시는 것이었다.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죄인이었기에 그가 행동하는 것으로 구원을 살 수 없었다. 그저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서 행해놓으신 일들을 감사함으로 받는 길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진리에 대한 복종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순종을 본다. 하나는 질서에 대한 순종이요 다른 하나는 절대적인 순종이다. 질서에 대한 순종은 세상에 사는 누구에게나 반드시 요구 된다. 그것이 없이 세상의 질서는 무너진다. 하나님도 그것을 중요하게 요구하신다. 그러기에 부모에게 순종하고 스승과 어른들에게 복종하라고 했다. 법을 지키고 사회의 규범을 따르라고 명령하신다. 차를 타고 가다보면 나이 어린 전경이 오라고 한다. 그러면 꼼짝 못 하고 간다. 그가 내게 딱딱거리면서 위반딱지를 떼면 아무 말 못하고 복종한다. 그에게 욕하고 대드는 사람들도 있다. 위반을 했다면 당연히 복종해야 하다. 그가 나보다 훌륭하고 높아서가 아니다. 질서를 위해서 순종한다. 만약 누구나 다 전경에게 대들고 그냥 멋대로 달려나가면 이 나라는 지옥처럼 된다. 그러나 질서에 대한 복종은 아주 부분적이다. 전경에게 복종함은 오로지 교통질서에만 해당된다. 교통정리를 위해서 시키는대로 그를 따르는 것이지 다른 부분에서도 복종할 이유는 없다. 마찬가지로 삶의 각 분야에서 질서를 위해서 우리는 복종한다. 복종하는 대상에 대한 존경하고는 아무상관이 없어 우선 따른다. 교회에서도 이런 복종이 우선적으로 필요한 점이 같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이런 단계를 초월한다. 태초에 하나님의 말씀이 계셨다. 그리고 그 말씀은 천지를 창조했다. 그 안에 생명이 있고 권능이 있으며, 그 말씀 자체가 하나님이었다. "그의 말이 영이요 생명 이다."(6:63) "그의 명령이 곧 영생이다."(12:50) 그러므로 하나님이 말씀에 대한 복종은 절대적인 것이다. 여기에 어떤 예외나 핑계가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목사의 말씀은 어느 정도 순종해야 하는가? 분명히 목사라는 직책 그 자체는 질서의 차원에 속한다. 좋아하든 싫어하든 존경하든 미워하든 일단 교회에 속하면 그 차원에서 순종하는 것이다. 혹시 예수처럼 생각해 절대적으로 복종을 한다 해도 그것은 질서에서 최상의 자리를 준다는 표현일 뿐이다. 목사는 자신을 하나님처럼 섬기고 복종 하라고 해서는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해서 부당한 복종을 요구한다. 성경 말씀을 뽑아내서는 앞 뒤 문맥 가리지 않고 뒤집어씌운다. 성경에 "삼년이 걸리리라"는 한 문장을 2년동안 기도한 사람에게 적용시키면서 복종하기를 요구한 사람도 있었다. 문맥상 아무 상관이 없는 내용 이었다. 잘못된 신앙지도자일수록 성경귀절을 들고 자기 개인에 대한 복종을 요구한다.

루터는 윔스 국회에서 황제를 비롯한 온 세계의 지도자들 앞에 섰었다. 그러한 자리에 간 것만도 무서운 영광이었다. 거기 교황의 칙서를 들고 온 사절단도 있었다. 그들은 많은 성경귀절로 이어진 교황의 명령서를 가지고 왔다. 그는 일개 수도사였다. 그는 기꺼이 복종하고 싶었고 또 그래야만 했다. 또 솔직히 그는 무서웠다. 온 세상과 싸울 준비는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율법과 복음의 차이를 분명히 그어야만 했다. 적어도 인간이 구원을 받고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 길만은 포기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대단히 두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단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서만 해당되는 권세였다. 그러나 루터는 하나님을 더 무서워해야 했다. 세상에서는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그치지만 더 큰 세상에서 하나님을 피할 길은 없었다. 그러기에 루터는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아마도 그 며칠 동안은 그에게 영원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는 결단을 내려야했다. 그는 말했다. "내게 다른 길은 없습니다.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 이 말은 당시로선 놀라운 선언이었다. 반역이었고 질서의 파괴였던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율법과 복음의 차이를 여기서 분명히 하고 있었던 것이다.

 

율법은 세상적인 수준의 의를 준다. 그리고 질서에 복종하게 한다. 그러나 그것은 영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리고 더 근본적이고 더 큰 세상에는 해당되지 못한다. 이제 복음에 복종함으로 루터는 더 크고 더 넓은 초자연의 세계로 도약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교황을 버리고 복음을 잡았다.

복음이 무엇인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 그리고 하나님이 대신 행해주고 도와주시겠다는 복된 소식이다. 여기에 복 종하지 않고는 절대로 구원이 없다. 절대로 평안도 없다. 하나님이 주 는 것을 받아야만 산다. 이것을 설명해 주고 전해 주는 것이 교회이다. 이 사실을 알기에 교회 어른들에게 복종해서 재산과 시간을 내서 이 일을 돕는 것이다.

 

며칠 전에 미국에서 어떤 목사님에게 초대를 받았다. 고생을 많이 한 뒤에 조그만 집을 마련하고 교회도 안정이 되었다. 그러나 이 분의 마 음 속에 두려움이 있었다. 내가 목사인데 이렇게 좋은 집을 가지고 평안히 살 수 있는가? 가난한 사람이 너무도 많고 불쌍한 사람도 너무 많다. 그렇게 생각하다보니 평안이 있을 수 없었다. "언젠가는 다 팔고 선교사로 가겠다." 이것이 율법적인 두려움이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른 목사의 상에서 시작된 것이다. 훌륭한 목사는 봉급을 받으면 다 가난 한 사람들 주고 자기는 셋방에서 살아야 한다. 과연 이것이 훌륭한 목사의 기준인가?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않는 이가 과연 훌륭한 신자인가? 여기서 보는 것이 바로 복음에 대한 오해였고 신자 됨에 대한 오해였고 복종에 대한 오해였다.

 

하나님께 복종함은 그의 복음의 말씀에 복종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 상의 어떠한 이론도 생각도 다 거기에 복종시키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 절대로 복음이 능력은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가 의로워지는 것은 다 팔고 고행해서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감사히 받아 누리는 길 밖에 없는 것이다. 편안한 삶을 사는 게 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죄사함 을 부인하는 게 죄다. 그러기에 성경은 말씀하신다. "우리가 육체에 있어서 살지만 육체대로 싸우지는 않는다. 우리의 무기는 세상적인 것이 아니다. 영적인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있는 악한 진을 파괴시킨다. 그것으로 우리는 이기는 것이 아니다."무엇이 우리의 무기인가?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이요 그에 대한 완전한 복종이 아니던가! 이것이 바로 우리가 철저히 복종할 대상이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는 것을 피한다.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서"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바른 복종이다. 우리가 복음을 듣고 구원의 방법을 알았으면 거기 서서 나아가야 한다. 아무리 세상 사람들이 상황이 위협해도 루터처럼 온 세상이 나 다 덤벼들어도 양보할 수 없는 진리가 바로 복음이었다.

 

어떤 불교 신자가 나를 불렀다. 암이었다. 그는 너무도 고통스러웠고 수십년을 고생시킨 부처님을 떠나고 싶었다. 나는 그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는 감사했다. 그리고 그 내용이 옳고 진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결정할 시간을 조금만 달라고 했다. 그때 그의 눈앞을 떠나지 않는 모습을 누런 금부처였다. 그는 고통에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평생 믿은 그 부처를 뗄 수 없었다. 다음날 그는 불교인으로 죽었다. 그는 진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복음인줄도 알았다. 하지만 그는 과거를 생각했다. 평생이 너무도 아까왔던 것이다. 그리고 부처님에 대한 매력도 있었다. 그는 고민하다가 결정하지 못했다. 그냥 과거대로 가도록 과거의 신앙에 잡혀있었던 것이다. 많은 신자들도 비슷한 경험을 한다. 복음에 과감히 자신을 던지지 못하고 계속 옛 사고와 습관에 잡혀서 방황하는 것이다. 나는 그 목사님에게 말했다."당신의 두려움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도 인간적이고 비복음적입니다. 계속적으로 자기의 의를 추구하고 있어서 하나님의 의를 반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즐기십시오. 그의 죄사함과 그의 의를 즐기십시오. 그것이 바른 복 종이요 복음적인 순종입니다. 율법적에 복종해서 자신을 맞추려면 영원히 평안은 없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적극적인 복종을 소개했다. "두려워하려면 복음에 온전히 복종 못한 것을 두려워하십시오. 그가 주신 사랑 , 그가 나를 향해 주신 새로운 평가에 복종하십시오. .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가족입니다. 가족이 누릴 축복은 성경에 얼마든지 쓰여있습니다. 우리 는 하나님의 능력자 입니다.그의 지혜와 권능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 전체를 받았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할 복종입니다.

그의 복음에 복종하라. 그리고 자기가 믿은 것을 꼭잡고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왜 그가 주셨다는 기쁨과 평 안에 복종하지 못하는가? 좀더 적극적으로 그의 능력에 그의 비전에 복종하지 못하는가? 하나님이 벌하시려는 불복종은 바로 이런 것이다.

 

우리는 예배에 나아온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에 참여한다. 그래서 복종의 능력을 경험한다. 어떤 이들은 신념을 가지고 산다. 확고히 믿는다. 그래서 세상적 차원의 많은 것을 이룬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 자체에게 복종한다. 그는 복음의 말씀으로 임하신다. 나는 복음에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복종한다. 그의 자유, 그의 권능에 그의 영원한 나라에 복종한다. 그렇게 복종을 통해서 도약한다. 그리고 이 능력으로 작은 세상의 질서에도 온 전하게 복종한다. 나는 무엇이 복종의 근거인지 확실히 알고 있다. 나는 흔들리지 않는 다 복종하기 때문이다. 루터는 복종의 근거를 확실히 했다. 바로 복음 의 내용이었다. 그는 평생 복종했다. 그래서 참 평안과 자유를 맛보았다.그리고 참된 권능으로 교회와 신자들을 이끌었다. 우리도 마찬가지 복음의 말씀에 자신을 던지라. 루터처럼 이 진리에 목숨을 걸라. 일생을 걸라.

 



by 코이네설교자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