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고린도서

[고후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코이네' 2017. 7. 19. 18:21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고후7:2-16

 

 

바울과 고린도 교회의 관계는 유대주의자들의 간교로 심히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 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끈기있는 노력으로 말미암아,그들은 복음 안에서 바울의 권 면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피차간에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서 좋은 결말을 가져오게 됩니다.

성도들도 서로 간에 상처를 줄 수도 있고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한번 깨어진 관계를 다시 회복하려고 하지 않는 다는 것 그것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인이라면 복음 안에서 깨어진 어떠한 관계라도 회복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줄곳, 계속해서 이 일을 위해 애쓰고 노력하고 있음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정말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는 주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 고 있음을 보게 된다.(개인적인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을 위해서다. 이런 헌신적이며 희생적인 노력이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서론에서도 살펴보았듯이 바울은 이미 고린도전서 그리고 그 사이에 디도를 통해 준엄한 또 한통의 서신을 보낸바 있습니다. 그리고 일이 끝난 후 드로아에서 다도를 만나 그 결과를 듣기로 되어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에베소에서 극심한 환난을 격고난 후 드로아에 도착하여 선교에 힘쓰며 디도를 기다렸으나 소식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고린도 소식이 몹시도 궁금했던 바울은, 드로아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마케도냐까지 가서 디도를 만나고자 시도합니다. 이것 때문에 드로아에서의 사역이 궤도에 오르려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마케도냐로 떠났던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마케도냐에서의 바울의 상태는 여러 면에서 좋지를 않았습니다.(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사방에서 환난을 당하므로 육체가 곤고했고, 당시 율법주의적인 유대주의자들과 이방인들이 합세해 그를 제거하려고 여러모로 괴롭혔고, 테러와 모략을 일삼았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농간으로 인한 교회와의 갈등... 여기다 업친데 덮친 것은 "안으로 두려움"(5)이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심지가 견고한 사람일지라도 두려움이 전혀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피곤한 것은 역시 심적인 것으로 그의 사역의 진실성에 대해 오해 를 받고 사람들과 부딪히는 것입니다.

 

이럴 때 사도 바울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임했습니다. (6-7절을 읽어봅시다.) 우리는 하나님이 바울을 어떻게 위로 하셨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그토록 기다리던 디도를 만남으로 바울은 그 마음에 적지 않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동역자를 만난데서 오는 위로입니다. 이와 같이 마음에 맞는 동역자가 같이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큰 힘이 됩니다. 사람의 수로 계산하며 둘이나 실제로는 엄청난 위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에도 한 사람은 천을 쫓지만 두 사람은 만을 쫓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32:10).

뿐만 아니라 고린도교회로부터 좋은 소식까지 가지고 왔으니 이보다 더 기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과 고린도 교회의 관계가 악화되어 있을 때에는 바울만 아니라 동역자들까지도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의 권면(준엄한 눈물의 편지) 을 받아들여 잘못을 반성하고 바른 입장을 취하게 되니까 자연히 동역자인 디도까 지도 환영을 받게 되었다. 디도는 이런 고린도 교회의 쇄신된 모습을 전하여 줌으로 바울의 심정을 편하게 해 주었던 것이다.

 

오늘의 살아가는 우리 모든 믿음의 식구들에게도 이 위로의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험한 세상에서) 바울은 어려울 때마다 이 하나님을 만나며 그 음성을 들으며 두려움과 절망과고 독에서 벗어나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에게는 늘 로마 전도의 꿈이 있었는데, 그가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잠기 예루살렘을 방문하자, 유대주의적인 교권주의자들에게 체포되어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됩니다. 하루아침에 로마 선교고 무엇이고 다 허물어질 위기에 봉착합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리도안에서의 모든 소망이 무너지고 위로해 줄 이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던 그밤에, 주님이 바로 "그날 밤"그의 곁에 서서 "담대하라 내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23:11)고 위로의 음성을 들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한번도 당신의 자녀들을 못 본 척 하거나 외면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는(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신다. 모든 환난에서 우리를 면케 하시며 우리의 영혼까지 지키신다’(121).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다윗처럼 "천만인이 나를 둘러 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3:6)고 노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 기쁨의 소식을 듣고 감사했습니다.(오히려 그들이 바울을 사모하며 기다린 다는 것이다.순간적으로 미혹하는 무리들에게 현혹되었으나 진실은 언제나 통하는 열쇠이다.) 사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그 두 번째의 준엄한 눈물의 편지를 보내고 상당히 마음이 편하지를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서신의 내용이 너무도 신랄했고 또 단도직입적이었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그로인해 고린도 교인들이 상처를 받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목자의 마음이요 영적인 부모인 자도자의 마음일 것입니다. 마치 잘 못한 자식을 벌주고 나면 부모의 마음이 휠씬 아픈 것과 같이... ( 오늘 쉽게 남의 잘못을 지적하기를 좋아하는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깨달아야 할 말씀이 아닌가 합니다. 바울은 지적하기를 지식에 사랑을 더하라고 했습니 다.) 어째든 바울의 이런 걱정과는 달리 오히려 이것이 그들에게 회개하여 변화 받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특히 두가지의 근심이 있음을 10절에 말씀하고 있는 것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 니다.

 

1)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입니다.

바람직한 금심이요 성경이 권하는 근심이다. 성경말씀 읽거나 설교말씀 듣고 마 에 감동을 받게 되면, 자연히 자신의 부족함과 연역함을 알게 되고 깨닫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중심보다는 내 중심으로, 하나님 영광보다 나를 위해 산 것을 깨닫게 되며 안타까워하는 마음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영적인 모습에 대해 애통한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좀더 신령 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까 하고 근심할 때, 이것이 곧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요 신령한 근심인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성장도 없고 변화도 없습니다. 이러한 근심이야말로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회개에 이르게 하며 마음과 생활에 변화를 가져 오게 하는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으로 더욱 깊은 성화의 단계에 이르게 해 주님과 동거하는 삶을 살도록 유도합니다.

 

2)이 반면에 세상 근심도 있습니다.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는 걱정이며 어떻게 하면 세상 권세와 영화를 누리며 돈좀 벌어 떵떵 거리고 살까하는 걱정이다. 이것은 온통 그 관 심사가 인간 자신과 세상사에만 쏠려 있음 보게 됩니다. 이런 마음에는 성령이 주시는 평안이 거할 곳이 없으며 하나님이 거하실 공간 조차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욕심이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세상 근심은 결국은 사망을 이룬다고 결론짓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다음과 같은 결실을 낳습니다.

(1)"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마음속에 하나님의 뜻 쫑아 살고자 하는 열심

(2)"얼마나 변명하게 하며":단순한 자기변호가 아니라,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모든 허물 낱낱이 고백하는 자세

(3)"얼마나 분하게 하며": 지었던 죄와 허물에 대한 자책

(4)"얼마나 두렵게 하며": 하나님 두려워하고 경외하여 범사에 하나님 뜻 쫑아

(5)"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말씀사모, 하나님과 동거하는 신령한 생활 사모

(6)"얼마나 열심있게 하며":

(7)"얼마나 벌하게 하며":자신 스스로 가차없이 잘못 벌하고 정죄하는 자세

 

결 론

 

성경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했으며 잠언에는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고(15:13),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한다"(17:22)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이것은 곧 신령한 근심으로서 원어적으로는 '하나님의 의한 근심'으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 하시도다"(34:18)고 했습니다. 또 산상수훈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 니 천국이 저희 것입이요"(5:3)

Moffatt는 이를 {하나님이 허락하신 고통}이라고 했습니다. 요컨데 이 근심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성령에 의하여 하는 근심으로 회개를 낳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유익하고 꼭 필요한 근심이기 때문입니다.

 


by 코이네자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