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사도행전

[교회주제설교]목적을 지향하는 교회, 이성희 목사 설교

'코이네' 2014. 4. 5. 17:43

사도행전 6장, 목적을 지향하는 교회, 이성희 목사의 교회를 주제로 한 설교


행 6:1-7 / 목적을 지향하는 교회 / 이성희 목사  

미국 새들백교회의 목사님이며 미국의 새로운 교회 운동을 이끄는 릭 워렌 목사님은 교회를 이끌어가는 요소를 다음과 같이 보았습니다. 첫째는 전통에 따라 움직이는 교회입니다. 둘째는 인물이 이끄는 교회입니다. 셋째는 재정이나 예산이 이끄는 교회입니다. 넷째는 프로그램이 이끄는 교회입니다. 다섯째는 건물이 이끄는 교회입니다. 여섯째는 행사가 이끄는 교회입니다. 일곱째는 구도자가 이끄는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를 이끄는 요소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목적이 이끄는 교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무엇이 이끌어가는 교회라고 보십니까? 우리교회가 목적이 이끕니까? 아니면 전통이 이끕니까? 때로는 우리교회는 가만 버려둬도 잘 굴러간다고 자랑합니다. 내가 가만히 있어도 일이 잘 진행된다고 자랑합니다. 이건 자랑이 아닙니다. 가만 버려둬도 괜찮다는 것은 침체했다는 증거이거나 관행에 따라서 흘러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교회는 목적보다 전통이나 사람이 이끄는 교회입니다.

초대교회는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교회가 세워지자 교회는 갖가지 어려움에 봉착하게 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고친 기적 때문에 잡히고, 매를 맞았습니다. 처음 성도들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재산을 팔아 교회에 봉헌했습니다. 그런데 이 좋은 봉헌 때문에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시험에 들었고 이 일로 부부가 다 죽었습니다. 사도들은 정성을 다해 구제했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아름다운 섬김인 구제 때문에 불평이 생겼습니다. 이런 어려움과 시련이 생길 때마다 그때마다 필요한 것은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교회가 목적에 어긋나게 될 때에 문제가 생깁니다. 내홍이 생깁니다. 교회는 외부의 핍박이나 오해로 말미암은 비난 때문에 넘어지거나 시험에 드는 것은 아닙니다. 시련은 외부에서 오는 자극에 불과합니다. 교회의 문제는 절대 교회로 하여금 손해 보게 하지 않습니다. 외부의 핍박은 교회로 하여금 넘어지게 하지 못합니다. 교회가 다시 목적을 회복하고 지향할 때 교회는 성장합니다. 초대교회는 문제가 있을 때마다 교회의 본질적 목적으로 돌아갔습니다.

우리의 목적은 교회의 목적을 창조해내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발견해내는 것입니다. 교회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도 변하지 않습니다. 목적을 이루는 작은 목표들은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지역에 따라 변하지만 교회의 목적은 불변하는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교회를 세우셨습니까? 광야에서 성막을 세우실 때나 예루살렘에 성전을 세우실 때나 사도들을 통하여 교회를 세우실 때나 지금 이곳에 우리교회를 세우실 때나 하나님의 목적은 항상 같습니다. 하나님은 성막을 세우게 하실 때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겠고”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시는 것이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이 곳에서 예배하게 하십니다. 이 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게 하십니다. 이 곳에 모인 성도들이 교제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 곳에서 힘을 얻는 성도들이 나가서 사람들을 섬기게 하십니다. 이것이 교회를 세우신 목적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거름과 같습니다. 거름은 한 곳에 쌓아두면 이웃에 악취를 풍깁니다. 그러나 땅에 골고루 뿌리면 세상을 비옥하게 합니다. 교회는 한 교회만 가지고는 세상을 비옥하게 하지 못합니다. 모든 교회가 함께 하나의 목적을 지향하게 될 때에 세상을 비옥하게 합니다. 교회가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악취를 풍겨서는 안 됩니다. 한 교회로 말미암아 악취가 세상을 진동할 때가 있습니다. 교회는 함께 세상을 비옥하게 해야 합니다. 악취를 풍길만한 교회가 있으면 감싸주고 도와주고 권면하여 함께 땅을 비옥하게 해야 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교회가 목적을 지향하고 원래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되면 세상을 비옥하게 하는 능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교회가 세상을 아름답게 하고, 땅을 비옥하게 하기 위해 목적을 지향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목적이 흐려지면 혼란이 생깁니다.

사람이 많아지면 목적이 흐려지기 쉽습니다. 베드로가 나가서 전도했습니다. 회개를 촉구했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증거했고, 복음을 믿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하루에 3,000명이나 회개하고 제자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자 사도들은 과부를 구제하는 일에 지나친 시간을 소모합니다. 이것이 문제의 발단이었습니다. 사람이 많아지게 되면 지도자가 자신의 본업보다 부업에 매달리게 됩니다. 이런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 본질적인 곳과 비본질적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많아지면 목적이 흐려지기 쉽습니다. 베드로가 나가서 전도했습니다. 회개를 촉구했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증거했고, 복음을 믿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하루에 3,000명이나 회개하고 제자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자 사도들은 과부를 구제하는 일에 지나친 시간을 소모합니다. 이것이 문제의 발단이었습니다. 사람이 많아지게 되면 지도자가 자신의 본업보다 부업에 매달리게 됩니다. 이런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 본질적인 곳과 비본질적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목적이 흐려지면 혼란이 생깁니다. 목적을 벗어나면 공동체의 혼란이 생깁니다. 지도자의 우선순위가 바뀌면 공동체 전체가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교회가 구제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구제기관이 아닙니다. 우리교회도 구제를 열심히 하려고 애씁니다. 복지원이 있어서 이웃을 섬기는데 열심이 있습니다. 동남아 쓰나미 복구를 위해 봉헌도 하고 여러분들이 많은 봉사를 하고 왔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반드시 해야 하지만 구제 때문에 교회가 교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구제의 결과는 불평입니다. 교회가 기도하고 말씀전하는 것보다 구제에만 매달려 있으니 공동체에 혼란이 생긴 것입니다.

제가 아는 한 사람은 결혼을 하였습니다. 오빠가 여럿인 딸입니다. 아버지와 오빠들의 사랑을 독차지했습니다. 아침이면 아버지, 오빠들이 한번씩 안아주었는데 결혼하기 전까지 다 큰 여동생을 오빠들이 그렇게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결혼하고 보니 남편은 무뚝뚝하고 전혀 부인과 의논하지 않고 생활비도 쥐꼬리만큼 주고 경제권을 전혀 주지 않는 전통적 가부장적 남편이었습니다. 이 부인은 이상적 가정, 아름다운 가정이라는 자신의 목적이 흐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은 신앙적이었고 사랑도 많은 여인이었지만 극단적인 사고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신앙과 교회가 아니면 견딜 수 없는 정신적 공허감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래전에 시한부종말론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아마 예수님이 빨리 왔으면 하는 것 외에 더 큰 희망이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와중에 신앙적 갈등이 남편과의 사이에서 생기게 되었고 결국 이혼하게 되었습니다. 시한부종말론은 이제 접었지만 지금은 아주 편협한 신앙을 가지고 삽니다. 매일 밤 12시부터 2시까지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고, 자신들의 신앙만을 고집합니다. 다른 교회도 인정한다고 말은 하지만 다른 교회에 가보라고 하면 절대로 안갑니다. 이것이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교회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영적 혼란입니다. 자신의 목적이 어긋나게 되니 이제는 가정적, 영적 혼란까지 생겼습니다.

죽은 사람은 눈에 초점이 풀립니다. 요즘은 병원에서 혈압과 심장박동이 떨어지는 것은 기계로 다 보고 사망 판단을 내립니다. 이전에는 보면 사람이 죽으면 눈을 봅디다. 눈에 초점이 없어지면 생의 초점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목적이 흐려지면 삶의 의미도 흐려집니다. 삶의 의미가 흐려지면 혼란이 생깁니다. 생각 내부의 혼란뿐만 아니라 삶의 외부에도 혼란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했습니다. 종살이에서 해방되었고 약속의 땅으로 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의 땅, 가나안에 대한 목적이 흐려졌습니다. 약속에 대한 기대가 흐려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나안에 가면 뭘하냐?”,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이곳까지 와서 죽게 하나?” “우리는 그들의 눈에 볼 때에 메뚜기같이 보일 것이다”라고 불평하였습니다. 이런 불평은 결국 공동체의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십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뱀에 물려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모든 공동체와 모든 사람의 혼란은 어디서 옵니까? 목적이 흐려질 때 오는 결과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사건의 핵심은 ‘원인’(cause)이 아닌 ‘목적’(purpose), 곧 의미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한 주된 질문은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였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이 인류에게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머리이신 교회가 마찬가지입니다. 원인이 아니라 목적에 날마다 초점을 맞추고 목적을 지향해야 건강한 교회가 됩니다.

얼마 전 국립국학원에서 2004년도 신조어를 정리해 발표하였습니다. 한 해 동안 626개의 새로운 말이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이 가운데는 세태를 반영하는 많은 말들이 있었습니다. ‘삼일절’은 “31세면 절망이다”란 말이랍니다. ‘청백전’은 “청년백수 전성시대”란 말이랍니다. 이런 모든 말은 시대의 아픔이 녹아진 말입니다. 이 시대의 고통을 담은 말들입니다.

모든 게 다 그렇습니다만 교육의 목적이 흐려지면 혼란이 생깁니다. 그것도 미래의 혼란입니다. 당장은 모르지만 장래에는 심각한 사회의 역기능적 현상이 나타날 것입니다. 교육 목적이 경제성장이 아닙니다. 교육목적은 국제경쟁력이 아닙니다. 교육전문가들도 쩔쩔매는데 어떻게 경제 관료가 교육부총리를 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경제논리로 교육을 할 수 있습니까? 교육개방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는데 교육개방이 우리 교육의 최우선 과제입니까? 그 자리에서 대통령은 청년실업은 대학교육 탓이라고 했답니다. 총장 출신 비서실장은 뭘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대학에서 교육을 잘 못시켜서 지금 젊은이들이 취직이 안 됩니까? 이게 혼란의 원인입니다. 목적을 흐려놓으면 혼란은 피치 못하게 절로 올 수밖에 없는 당연한 결과입니다.

요즘 신세대 라이프스타일의 3대 키워드가 뭔지 아십니까? 첫째는 업로드 문화입니다. 게시판에 리플 달고, 미니홈페이지를 만드는 등 적극적 자기표현에 익숙하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네트워크입니다. 정보의 바다인 인터넷 서핑을 하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고, 이것을 가치창조에 활용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감성입니다. 모든 제품 속에 감성을 담아내야 하고, 신세대 소비자의 눈길을 끌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중에 중요한 삶의 의미가 빠진 것 같아요. 삶의 기술은 점점 높아지는데 삶의 본질적 목적은 의미해져 갑니다. 이것이 시대적 혼란입니다. 오피니언리더들이 고뇌해야 할 부분이라고 봅니다.

많은 사람들은 돈이 생의 목적으로 등장합니다. 어느 미국인이 3억 달러 복권에 당첨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도박과 술에 빠지고 각종 소송에 연루되어 완전히 폐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어느 월간지에서 로또 인생을 분석했습니다. 잘 된 사람보다 못된 사람이 더 많을 것입니다. 물질이 목적인 사람은 혼란에 빠집니다. 그 목적은 성취될 수없기 때문이지요. 허탄한 것이 목적일 때는 성취 후에 가장 큰 혼란이 옵니다. 성공 뒤의 실패가 더 무섭습니다. 그래서 ‘삼손 신드롬’이란 책에서는 저자는 강한 자는 조심하라고 합니다. 목적은 영원한 것이어야 합니다. 공동의 선이라는 가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한 목적은 얼마 못갑니다.

동방박사들은 별을 보고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별은 아기께로 인도하는 길잡이였습니다. 목적을 밝히는 인도자였습니다. 그런데 별이 보이지 않자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찾아간 곳에 헤롯궁이었습니다. 목적이 흐려져 궁전에 들어가므로 두 살 이하의 아기들을 죽이는 빌미를 주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피해를 당했습니까? 아인슈타인은 말합니다. “현대는 완벽한 수단에 혼란스러운 목표를 가졌다”. 교회와 우리는 목적이 흐려지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목적은 핵심가치를 의미합니다. 

사도들은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일곱 사람을 세우고 그들로 하여금 구제하는 일을 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가장 중요한 것으로 돌아옵니다. 우선순위를 찾았습니다. 바른 목적으로 회귀하였습니다.

요즘에는 핵심가치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사도들에게 있어서 핵심가치는 말씀과 기도입니다. 그 이상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핵심가치는 목적을 의미합니다. 핵심가치를 찾는 것은 목적을 확실하게 하는 일입니다.

모세의 광야교회의 갈등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모세 스스로가 초래한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모세가 하루 종일 백성들의 소송 사건을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60만 명은 장정만입니다. 모두 합하면 320만 명이라고 합니다. 혼자서 어떻게 320만 명을 다스리겠습니까? 아무리 종일 백성들을 위해 일해도 장인이 와서 볼 때는 선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선한 것은 우선순위를 바로 찾을 때입니다. 목적으로 돌아가는 것이 선한 것입니다. 핵심가치로 돌아가는 것이 선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찾으러 온 무리들을 향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로 나갔더냐?”고 하십니다. 그들이 찾은 목적은 예수님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목적은 바람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옷 입은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목적은 좋은 옷이 아닙니다. 높은 지위의 사람이 아닙니다. 선지자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목적은 선지자보다 나은 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핵심가치를 찾으라고 하십니다. 시대에 따라 변하는 갈대가 아닙니다. 현실적, 가시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핵심가치라고 하지만 사람들의 핵심가치는 변합니다. 한 때는 “잘 살아보세”가 핵심가치였습니다. 빈곤탈피, 경제성장이 최고의 덕이었습니다. 이제 핵심가치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즐겁게 살아보세”가 핵심가치인 것 같습니다. 가치 있게 살자는 관심이 더 큽니다. 삶의 질이 가장 큰 화두입니다. 경제성장보다 경제안정이 더 중요합니다. 테레사수녀가 말한 대로 “물질이 우리의 주인이 되었을 때 우리는 참으로 빈곤한 사람입니다”. 물질이 우리의 핵심가치일 수는 없습니다.

한 때 적수가 없었던 권투 세계 헤비급 챔피언이었던 핵 주먹 마이크 타이슨은 지난 연말 어느 대중잡지 인터뷰에서 “내 인생은 실패작”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은 그가 빚더미 속에서 우울한 심경을 토로하였습니다. 그는 폭식에 의한 비만과 우울증으로 “차라리 죽는게 낫다고 생각을 한다. 하지만 지금 살아 있으니 어떻게든 연명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또 “내가 무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단지 살아있고 음식을 먹을 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번 돈은 3억5천만 달러였습니다. 우리나라 돈으로 약 3천7백억 원이라는 돈을 다 날렸습니다. 지금은 극빈자의 초라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생의 목적을 상실한 결과입니다.

교회의 핵심가치가 무엇입니까? 교회의 목적은 예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변치 않을 것입니다. 교회의 핵심가치는 변함없이 기도, 말씀, 전도, 예배, 봉사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이지 사람과의 관계가 아닙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모세가 사람과의 관계에서 송사문제를 관리하다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관계로 전환하였습니다. 사도들도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에서 말씀과 기도라는 하나님과의 관계로 전환합니다. 이것이 목적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핵심가치를 찾는 일입니다.

“모든 종교의 핵심은 내면의 사적인 체험이며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이다”라고 합니다. 기독교는 관계의 종교입니다. 가장 핵심적인 관계는 그리스도와 맺는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사람과의 관계를 형성해 가는 것입니다.

교회의 핵심가치가 성도의 핵심가치입니다. 우리의 핵심가치도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히브리서 12:1-2에는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합니다. 목적을 혼란하게 하는 것들을 벗어버리고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목적을 찾고 핵심가치로 돌아와야 합니다. 

셋째, 목적을 지향하면 교회가 성장합니다.

목적을 지향했더니 수가 많아졌고, 많은 제사장들도 이 도에 복종하였습니다. 교회성장은 목적을 지향한 결과입니다. 핵심가치를 되찾은 결과입니다. 교회성장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교회성장은 결과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한국교회는 성장지상주의였습니다. 성장이 목적이었고 성장만 바라보았습니다. 이제 성장은 했지만 많은 문제를 복합적으로 안고 있습니다. 교회성장만 외치다가 사회를 외면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사회로부터 외면당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사회에서 교회의 이미지가 얼마나 안 좋은지 모릅니다. 우리교회도 더 성장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외형적인 수적인 성장 보다 교회의 참된 목적을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교회의 목적인 말씀과 기도에 올인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 목적의 결과로 성장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 개인의 삶과 공동체의 삶이 하나님의 목적에서 벗어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목적에서 벗어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목적을 향해 줄기차게 달려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푯대를 향해 열심히 달려가고 있지만 아무도 도착한 사람은 없습니다. 여러분, 포레스트 검프라는 영화를 보셨지요? 아는 것은 달리는 것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남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사랑을 받고 성공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달리는 것만이 아닙니다. 목적이 분명해야 하고 목적을 향해 달려야 합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목적에 굴복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굴복하는 것은 만병통치약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교회의 목적입니다. 교회의 목적은 성도의 목적입니다. 하나님과 교회와 우리의 목적은 언제나 일치합니다. 이 때 교회는 성장하고 우리는 성숙하고 커집니다.

결론  

북미 대초원의 인디언들은 어린 나이에 치러야 하는 비전 찾기(vision-seeking)라는 의식이 있습니다. 무더운 오두막에서 혼자 긴 시간을 보내며, 금식하고 기도하는 의식입니다. 그럼으로써 진정한 삶의 의미와 인생의 목적, 즉 부족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깨달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자신의 전 삶의 목적을 깨닫는 시간입니다.

교회 콘설턴트인 빌 이섬(Easum)이란 분은 교회가 현재의 경영법을 바꾸지 않는다면 향후 30년 내에 기존 교회의 4분의 3이 문을 닫을 것이라고 예측한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좀 다른 표현을 쓰고 싶습니다. 교회가 교회 본래의 목적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향후 30년 내에 기존 교회의 4분의 3이 문을 닫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우리교회가 목적이 이끄는 교회, 목적을 지향적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단지 미래사회에 생존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교회가 교회다운 바른 모습을 되찾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교회가 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교회가 목적이 이끄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목적의식이 분명하고 핵심가치를 분별하는 지혜로운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by 코이네 자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