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사도행전

[사도행전설교]교법사의 지혜, 곽선희 목사 설교

'코이네' 2014. 3. 29. 23:27

사도행전 5장 설교, 교법사의 지혜, 곽선희 목사 설교


 교법사의 지혜(사도행전 5:33~42), 곽선희 목사

본문은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심문을 받고 섰는 베드로와 및 사 도들의 담대한 모습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 현장에 베드로와 요한과 제자들이 서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 재판 받으실 때에 도망갔던 제자들이 이제 용기를 얻어 다시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담대하게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디서 이런 담력이 생겼겠습니까? 사도행전 4장을 보십시오. 베드로와 요한은 말씀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19절)."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이 옳다고 시간마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저들은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보다 더 큰 위안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신다는 것보다 더 큰 용기가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만이 아신다고 하는 사실이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고 거리낀다면 그 사람은 죄인입니다. 세상사람 다 몰라도 좋다, 하나님만 아시면 된다 - 바로 이런 단순한 마음이 무서운 용기의 근본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두 번째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어 나와 함께 하신다고 하는 사실이 용기를 줍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확실하게 분명하게 믿기에 나의 부활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저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생명을 지금 피부로 느끼고 있습니다. 이것은 영원과 만나는 시간입니다. 이제는 죽어도 좋습니다. 죽으면 부활할 것이니까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에 거칠 것이 없습니다. 부활생명을 피부로 체험하는 시간입니다. 여기에서 용기가 비롯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성령충만입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사도들의 마음을 감동시킴으로 부활생명이 믿기는 것입니다.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베드로와 사도들이 핍박 자들을 향하여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32절)". 이 말씀이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을 크게 격분시켰다고 본문은 증거 합니다. 당신들이 메시야를 죽였소, 당신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죄를 범한 것이오, 하고 핍박 자들을 정면으로 정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충격을 받은 저들은 "어찌할꼬"하고 회개해야 마땅했습니다마는 , 회개는커녕 더욱 격분하여 펄펄 뛰었습니다. 이를 갈고 부들부들 떨며 분노했습니다.  분노한 저들의 마음이 사도들을 죽이겠다는 마음으로 굳어지고 있는 순간입니다.

바로 그 때에 가말리엘이라고 하는 바리새인 교법사가 이를 만류하고 나섭니다. 앞에 나아가 지혜로운 말을 합니다. 그런데 이 가말리엘에 대하여 우리가 아는 바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다만 사도 바울이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다는 것은 우리가 다 아는 바입니다.

사도 바울은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입니다. 본래 가말리엘의 제자였습니다. 히브리사람들의 문헌에 보면 힐렐이라고 하는 유명한 율법사가 있습니다. 많은 문헌에 그의 모습이 실려 있습니다. 「탈무드」에도 그가 한 말이 많이 있습니다. 온 민족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유명한 랍비 힐렐의 손자가 바로 가말리엘입니다. 그 역시 힐렐 만큼이나 유명한 사람입니다. '율법의 영광'이라고 하는 별명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는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좀더 높이기 위하여 라반이라고 불렀다 합니다. 그가 죽었을 때에 사람들은 '율법의 영광은 갔고, 그 정결과 성결도 죽었도다'라고 기록하였다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사도 바울의 스승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전설에 따르면 그가 말년에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합니다마는, 그 역사적 근거는 희박합니다. 어쨌든 가말리엘은 당시 대단히 존경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가말리엘은 "이스라엘사람들아"라는 말로 말문을 엽니다. 먼저 선민의 긍지를 저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택함 받은 백성입니다. 그러니 소홀히 처신해서는 안될 것입니다'하는 의식을 깨우쳐 주고저 한 것 같습니다.


이어서 그는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자랑하매(36절)"라 고 역사적인 예를 들어 말합니다. 이것은 히브리적 방법입니다. 히브리사람들은 추상적 이론으로 설명하지 않고, 언제나 역사적 사건으로 설명을 합니다.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사실을 들어서 설명하는 것이 이스라엘사람들의 특징입니다.

가말리엘이 오늘의 본문말씀 에서 예로 들고 있는 역사적 사건은 두 가지입니다.  바로 드다라고 하는 사람에 관한 역사적 사건과 
유다를 들고 있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그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로마에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유다 역시 결국은 잡혀서 죽었습니다. 그가 죽고 나니 그 무리들이 다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이 두 사건에서 보는 대로 주동자가 없어지는 순간에 추종자들이 조용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생각해보십시다. 이러한 생각에서 가말리엘은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에 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38, 39절)"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면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이 되고, 이것이 사람들의 광적인 운동이요 인간적인 조작으로 이루어진 운동이라면 이제는 없어질 때가 되었으니 조용히 기다려도 답답할 것이 없지 않느냐, 그대로 내버려두자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먼저 이 일은 하나님의 섭리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자는 것입니다. 이 일이 하나님께로서 난 것이면 막을 길이 없을 것이요, 사람에게서 난 것이면 저절로 없어질 것이 아니냐, 없어질 때가 되었으나 두고보자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 말에는 만일 우리가 이 일을 임의적으로 대하다가는 하나님을 대항하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고 하는 걱정스러움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어찌 보면 기회주의적인 발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가말리엘은 지금 뒤로 물러서서 두고보자, 하나님의 섭리 에 맡기자, 굳이 우리 손을 대지 말자, 하는 아주 지혜로운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가말리엘은 지금 저들이 무척 흥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여러분, 무슨 일이든 흥분된 가운데서 처리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또한 피해의식에 매여 일을 처리하면 더욱 큰 실수에 빠지게 됩니다. 지금 저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죽이자 살리자 하는 것은 심리학적으로 보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데 대한 가책 때문입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이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버렸습니다. 그것이 잘한 것으로 인정되어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잘한 짓이 아닙니다. 더욱이 오늘의 되어지는 사건을 보니 정말로 잘못한 것 같습니다. 이제라도 바른 자세를 취하고자 한다면 회개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저들에게는 회개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바로 그 가책의식이 역작용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을 없이하겠노라 하게 된 것입니다.

심리학적으로 똑같이 적용되는 이야기가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도 바울이 사울일 때에 스데반을 돌로 쳐죽인 일입니다. 이에 대하여 어떤 분이 심리학적으로 연구해서 박사논문을 썼는데 그것을 제가 읽어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사울일 때에 스데반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큰 고민이 생겼습니다. 보십시오. 천하에 용서할 수 없는 죄인이, 마땅히 죽어야 할 죄인이 죽는데 그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았습니다. 이것이 사울에게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더구나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죽이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참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아마 사울은 제대로 잠도 못 잤을 것입니다.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스데반은 의인이다 하는 생각과 함께 아니다 죽어 마땅한 놈이다 하는 생각이 대립되어 있었습니다. 만일 그가 의인이면 사울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의인을 죽인 죄를 범한 것이 되고 맙니다. 이 갈등 때문에 절반은 미쳤다는 것입니다. 미치지 않고야 다메섹까지 왜 가려 했겠습니까? 다메섹까지 피난간 사람들을 잡아다가 죽이겠다고 하는 극악한 마음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심리적으로 그 마음속에 내가 한 일이 잘못이었다고 하는 가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역작용으로 나타나서 더욱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 가말리엘은 '지금은 때가 아니다, 이 문제는 그렇게 처리할 것이 아니다. 그러니 흥분을 가라앉히고 냉정을 찾아라'하고 저들에게 충고합니다. 저들은 가말리엘의 말을 듣고 냉정을 찾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옳다 그르다 하고 그 당장에 다툴 것이 아닙니다. '하룻밤만 자고 내일 다시 만납시다, 일주일 뒤에 다시 만나 좀더 기도해보고 만납시다'하고 흥분을 가라앉힐 줄 알아야 합니다. 당장 그 자리에서 판단을 해버리는 순간, 지위로부터 멀어진 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흥분을 멈추어야 합니다. 바로 이 흥분된 자세가 문제입니다. 이 피해의식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시각 가말리엘은 '냉정하십시다. 지금은 냉정을 찾아야 할 시간입니다. 객관적 진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시간입니다'하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가말리엘은 저들에게 역사적 의식을 가질 것을 권유합니다. 역사가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과거에 되어졌던 일들을 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 이렇게 흥분할 것이 아니라고 말하게 됩니다.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교법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34절)……" 가말리엘이 아주 지혜로운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가말리엘은 베드로와 요한을 밖으로 내 보낸 연후에 저들에게 말을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자유롭게 의견을 주고받으려는 의도에서였습니다. 베드로와 및 사도들이 서있는 그 앞에서 대제사장이 어떻게 '가말리엘 당신 말이 옳소'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잘못한 것 같소'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일대 일로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조용한 충고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공개적으로 여러 사람 앞에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가말리엘은 또 한번 냉정을 찾는 비결로 사도들을 나가라 해놓고 자기들끼리만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순간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아이들 앞에서 부부싸움 하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나 형 앞에서 동생을 나무라도 안되고, 동생 앞에서 형을 때려서도 안됩니다. 그리고 때리면서 '너는 왜 동생만 못하냐'하고 꾸중해서도 안됩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어떤 교훈도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보십시오. 오늘 가말리엘이 지혜롭게 행합니다. 먼저 사도들을 나가게 한 뒤에 감정을 가라앉히고 냉정을 되찾아서 말하게 합니다.

그런가하면 가말리엘은 소극적인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아주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면이 있었습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나느니라(마 5: 37)"라고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Yes면 Yes, No면 No 요, 옳으면 옳고 그리면 그른 것입니다. 두고 보자니요.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이것은 올바르지 못한 자세입니다. 분명하지 못합니다.

본문말씀 말미에 참으로 감동적인 말씀이 있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41절)."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매를 맞고 좋아합니다. 예수 이름으로 매맞았으니까요.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이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라는 사도 바울의 말씀대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몸에 채우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이요, 이로써 하늘의 영광이 있는 것을 알기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 5 :10)"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기에 저들은 매맞고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 나라에 마포삼열이라는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그 아들 마포삼랑 목사님도 우리 나라에 와서 일생을 한국교회를 위하여 수고했습니다. 그런데 마포삼열 목사님의 얼굴에는 큰 활자국 같은 흉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노방전도를 할 때에 어느 술 취한 사람이 술병을 깨뜨려서 던졌는데 그것이 그대로 얼굴에 맞아 생긴 상처였습니다. 옛날에는 수술하는 재주가 좋지 않아서였든지 사진에도 확연히 드러날 정도로 큰 상처를 남기고 말았습니다. 목사님은 그 때에 자신에게 병을 던진 사람을 용서함으로 결국 그 사람은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보기 흉한 이 상처가 오히려 선교활동을 하는 데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그 목사님이 어디 가서 설교를 하거나 헌금을 거둘 때에는 으레 성황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상처한번 보고 모두가 눈물을 흘리면서 감격했다고 합니다. 그 상처가 훈장이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몸에 그리스도의 흔적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감상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몸에 상처가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예수님을 위하여 어느 한쪽이 뚝 떨어져나간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희생한 흔적이 전혀 없으면서 어찌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매맞고 능욕 받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영광으로 여겼다고 말씀합니다. 이어서 본문은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42절)"라고 말씀합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가르치기를, 전도하기를 쉬지 않고 더욱 열심히 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말씀입니까?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도들은 방금 매를 맞고 나와서, 그 위험을 알면서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고 증거하기를 쉬지 아니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참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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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이네 자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