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고린도서

[고전3:1] 교회의 분열과 미성숙한 그리스도인

'코이네' 2016. 4. 13. 15:33

 

분파주의-미성숙의 증거

 

본 문 : 고전 3:1-9

 

 

I. 본문번역

 

1 형제들이여, 내가 영적인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처럼 여러분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적인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처럼, 즉 그리스도안에서 어린 아이에게 말하는 것처럼 말했습니다.

2 나는 여러분에게 젖을 먹였지 밥을 먹인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그때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3 여러분은 아직도 육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여러분이 육적인 사람이 아니며, 사람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4 어떤 이는 "나는 바울파다"라고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파다"라고 주장한다면 여러분은 인간적일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5 그러므로 아볼로는 무엇이고, 바울은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을 믿게 한 사역자들입니다. 주께서 각자에게 주신대로 했을 뿐입니다.

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고, 하나님은 자라게 하셨습니다. 7 그러므로 심는자나 물주는자가 아무것도 아니고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 없습니다.

8 심는자와 물주는 자가 하나이며, 각각 일한 만큼의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요, 여러분은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II. 본문의 역사적 상황

 

고린도전서 1장 부터 4장에 나타나는 고린도 교회의 상황은 분파주의로 규정될 수 있다. 고린도 전서 1장 12절에 의하면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이러한 분파는 지도자의 이름을 따르고 있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고린도인들의 신비주의적 열광주의에 기초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바울파가 생기게 된 것은 그가 그 교회의 개척자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다. 이것을 통해서 고린도 교회에서는 바울반대자들의 그룹이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고린도 전서의 다른 부분에서는 이러한 반대자를 대상으로 바울이 논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볼로파에 대해서는 본문에서 분명한 실체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나름대로의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볼로에 대해서는 사도행전의 누가의 해석을 빌면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자"(행18:26)라고 알려져 있다. 여기서 학문이 많다(로기오스)는 것은 말에 능하다는 의미이다. 바울이 설교에 있어서 그다지 좋은 평판을 받지 못하던 상태에서(고후10:10) 말에 능했던 아볼로의 영향력은 짐작해 볼만하다. 그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 의해 교육을 받고 고린도지방을 방문했기 때문에 바울이 없는 고린도 교회 내에서 지지자들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게바파에 관련해서는 베드로가 고린도에 직접 개입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그가 오지 않았다고 해서 고린도에 그의 영향이 미진했다고 볼 수 는 없다. 베드로는 이미 모든 교회에서 지도적인 위치를 인정받았다고 볼 수 있고, 역사적 예수의 직사도 계열의 수장으로써 항상 바울의 사역에 긴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갈라디아 교회의 긴장도 사실상 베드로의 태도에 영향을 받은바 있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도 비록 그가 직접 개입하지 않았더라도 그의 영향이 존재하여 바울에게 항상 위협이 될 수 있는 여지는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파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지도자의 이름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많다. 만일 이것을 하나의 독립된 분파로 본다면 그리스도를 헬라적인 신인사상에 의해서 파악한 신자들이 자기 나름대로 파를 결성한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겠다.

 

이러한 모든 고린도 교회의 분파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세력권으로 나누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그들은 고린도 교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자신들의 에토스에 의해서 복음을 해석하였고 그 해석의 차이가 그들의 분쟁을 가속화 시켰을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고린도 교인들의 에토스를 복원하는 여러 가설들이 있어왔다. 영지주의적인 가설이 그동안 상당한 지지를 얻어왔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오히려 당시의 철학적 학파의 영향을 중요하게 보아야 한다고 본다. 특히 스토아 학파와 견유학파의 영향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고린도 전서의 경우 쾌락주의적 견유학파의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다. 고린도 교인들은 지혜를 내세우면서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다고 본다. 그들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보면서 이러한 종교적 배경을 가지고 바울이 전파한 자유를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쾌락주의적 자유주의가 성령의 열광주의적 상황에 혼합되면서 고린도 교회에는 어지러울 정도로 많은 분쟁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III. 본문의 문학적 접근

 

고린도 전서는 크게 두개의 부분으로 나뉘어 지고 있다. 앞부분(1-6장)은 주로 글로에에 의해서 제기된 문제를 다루고 있고 뒷부분(7-15장)은 고린도 교회가 바울에게 편지에서 제기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우리의 본문은 전반부에 속해 있기 때문에 주로 분파의 문제의 맥락을 가지고 있다. 분파와 관련된 주제는 1-4장의 대세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분파의 주제로 4장까지의 맥락을 훑어보는 것이 좋겠다.

 

1장1절-9절의 서언을 지나 1장 10절 부터는 고린도 교회의 분파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다. 17절 까지 분파의 문제를 주로 세례와 관련하여 진술하고 있다. 아마도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가 하는 점이 분파를 결정짓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장 18절 부터 31절 까지는 십자가의 신학으로 소위 고린도 교인들의 지혜를 반격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2장1-5절에서는 계속해서 고린도 교회의 지혜를 십자가의 능력과 대비시켜서 이야기하면서, 6-16절 까지는 참된 지혜의 의미를 밝히고 자연인(프쉬키코스)과 영적인 인간(프뉴마티코스)을 구분하여 말하고 있다.

3장 1-9절은 다시금 분파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 10-17절은 건물의 비유를 가지고 이야기를 전개한다. 바울이 닦은 터 위에 누구든지 세울 수는 있으나 어떻게 세우는가가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 사람의 지혜로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18-23절은 바울, 아볼로, 게바나 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시킨다. 이것이 사실은 바울이 분파문제의 해결을 위한 신학적 논지이다.

 

4장1-5절에서는 바울이 결코 고린도 교인들에 의해서 판단받을 수 없다는 것을 밝히면서 6-13절에서는 지도자들과 고린도 교인간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를 말하고 있다. 14-21절에서는 지도자로서의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고 있다. 그는 지도자로서의 단호함을 보이면서 다시금 고린도 교회의 개척자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확보하려하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오늘본문의 앞뒤문맥은 고린도 교회의 분파와 지도력의 주제가 흐르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정당하다. 따라서 본문은 그러한 주요 흐름 위에서 구체적으로 바울이 분파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의 각도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IV. 본문주석

 

< 1 >

 

형제들이여, 내가 영적인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 처럼 여러분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적인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처럼, 즉 그리스도안에서 어린 아이에게 말하는 것처럼 말했습니다.

 

이 구절의 주석에서 주된 이슈는 영적인 사람들(프뉴마티코이스)과 육적인 사람들(사르키노이스)이 무엇을 의미하는 가를 밝히는 일이다. 분명한 것은 육적인 사람이 비 그리스도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바울은 분명히 육적인 사람을 이야기하면서 그리스도안에서 어린아이라는 표현으로 한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표현은 그리스도인을 지칭하는 두개의 다른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영적인 사람은 성령주의적인 혹은 신적인 어떤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고 육적인 사람은 육체적 쾌락을 탐하는 타락하는 사람이라는 이해도 적절치 않다. 바울이 여기서 영적인 사람은 좋은 사람이고 육적인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고 하는 가치체계를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다만 성숙의 각도에서 신앙적으로 성숙한 사람과 아직은 어린아이의 단계에 있는 사람의 차이를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 2 >

 

나는 여러분에게 젖을 먹였지 밥을 먹인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그때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바울은 2절에서 성숙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고린도 교인들이 아직은 어린아이 였기 때문에 젖을 먹였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서 바울은 편지를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그들이 아직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했다고 판단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그들이 분파주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 3 >

 

여러분은 아직도 육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여러분이 육적인 사람이 아니며, 사람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고린도 교인들이 아직 성숙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육적인 사람들(사르키코이)인 것이다. 이것은 그들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다는 사실로 입증된다. 바울은 또한 여기서 육적인 사람을 부연해서 설명하는 데 그 사람의 삶의 형태는 사람을 따라 사는 것(카타 안드로폰 페리파테이테)이라고 본다. 즉 사람을 따라 사는 것, 즉 지도자에 의존해서 파를 형성하는 삶의 형태를 가진 사람들은 아직도 성숙하지 못한 신자인 것이다.

 

< 4 >

 

어떤 이는 "나는 바울파다"라고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파다"라고 주장한다면 여러분은 인간적일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4절에서는 "인간적일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우크 안드로포이 에스테)를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중요하다. 영지주의적인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 고린도 교인들은 영지주의적인 신인사상의 영향을 받아서 그들이 신적인 상태에 도달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의 분파주의적 행태를 보고 그들은 상태는 신적 상태가 아니라 인간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다 더 합리적인 해석은 지금까지의 성숙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당파적 입장을 추구하는 것은 고린도인들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인간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을 부각시킨 것이다. 이런점에서 고린도 교인은 아직도 신앙적으로 성숙한 것이 아닌 것이다.

 

< 5 >

 

그러므로 아볼로는 무엇이고, 바울은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을 믿게한 사역자들입니다. 주께서 각자에게 주신대로 했을 뿐입니다.

아볼로나 바울이나 지도자가 누구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들은 다만 사역자(디아코노이)일 따름이다. 여기서 사역자는 집사들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교회의 직분이 정형화되지 않은 초기단계이므로 단순한 사역자로 표기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볼로나 바울이나 단지 주께서 각자에게 시키신 일을 했을 따름이며 이것으로 인해서 지도자 자체가 추앙을 받거나 분파주의로 흐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 6 >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고, 하나님은 자라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사역자들의 역할 분담을 이야기한다. 바울은 심었을 따름이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는데 실제적으로 중요한 것은 누가 성장시키느냐 하는 점인 것이다. 하나님이 성장을 주도하시는 것이다. 6절에서 성장을 하나님과 관련시킴으로써 바울이 본문에서 성장의 주제를 중요하게 보고 있다는 것을 다시 확인시켜주고 있다.

 

< 7 >

 

그러므로 심는자나 물주는자가 아무것도 아니고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 없습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하나님 중심성을 강조하고 있다. 누가 심느냐 누가 물을 주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누가 무엇을 하든지 사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 8 >

 

심는자와 물주는 자가 하나이며, 각각 일한 만큼의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유대교적인 보상의 신학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바울이 말하고 싶은 것은 심는자와 물주는 자가 각각 독특한 어떤 영역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을 반박하는 것이다. 어떤 것은 중요하고 더 가치있고, 다른 어떤 것은 하찮은 것이 아니라 각자가 동등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고 있다. 따라서 하는 일의 역할에 따라서 누구는 뛰어나고, 누구는 그 보다

못하다는 평가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 9 >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요, 여러분은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인들이 파당을 결성할 만큼 바울과 아볼로가 서로 경쟁적인 지도자는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더우기 적대자도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그들은 다 같은 하나님의 동역자인 것이다. 고린도인들은 하나님의 밭으로서 바울과 아볼로가 땀을 흘려 경작하는 터인 것이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집으로서 지도자들이 협력하여 세워가야 할 건축물인 것이다. 그러므로 지도자들을 따라서 파당을 형성하는 것은 그 지도자의 의도와는 다른 것이다.

 

V. 메시지

 

본문에서 바울이 주장하는 논지는 다음과 같다. 분파주의는 신앙이 미성숙하다는 증거다. 분파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간중심(지도자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신앙생활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상황도 고린도 교회의 상황에 못지 않게 파당의 문제가 존재한다. 많은 교회들이 서로 연합되지 못하고 갈등하고 분리되어 나가고 있다. 그래서 사회로부터 비난을 받고 심지어 공권력의 힘을 입어서 문제 해결을 시도하려는 경우도 있다. 이와같은 교회의 분열, 교단의 분열도 사실상 신학적인 문제라기 보다는 지도자의 문제, 혹은 교인들의 파당적 성향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분파적 성향은 성장의 관점에서 볼 때 아직도 어린아이의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1세기가 넘은 상당한 세월을 흘려 보냈으면서도 아직도 교회일치의 모습을 보이지 못한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인 것이다.

 

참된 성숙은 자기와 다른 신앙의 유형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에 있다. 공동체가 유기적으로 살아 움직이기 위해서는 각자의 역할을 인정하고 서로를 용납하며 인간중심적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적으로 생활할 때만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본문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소위 영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육적인 사람을 용납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신앙적 입장이 중요한 만큼 다른 사람의 신앙적 입장도 중요하다. 자신의 것만이 옳다고 고집하고 주장할 때 교회일치는 요원한 것이고 공동체의 연합도 있을 수 없다.

 

여기서 또 한가지 주의깊게 보아야 할 점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분파의 문제를 지도자의 문제에서 신앙성숙의 문제로 전이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파가 갈려지는 것은 지도자에게도 문제가 있지만, 그보다는 신자들이 얼마만큼 건실하게 성숙되어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아볼로나 게바를 공격하거나 자신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방법으로 파벌의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라 성도들에게 참된 성숙의 의미를 깨우쳐 줌으로써 공동체의 연합을 모색하고 있다.

 

오늘날의 교회의 일치를 방해하는 것은 신학이나 외적 요인에 있다기 보다는 지도자의 기득권 확보나 신자들의 이기적인 당파적 욕심에 의한 경우가 많다. 따라서 참된 교회 일치는 모든 신자들이 십자가의 신학으로 돌아가서 먼저 다른 사람의 종이 되기 위한 삶을 추구하는 성숙한 상태에 이를 때 만이 가능한 것이다.

 


by 코이네자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