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자료

[고난주간]가상칠언2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코이네' 2016. 3. 19. 17:03

십자가 7언중 2언(눅23:39-43)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른편 강도를 향하여 구원을 선포 하신 역사적 사실입니다.

오른편 강도에 대한 구원은 우리들 모두 대상으로 한 죄인에 대한 구원의 선포나 다름이 없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서 사는 영혼은 참으로 행복한 영혼입니다.

무한한 기쁨과 평안, 그리고 희락이 그곳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일시적인 감정적인 것에 치우쳐서 인정으로 하신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오른편 강도와 왼편강도가 서로 주고받는 말을 쭉-- 다 들었습니다. 그 내용이 누가복음 23장 39절부터 42절까지 나왔습니다. 듣고 나서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오른편 강도의 회개하는 심정을 충분히 십자가 위에서 이해하셨습니다.

그 괴로운 아픔 속에서 강도끼리 대화하는 내용을 다 들으실 정도로 사랑이 있으셨습니다. 아프면 옆사람이 하는 말도 잘 안들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강도끼리의 대화를 들으셨던 것입니다.

 

사람들끼리의 대화 가운데 예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 대화를 주의해야 합니다. 기도만 듣고 계신분이 아니라, 대화까지 듣고 계십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하지만 새도 쥐도 듣지 못하는 말을 물론 그 생각까지도 듣고 알고 계십니다.

 

죄를 지은 강도로서 죽어가는 고통속에서 주님께 기도한 오른편 강도의 기도내용은 이렇습니다.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가 임하실 때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간절한 부탁이였습니다.

비록 강도로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리기는 했어도, 그의 밑바탕에 흐르는 신앙은 대단했던 모양입니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나라”라는 뜻을 로마압제하에서 해방되는 지상나라로 생각을 했는데 오른편 강도는 “나라”를 네세에서 누릴 나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 오른편 강도가 지상나라로 생각을 했었다면 “당신의 나라가 임하실 때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부탁했었겠느냐?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 간절한 간구와 그 심령을 통찰하시고 그를 긍휼히 여기사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선포를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을 보시고 판단하신 후 상급을 주셔도 주시는 분이시지 결코 어떤 외식적인 것에 의해서, 순간적인 판단이나 인정에 의해서 상을 주시거나 선포하시는 예수님이 아닙니다.

 

최후의 순간까지도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넓은 사랑을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탕자의 아버지는 탕자가 돌아오기를 끝까지 기다렸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줄 압니다.

세상에서도 자식이 방황하더라도 그 자식이 끝까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심정은 탕자의 아버지와 똑같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자식이 가출한 부모의 심정은 희망을 버리지 아니하고,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온다는 생각을 다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죽음이라는 최후의 순간까지 닥아온 오른편 강도, 죽기 직전 회개한 강도, 그는 참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알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이름까지 부를 정도로 주님을 이해하고 있었는가?하는 것입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가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오른편강도의 한 마디는 역사상에 가장 위대한 기도입니다.

강도는 기도 한마디에 낙원에 들어가는 축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강도가 말한 그 네가지 내용은 다음에 별도로 말씀들릴 기회를 갖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른편 강도를 건져준 사실에 대해 몇가지 교훈을 말씀드릴려고 합니다.

 

1. 십자가는 우리들의 영혼의 거처를 결정해 주는 내용이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지 않으셨다면 낙원이 어디 있으며 천국이 어디 있으며 왕국이 어디 있습니까?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은 십자가의 보혈과 그 사랑의 힘이 아니고는 낙원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이 불가능함을 가르쳐 주는 줄 믿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에 “낙원”이라는 용어를 십자가 위에서 강도에게 하신 말씀, 단 한번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떤 곳에서 어떤 용어를 사용하셨느냐?에 따라서 그 내용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십자가위에서 낙원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셨다는 것은 십자가의 능력이 아니고는 낙원이 주어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2. 죽어가는 강도에게 한가닥 소망의 빛이 비추었습니다.

 

아니 소망의 빛이라고 표현하기 보다는 생명의 빛이였다고 봅니다.

죽어가는 자리에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것만큼 큰 위로가 되는 것이 어디있겠는가? 말입니다.

두려운 죽음의 자리에서 두려움이 사라지게 하고 기쁨을 가져다 줄 만한 소식입니다.

사람들은 죽으면 먼저 천국으로 직행하는 줄로 알고 계신 분들이 많이 있지만 사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천국에 가기전에 먼저 낙원에 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주님이 예비하신 나라 낙원에 가기 위해서는 강도처럼 십자가 중심으로 한 진정한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구름 타고 다시 오시는 예수님이 구원받으실 여러분들을 어디로 이끌어 가실 것으로 생각하고 계십니까?

그 곳은 바로 예수님이 예비하신 낙원입니다.

 

3. 예수님의 판단에 의한 그의 거룩한 선포가 있어야만 낙원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의로운 재판관이 되십니다.

구원을 받느냐? 받지 못하느냐? 하는 것은 예수님의 심판 여하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오른편 강도에게 구원을 선포한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중심으로 한 거룩한 판단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4. 예수님의 이 두번째 외침을 통하여 낙원은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는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나와 함께”라는 말이 낙원은 주님이 항상 함께 계신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헬라어 원어적으로 볼 때 낙원은 천국이라는 용어와 다르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천국은 “바실레이아”로 나와 있는데 낙원은 “파라데이소스”로 나와 있습니다. 이 원어가 다른 이유는 각각 다른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이 지상에서는 실제적인 예수와 동행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성령으로 오신 보이지 아니하시는 예수님과 동행하는 믿음을 소유할 뿐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곁에 계실지라도 나는 때로는 에수님이 옆에 안계신 것처럼 살아 가고 있습니다.

 

“사랑과 영혼”이라는 영화에서 죽어서 영혼이 사랑하는 애인 옆에 있어도 그 애인이 알지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죽은 영혼은 그 애인의 언행을 다 보고 듣고 하여도 육신을 가진 여자 애인은 죽은 영혼을 전혀 볼 수 없었습니다.

 

이제 주님이 오실 때 먼저 낙원으로 이끌어 올리실 것입니다.

이단 여호와 증인이 말하는 이 지구위에 나타나는 현실적인 낙원이 아니라, 장차 도래할 새로운 낙원입니다.

사실, 낙원도 하나님의 나라요 천국도 하나님의 나라요 왕국도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떠한 모양으로, 어느 곳에 나타나고 도래하는냐에 따라서, 그 나라의 명칭도 달라질 것이지만 모두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라는 입장에서는 동일합니다.

영이 있고, 혼이 있고, 몸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도 영을 중심으로 들어가는 나라, 혼을 중심으로 들어 가는 나라, 육을 중심으로 들어가는 나라가 있습니다.

그러나 육을 중심으로 들어가는 나라라고 해서 전혀 영혼을 배제해 버리는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5.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말씀은 주 예수께서 낙원의 주인임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주 예수님은 낙원의 열쇠도, 천국의 열쇠도 모두 소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에 있는 말씀대로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면 열자가 없는 그런 문을 통과 해야 들어 갈 수 있는 곳 입니다.

낙원의 주인이시기때문에 오른편 강도에게 낙원에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요! 남의 집에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6.십자가는 개인 구원을 중시여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장 큰 죄인이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짧은 한마디의 기도로 구원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게 해주시겠다”는 것은 구원의 주 예수 그리스도임을 확증하는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와 주님의 관계는 개인적인 만남을 통한 구원의 길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은 개개인 한사람, 한사람의 심령을 귀중히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들 모두의 관계는 개인적인 관계가 아니라 공동적인 관계입니다.

개인적인 관계와 공동적인 만남 이 두가지는 사실 모두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은 강도의 말한마디를 본 받아야 합니다.

강도의 한 짓은 본 받지말고, 강도의 짧은 기도 한마디는 본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들 모두가 천년 낙원에 들어가시고, 또한 영생 낙원에 들어가게 되는 축복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원합니다.

 

나 진균 목사 설교작성(1991년 3월 21일)

 



by 코이네자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