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디모데

[디모데전서4장] 경건 생활에 힘쓰자 / 이동원 목사

'코이네' 2015. 12. 1. 23:30

경건 생활에 힘쓰자

/ 딤전4:6-16

/ 이동원 목사

 

하나님 앞에 인정받고 사람 앞에 존경받는 믿음의 선진들을 보면 의로운 자였고 하나님 앞에서는 경건한 자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졌고 또 사람들과 바른 관계를 가졌습니다. 이 둘은 언제나 병행되어야 합니다. ‘경건한 생활이’란 바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사는 생활을 말합니다.

 

경건이란 바로 성도의 생활 태도요, 생활 양식 입니다. 어떤 분은 말하기를 ‘경건은 사상과 생활에 하나님이 차지하셔야 할 장소를 제공하는 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앙생활의 내적인 면이 외부 행동으로 나타남을 말하고 있습니다.

딤전2:2절에 보면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경건과 단정’은 신앙생활의 양면으로써 ‘경건’은 특히 하나님에 대하여 거룩한 생활이고 ‘단정’은 사람에 대한 방정한 처신입니다.

 

그러므로 의롭지 못하고 단정하지 못한 생활은 성도의 건전한 신덕을 무너뜨리고 맙니다. 그러나 의롭고 단정한 생활은 성도의 경건에 큰 유익이 됩니다.

오늘날 성도라고 하는 경건의 이름은 가지고 있지만 참 경건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딤후3:5절에서 권면 하기를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에 나타난 경건의 의미를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1). 경건은 특별한 성도의 신앙생활 태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헬라 원어에 ‘유세베이아’라는 경건의 의미는 어떤 이상이나, 이념이나, 개념이 아니라 하나의 생활 태도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창조주 하나님과 만민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와 감격의 모습을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밀레의 만종이라는 유명한 그림이 있습니다. 그 그림을 보면 경건한 부부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두 분은 하루의 농사일을 마치고 어두워 가는 황혼에, 서로 마주서서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저 멀리 교회의 종소리가 들려 옵니다. 하루의 삶을 돌이켜볼 때에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들은 두 손을 모두고 고요히 머리를 숙이고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얼마나 성스럽고, 평화스러운 모습인지 모릅니다. 이것이 바로 경건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경건’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은혜에 감사하는 모습입니다.

 

(2). 구약에 나타난 경건의 의미는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총애를 받은 자를 의미합니다.

시4:3절에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경건한 자’라고 하는 히브리 원어의 뜻은 ‘총애를 받는 자’란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 입니다.

그러므로 ‘경건’은 인간의 어떤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인 의미에서 본래 인간은 불 경건하고 타락한 죄인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특별히 사랑 하사 ‘믿음으로 의롭게 하시는 놀라운 은혜’를 입혀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지극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며, 감격하는 성도의 생활 태도가 바로 경건입니다. 그러므로 ‘경건’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증표가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충실한 자를 의미합니다.

시12:1절에 보면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가 인생 중에 없어지도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경건한 자란 충실한 자를 말합니다. 인격이 견실하여 실뢰할 만한 자를 말합니다. 진실하고, 믿음직스러운 신덕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 진실하지 못하고 충직하지 못하다면 이미 경건은 상실하고 만 것입니다.

 

(3). 깨끗하고 성결한 생활을 말합니다.

딛1:1절 나타난 ‘셈누-스’라는 경건의 뜻은 절제의 생활을 통한 깨끗하고 고상한 생활을 통해서 나타나는 영적 권위를 말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무디 선생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가 하루는 이발소에 들어갔습니다. 잡담과 농담으로 좀 소란하였습니다. 그러나 무디 선생님이 들어오는 순간 그 모습을 보고 그들 자신도 모르게 조용해진 것입니다.

 

이것 바로 경건의 영적 권위입니다. 성도의 권위는 지식도 아니오, 지위도 아니오,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경건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있어서 경건을 빼 버린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신자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경건은 믿음의 열매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열매를 보아서 그 나무를 알 수 있듯이 경건을 보아서 성도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경건한 신자가 될 수 있습니까?

1. 신본 주의의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경건은 자기 중심의 생활이 아니고 하나님 중심의 생활에서 나타나는 은혜요 축복입니다. 나 중심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삶을 말합니다. 하나님 중심의 생활이란 자기 부정을 말합니다. 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나를 주장하고 나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여기에 바로 경건의 은혜가 임합니다.

 

마16:24절에 보면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고전15:23절에는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나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하였습니다. 내 중심으로 살면 하나님의 은혜를 욕되게 할뿐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능력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죽으면 죽을 수록, 겸손하면 겸손할 수록 경건은 능력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히11:24-26절에 보면,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써 얼마든지 누릴 수 있는 부귀영화 모든 권세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받기를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중심의 신앙입니다. 이러한 자에게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가 임합니다. 경건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그와 힘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이 바로 경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자를 오늘도 귀히 사용하시며, 은혜와 복으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2. 사랑으로 일해야 합니다.

약1:27절에 보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로써 그 은혜에 감사하여 보은의 심정을 가지고 어려움을 당한 자들을 돌아보는 사랑의 행위가 바로 경건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없는 경건이란 없습니다. 반드시 경건은 사랑 가운데 나타납니다. 여기서 ‘돌아본다’고 하는 말은 물질만을 가지고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곧 생명의 말씀, 위로의 말씀, 소망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일하며, 사랑으로 돌보며, 사랑으로 전도하는 그 자체가 바로 경건 생활입니다.

 

3. 성결에 힘써야 합니다.

약1:27절 하반 절에 보면 “......경건은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깨끗하고 정결한 생활이며, 세상 죄악과 타협하지 않는 생활을 말합니다. 딤전6:11절에 보면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이것들이 무엇입니까?

 

모든 탐심과 더러운 것을 말합니다. 믿음과 사랑이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의와 경건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의없는 경건은 위선이고, 경건 없는 의는 죽은 나무의 꽃과 같은 것입니다. 경건은 하나님을 경외함이니 의의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의한 곳에 경건이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진실하고, 의롭고, 선한 일에 경건의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물들지 않는다”는 원어의 뜻은 ‘비난에서 벗어난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비난받지 않는 행동을 하라는 말입니다. 왜 오늘날 성도라고 하면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습니까? 성도가 경건한 생활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이 은혜와 사랑이 충만하여 경건의 능력이 나타날 때에 세상 사람들로 부터 오히려 칭송과 존경을 받게 되었습니다.

 

4.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눅2:25절에 보면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시므온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였습니다. 다시 말하다 예수님을 사모하면서 기다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는 주님을 사모는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모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은혜와 복을 주십니다. 은혜를 받을 때에 경건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기다리고 사모하는 신앙의 사람은 예배에 정성을 다합니다. 기도와 봉사에 힘씁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며 전도에 힘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경건입니다. 오늘날 성도들 가운데도 보면 기다릴 가치도 별로 없는 것을 열심히 기다리고 찾고 있는 분도 있습니다. 주식 값이 얼마나 오를까? 땅값이 얼마나 내릴까? 그저 눈만 뜨면 세상 생각뿐입니다. 여기에는 은혜도 없고 경건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초라한 모습이 되고 맙니다. 정말로 불행한 일이올시다.

 

경건한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다 기도의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눅2:37절에 보면 “과부 된지 팔십 사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이렇게 안나라고 하는 선지자도 기도에 힘썼습니다. 기도 없이 은혜 없고 은혜 없이 경건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경건한 자를 찾아 교회의 복된 일군으로 세우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경건한 자의 유익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고넬료의 가정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경건한 자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이 세상에 살면서도 신령한 복과 땅의 기름지고 풍성한 복을 받아 선한 사업에 부한 자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경건한 자에게 주시는 은혜와 복입니다. 그뿐입니까? 시므온과 같이 평안하고 만족한 삶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눅2:29절에 보면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 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제 죽어도 한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정말 복 있는 사람입니다. 경건한 사람은 항상 겸손하게 생각합니다. ‘내 노력과 수고 보다 주어진 것이 너무 많고 거저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너무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자가 바로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불행한 사람은 ‘내가 수고 한 것보다 대우도 적고 모든 것이 적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말하기를 ‘이제 이렇게 죽는다면 억울해서 죽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눈감고 죽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요새 눈감지 못하고 뻔히 뜨고 죽을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눈감고 곱게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시므온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천국의 소망이 넘치므로 ‘이제 죽어도 한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정말 복 있는 자입니다. 성도가 경건에 이를 때에 이러한 만족과 평안과 소망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경건에 이르지 아니하고는 주안에서 누리는 참된 평안과 만족을 소유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죽어도 한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정말 복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날처럼 한 많은 세상은 없을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 민족은 옛날부터 한에 맺힌 민족입니다. 고용인은 고용인들대로,회사원은 회사원들대로,뜻있는 교사는 교사들대로 그저 한에 맺처 살고들 있습니다. 부정과 부패가 여기저기서 뻐젓이 행해지고 있기때문입니다. 아무리 썩었다고 할찌라도 정부의 개혁을 통해서 좀 나아질 것이 아닌가....기대하고 있지만 아직도 보이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바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한이 맺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현실만을 바라볼때에 그러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한 마당 한풀이’로 맺처있는 한을 풀어 보려고 합니다. ‘내가 이 원수를 값지못하고 죽는다면 눈감고 죽지못할거다’웨치며 한을 풀어보려고 합니다. 심지어는 한풀이 신학까지 나올 정도로 몸부림을 처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민중신학이요 해방신학입니다.

 

그러나 부질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현세만을 바라보면 소망이 없습니다. 내세의 하나님의 엄위하신 심판과 승리의 영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런 자는 ‘이제 죽어도 한이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현재만을 보지 않고 장래를 보기 때문입니다. 한에 맺힌 심령은 용서가 없고, 용서가 없는 마음에는 평안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시므온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해서 ‘이제 죽어도 한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의 마음에 평화와 만족이 넘치기 때문입니다. 경건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 오는 평화와 만족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 복된 경건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운동 선수가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최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연습에 연습을 거듭해야 합니다. 연습은 한번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수없이 거듭해야 합니다. 그래야 발전하고 훌륭한 선수가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성들도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경건의 연습이 필요한 것입니다. 선수 이상으로 연습에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선수들의 승패는 연습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압니다. ‘누가 연습을 많이 했느냐’에 따라서 거의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좋은 성도가 되고, 못되는 것도 바로 경건의 연습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산에 길이 생기는 것을 보면 한 두 사람이 지나간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사람이 일년, 이년...계속해서 지나갈 때에 생기는 것입니다. 이처럼 경건은 거듭되는 연습과 훈련을 통해서 처음에는 습관이 되고, 그리고 계속되는 동안 그것이 몸에 배어서 인격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신앙의 요소들이 그의 인격을 통해서 풍겨 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경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의 선진들과 같이 경건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첫째는 신본 주의 다시 말해서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교회 중심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봉사하는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셋째는 성결에 힙쓰시기 바랍니다.

즉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 기도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경건한 성도들로써 모든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복된 생애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y 코이네자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