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디모데

[딤후1:1] 바울의 감사와 기쁨

'코이네' 2019. 12. 22. 22:01

바울의 감사와 기쁨

디모데후서 11-5

 

 

본문 말씀을 유의해 살펴보면 사도 바울이 왜 감사드렸으며 기뻐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기뻐하였습니다.

 

본래 사도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생활을 같이 했던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나 후에는 사도의 개념이 넓어져서 예수님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을 전하는 사람을 가리켜서 사도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도 사도의 반열에 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본 다음에 새사람이 되어 열심히 에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한 사도였습니다. 그런데 사도, 아포스톨로스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파송된 사람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바울 자신은 과거에 핍박자요 훼방자요 폭행자였지만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사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고 사도가 되게 하여 열심히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어떤 직분과도 바꿀 수 없고 천사도 흠모할 만한 가장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직분을 바울에게 허락하여 주신 것입니다. 트루엣(Truett)이라고 하는 분은 "내가 다시 일천번 태어난다고 할지라도 목사가 되겠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바울의 심정이 바로 그러했으리라 믿어집니다. 물론 사람은 두번 세번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에 단 일회적인 생명을 누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자의 사명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고백하는 신앙간증인 것입니다. 다니엘 123절에 보면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서 많은 영혼을 주앞으로 인도하는 사람에게는 큰 상급과 복을 함께 주실 줄로 믿습니다.

 

LA에서 흑인폭동이 일어났을 때 흑인들의 표적은 한국사람들의 가게였습니다. 그래서 가게의 물건을 약탈당하고 가게는 파괴되고 불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 가게는 약탈당하고 불타버리지 않았습니다. 폭동이 일어나기 직전에 한 흑인 소년 강도가 집사님이 운영하는 가게에 들어와서 돈을 내어놓으라고 했는데 순순히 돈을 내주고서 흑인 소년 강도에게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인데 너를 위해 기도해 줄테니까 잠깐 기다리라"고 말하고 그 소년을 위해 눈물흘리며 간절히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평생 멸시와 천대만 받아오던 흑인 소년이 그 사랑에 크게 감동을 받고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후 폭동이 일어났을 때 흑인 소년이 자기 친구들을 데리고 와서 그 가게를 지켜 주어서 약탈당하거나 파괴당하거나 불타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영혼을 불쌍히 여기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우며 값진 일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길을 걸어가도 전도, 사람을 만나도 전도, 직장과 사업장에 가서도 전도, 어디를 가든지 아침부터 저녁까지 전도를 위해서 살아가게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열심히 전도하면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은사와 크신 복으로 여러분에게 축복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둘째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을 인하여 감사하며 기뻐하였습니다.

 

은혜란 카리스인데 죄된 인생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참된 사랑은 십자가 상에서 용서로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믿는 자에게 값없이 주시는 구원의 사랑입니다. 여러분은 다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신 줄로 믿습니다.

긍휼이란 엘레오스인데 곤경에 처해있거나 비참한 지경에 빠져있는 사람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긍휼이란 고난받는 사람에게 주시는 최상의 선물입니다. 시편기자 다윗은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 빠져 위기에 처해있을 때 "주의 긍휼을 내게 그치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라고 부르짖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사모하던 그가 원수의 모함으로 생명의 위기에 처해있을 적에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내게 응답하시고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게 돌이키소서"라고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위험에 처한 자들을 건져내 주시고 지켜주시는 위대한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박해와 핍박이 많은 목회 현장에 처한 연소한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긍휼을 기원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이 아침 여러분이 위기와 고난에 처해있을 때 하나님의 긍휼의 은총이 여러분 심령 속에 충만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평강이란 에이레네()인데 히브리어로는 샬롬(Shalom)이라고 합니다. 평안함, 원만함, 평화로움, 평강 등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항상 적에게 쫓기는 삶을 살면서 평화를 갈망했지만 참된 평화를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평안하셨습니까? 평강을 누리십시요. 평화를 갈망합니다'라는 의미로 누구를 만나든지 `샬롬'하고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평안하기를 원하고 평화를 갈구합니다만 평화가 깨어지고 평강이 깨어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를 성경은 죄 때문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4822절에 보니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깨어질 때 평강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인간과의 평강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형성되어지면 여러분 심령에 참된 평강이 차고 넘칠 줄로 믿습니다.

 

어린 목회자 디모데가 에베소교회의 목회 생활에 혼란스러운 마음과 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를 견고하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마음에 평강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어린 디모데에게 어떤 혼란스러운 환경과 처지에서도 마음의 평정을 잃지 말고 건강하게 양떼를 돌보기를 소원하면서 이렇게 평강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삶이란 끊임없이 갈등과 고뇌와 문제가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겐 참으로 주님의 평강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강이 없이는 결코 환난 풍파질고 많은 세상에서 승리의 삶을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이 참된 평강은 세상이나 물질이나 명예나 권세가 줄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 주님만이 흔들림이 없는 견고한 평강을 허락하여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요새 만연하는 질병 중 하나가 심장화병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병은 심전도나 엑스레이촬영으로도 발견할 수 없는 병입니다. 심장에 열이 생겨 심장이 약해지고 허열이 생기는 병인데 이 병의 원인은 스트레스를 받거나 억울한 일을 당하는 등 정신적인 요인에서 말미암는다고 합니다. 그 병의 증상은 가슴이 답답해지고 열기가 머리로 올라가고 가슴이 두근거리며 소화불량증세가 나타나고 불안초조하게 되고 불면증이 생기는데, 더 심해지면 히스테리가 발작되고 신체무력증 심장기능허약증까지 겹쳐지게 됩니다. 그 병의 치료방법은 자기수양과 마음의 평안을 찾고 인내와 용기를 가져야 고칠 수 있다고 합니다. 사실 현대인의 모든 질병의 원인은 정신적 요인에 기인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자기수양으로 마음의 평안을 되찾을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직 살아계신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기도함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평강이 심령 속에 차고 넘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평안을 네게 주노니 내가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 떨지도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아침에도 주님이 주시는 참된 평강이 여러분 심령속에 차고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바울은 디모데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기뻐하였습니다.

 

바울이 디모데후서를 기록할 때는 나이가 많은 노년기였는데 그의 동역자들이나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에 참으로 외로웠습니다.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두기고는 에베소에 보내졌고 그레스게는 병들어 밀레도에서 요양 중에 있었습니다. 마가는 핍박과 환난을 이기지 못하여 고향으로 되돌아 갔고 오직 의사 누가만 그의 곁에 있었습니다. 게다가 바울은 배신 당하고 버림당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더욱 외로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구리장색 알렉산더가 그에게 해를 끼쳤으며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의 곁을 떠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위안을 받기 위해서 디모데가 그 곁에 있어주기를 소원하여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속히 내 곁에 오라고 편지를 보냈고 디모데는 즉시 바울 곁에 달려가서 바울을 위로해 주고 수종들며 돌보아 주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참 아들, 즉 영의 아들이었습니다. 본문 2절에 '나의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12절에도 '믿음 안에서 참 아들된 디모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육신의 아들이 아니라 바울의 영적인 아들, 믿음의 아들, 참 아들이었습니다. 천성적으로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며 귀히 여기게 되어 있습니다. 도적이나 강도들도 자기 자식만은 사랑하고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사람들일지라도 자기 자식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즉 자식은 부모를 잊을지라도 부모는 자식을 잊지 않습니다. 집을 떠나 군에 입대한 자식이나 직장이나 사업상 멀리 외지에 나가 있는 자식이나 외국에 나가있는 자식이 늘 보고싶어 그리워지는 것입니다. 그 자식들은 간혹 향수병(Homesick)을 앓는 경우도 있어 부모님 생각이 나면 눈물흘리는 때도 있지만 바삐 살다보면 고향을 잊어버리고 부모님을 잊고 살아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은 항상 자식을 못잊어 하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님의 아들이 군에 입대하여 훈련을 받고 있는데, 그 성도님은 밥을 먹을 때도 아들이 밥을 잘 먹고 있나, 잠을 잘 때도 아들이 잠을 제대로 자고 있는지, 옷을 갈아 입을 때에도 아들이 옷이나 제대로 빨아 입고 사는지, 날씨가 싸늘해지면 아들이 건강하게 살고 있는지, 감기가 걸리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입니다. 저녁이면 아들이 문을 열고 엄마하고 부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에 눈물이 마를 날이 없고 밤에 자다가도 깜짝 놀라서 깨어 일어나면 불현듯 자식 생각에 미칠 것 같은 때가 있다는 고백을 들어 보았습니다. 아마 그것이 부모님의 심정일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 자식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은 남의 자식도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웃는 자와 함께 웃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일평생 독신으로 살았기 때문에 육신의 자식은 없었지만 믿음의 아들 영적인 아들, 참아들이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아들보다 훨씬 귀하고 소중한 참아들이 바울에게 있었습니다. 육신의 아들은 연로한 부모를 버릴 수 있지만 참 아들인 디모데는 연로한 바울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육신의 부모가 병들어 있으면 육신의 자식들은 그 부모를 외면하고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의 아들 디모데는 감방에 갇혀 있는 바울의 곁을 떠나지 않고 바울을 돌보아 주고, 위로하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가리켜서 나의 믿음의 아들, 영의 아들, 참 아들이라고 격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빌립보교회에 천거하면서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 밖에 네게 없음이라 저희가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과 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제1차 선교여행시 빌립보지방에서 바울을 통해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구원받았습니다. 그후 제2차 선교여행시 바울이 에베소에서 고난을 당할 때 바울을 대신하여 빌립보지방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3차 선교여행때는 핍박을 피해온 바울을 영접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였습니다. 디모데는 참으로 신실한 믿음의 아들이었습니다. 육신의 자녀에게 믿음이 있다고 하면 금상첨화(금상첨화)라고 하겠습니다. 만일 믿음이 없다고 하면 진정한 의미로서 자식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들은 어떠합니까?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구원받아 착실하고 진실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고 하면 참다운 여러분의 자식들이 아닌 것을 아셔야 됩니다. 여러분의 육신의 자녀들을 참 자녀들로 만들기 위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구원받고 진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도록 해야 합니다.

 

디모데는 청결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긴 참아들이었습니다. 세상에는 화인맞은 양심, 파선된 양심, 더러운 양심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디모데는 깨끗한 양심, 청결한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디모데는 눈물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을 위해 회개의 눈물도 많이 흘렸지만 감사의 눈물, 동정의 눈물, 사랑의 눈물도 많이 흘렸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하실 적에 많은 여인들이 뒤따라오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돌이켜 보시면서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자신의 죄를 위해 회개의 눈물을 쏟으며 부르짖어야 되겠지만 동시에 우리 자녀들을 위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주님의 몸된 교회의 부흥성장을 위해서 눈물로 부르짖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디모데처럼 눈물 흘려 기도하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디모데는 거짓이 없는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섬겼던 참아들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진실되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세상 사람인지 성도인지 분별하기가 어렵도록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디모데는 거짓이 없는 참된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섬긴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도가 된 것을 인하여 감사하며 기뻐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기뻐했으며, 참 아들 디모데를 인하여 감사드리며 기뻐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날 아침 여러분과 저에게 어느 때라도 전도할 수 있는 은혜를 입혀 주셨으니 감사하면서 열심히 전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과 저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을 날마다 물붓듯 부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시다. 그리고 참 아들 디모데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거짓이 없는 믿음, 깨끗한 양심, 눈물흘려 기도하는 신앙의 사람들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여러분 한분한분을 내려다보실 적에 "너는 참 내 아들이다 너는 참 믿음의 사람이다"라고 인정받으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목사가 여러분을 볼 때에도 "아무개는 진실되고 거짓이 없는 믿음을 가지고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눈물흘리는 사랑으로 주의 뜻을 실천하는 참 믿음의 사람이다"라고 인정받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