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보던 일을 셈하라
본문 : 누가복음 16: 1-13
설교 : 김창인 목사(광성교회)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어느 한곳에 부자가 있었는데 그 부자가 재산을 관리하는 청지기 하나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이 청지기는 자기 분수를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 청지기는 자기가 해야 할 일에 충실하지 않고 허세를 부리거나 주인과의 상의 없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직책으로 착각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주인에게서 통보를 받게되는데, 청지기 직분을 그만 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청지기직에 대한 결산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제서야 청지기는 깨닫습니다. 내가 너무 주제를 모르고 큰 실수를 했구나! 그 다음 이 청지기는 잘못을 뉘우치고 지혜롭게 일을 했더니 주인이 칭찬해 주더라는 내용입니다.
위 내용으로 우리들도 하는 일에 대하여 결산을 한 번 해보자는 의미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일년 농사를 짓게되면 반드시 추수하는 때가 있습니다. 추수해서 타작을 한 다음에는 반드시 알곡과 쭉정이를 가릅니다. 섞어두지 않습니다. 알곡은 곡간에 넣어두고 쭉정이는 불태워 거름을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엄청난 것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 받은 것을 가지고 청지기 노릇을 잘 했으면 칭찬 받지만, 청지기 노릇 잘못하면 오히려 직분을 빼앗기고 쫓겨나는 것입니다. 본문의 가르침을 상고해 보겠습니다.
I. 네 직분을 셈하라 (1-4)
네 직분을 셈하라 즉 네 보던 일을 셈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받은 직분이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영광스럽고 긍지를 가질만한 자랑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감사함으로 받아야 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 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기에게 직분을 맡겨 주셨다는 것을 감사했습니다. 감사할 이유가 많겠지만 내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그 자체가 너무 감사하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처럼 감사함으로 주님의 일에 충성했습니다. 마지막 생을 결산하는 마당에서 바울이 떳떳하게 자기 일을 결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믿음을 지켰다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바울의 경우처럼 우리에게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받은 직분에 대해 결산해야 할 때가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초대 예루살렘교회가 한창 은혜가 넘치고 부흥되고 있을 때 일곱 명의 집사를 세웠습니다. 그 중에 니골라라고 하는 집사는 자기가 받은 그 직분을 귀하게 생각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직분을 버리고 교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니골라당이라고 하는 패거리를 만들었는데 하나님이 심히 미워하였습니다. 이 패거리가 에베소교회를 얼마나 어지럽혔는지 모릅니다. 나중에는 그 모임을 가리켜서 "사탄의 회"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우리가 받은 직분을 소홀히 취급하고 본분을 망각하게되면 자신뿐만 아니라 교회에까지 해를 끼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결국 "사탄의 종노릇"하는 것과 똑같이 되는 것입니다. 직분도 빼앗기게 됩니다. 직분을 잘 감당하면 더 크고 귀한 직분이 주어지지만 직분에 게으르고 소홀하게 취급하면 있는 것도 빼앗기고 쫓겨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본문 1절에서 4절까지의 내용을 보게되면 청지기의 직분을 세도부리는 권세의 자리로 생각하고 자기 마음대로 주인의 재산을 허비하였습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잘 관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위하여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내가 받은 집사 ,권사, 장로의 직분이 허세부리는 권세의 직책으로 착각하고 행동하다가 오히려 화를 자초하는 일은 없습니까? 직분 때문에 오히려 교만해지고 문제를 야기시키는 불행한 일은 없었습니까? 청지기는 봉사직입니다. 권세를 부리거나 유세를 부리는 자리가 아닙니다. 직분 받은 우리는 열심히 봉사해야만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되면 더 많이 봉사하라는 주님의 명령이 있는 자리입니다. 제직회나 당회에 참석해서 이러쿵저러쿵 자신의 주장이나 말을 많이 하는 것이 봉사가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봉사라는 의미는 음식점에서 종업원을 생각하면 됩니다. 종업원은 손님이 오면 정중히 인사를 하고 자리로 안내합니다. 그리고는 물을 떠다 바치고 주문을 받습니다. 식사가 끝난 다음에는 안녕히 가시라고 또 정중히 인사를 합니다. 이것이 봉사하는 모습입니다. 손님에게 전혀 불편이 없도록 시중을 드는 것입니다. 유세 부리는 경우는 전혀 없습니다. 이렇게 할 때에 그 음식점을 찾은 손님이 다음에 또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봉사하는 직분자는 교회를 찾는 사람에게 친절히 안내하고 예배드리기에 불편함이 없도록 잘 보살펴 드려야 합니다. 즉 믿음의 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만약 직분자가 봉사는 하지 않고 권세나 세도만 부리게 되면 성도들이 그 교회를 다시는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 책임을 누구가 질 것입니까?
본문을 보게되면 그 다음으로 청지기가 주인의 재산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권세를 부려 손해를 끼친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볼 때에 더 이상 놔 둘 수 없다고 생각해서 청지기 직분을 빼앗습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직분이 많습니다. 구역장, 권찰, 교구장, 교사, 성가대 그리고 집사, 권사, 장로, 목사 등등 우리에게 맡겨진 이 직책과 직분들을 감사함으로 본연의 봉사를 해야 합니다.
제가 우리 교회 온지가 24년(1989년 현재) 되었습니다. 처음 왔을 때 교회가 13평짜리였습니다. 13평이라야 지금의 우리 성가대 앉은자리 만한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곳에 3,40명이 처음에 예배를 드렸습니다. 제가 전도사로 와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3년 만에 목사 위임식을 했습니다. 그 동안에 교회는 벌써 어른이 300명으로 성장했고, 그렇게 조그마한 예배당이 60평되는 예배당으로 지어졌습니다. 목사에게 위임식은 가장 영광스러운 예식입니다. 왜냐하면 안수 받아서 목사 되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위임받는 목사는 그렇게 많지를 않습니다.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300명이나 주시면서 목회를 위임하시니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을 아니 할 수 없었습니다. 위임식을 하는 순서 가운데 답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눈물이 나는지 답사도 다 하지 못하고 들어왔습니다. 그 당시 저의 생활은 너무 어려웠습니다. 한달 생활비가 고작 6천원 이었습니다. 그 때 몸이 아파서 병원에 자주 가게 되었는데, 치료비와 약값만도 한 달에 2만 6천원이 들어갔습니다. 6천원으로는 도저히 살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교인들에게 돈 꾸러 다닐 수도 없고, 한달 치 생활비를 미리 달라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결혼 반지는 석달 만에 팔아야 했고 집사람이 많이 가져온 옷감을 몽땅 팔아서 생활을 하였습니다. 와이셔츠, 스텐 그릇도 팔았습니다. 6천원으로 도저히 살 수 없다는 것을 교인들은 잘 알면서도 집에 와서 솥뚜껑도 한 번 열어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번도 목사 된 것을 후회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너무 몸이 아프고 병이 깊으니 제 모습이 엉망이었습니다. 내가 나의 얼굴을 봐도 너무도 보기조차 흉했습니다. 이러니 누가 나를 목사로 생각해 주겠으며, 동대문시장의 점원으로도 써 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이 일감 주셔서 목회하게 하시는 것만 가지고도 감격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저는 설교할 때마다 감격함으로 설교하고 심방 할 때도 감격함으로 심방합니다. 여러분도 받은 직분을 당연히 받을 것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본문의 청지기처럼 직분에 대한 감사가 없으면 교만해서 일을 그르치기가 쉽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직분을 감사하며 충성한 다음에 주님 앞에 결산을 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의 직분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항상 잘했다 칭찬 받는 주님의 종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II. 네 준비를 셈하라 (5-11)
5절에서 11절까지가 미래에 대한 준비의 말씀입니다. 그 준비가 곧 충성입니다. 충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아브라함의 종을 생각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엘리에셀인데, 아브라함은 그 종에게 이삭의 아내가 될 아가씨를 선택해서 데려오라고 멀고 먼 곳 고향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절대 데리고 가면 안 된다는 겁니다. 이런 기막힌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지만 주인께서 시키는 대로하겠습니다. 하고는 주인이 그 동안에 준비해둔 보물이라는 보물은 다 싣고 나귀 열 필을 끌고 갔습니다. 종은 주인의 집에 있을 때에는 주인의 통제 하에 있지만, 멀리 떠나있게 되면 주인의 통제권을 벗어나게 됩니다. 보물을 집어넣어도 또는 훔쳐 달아나도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그것을 가지고 멀리 달아나 한 살림을 차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종이 부자가 될 좋은 기회입니다. 그런데도 그 종은 절대 주인의 것에 손을 대지 않더라는 겁니다. 주인의 고향을 찾아 갈 때까지 생전 처음 가는 길이라 사람들에게 묻고 물어서 가야 하지만 하나님께 묻고 물으면서 기어이 찾아갔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아가씨를 발견한 후에도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 아가씨가 주인의 며느리감입니까? 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자기 임무를 잘 완수하고 그 종이 주인께 돌아 왔습니다. 그 며느리를 주인의 장막에 들여보낸 후에는 이름 없이 빚도 없이 사라집니다. 더 이상 그 종의 이름이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주인에 대한 충성이 대단했습니다. 양심에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충성한 종입니다. 이런 충성이야말로 우리가 배워야 할 충성입니다. 하나님께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충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난주간의 부흥회가 끝나고 첫 주일인데도 봉사위원의 자리가 절반이상 비어 있습니다. 이래서는 안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일을 하는 청지기로서는 부끄러운 일입니다. 엘리에셀이 주인 아브라함을 위하여 일하는 것처럼 우리도 해야합니다. 한 달에 다섯 주일이면 다섯 주일, 한 달에 네 주일이면 네 주일을 끝까지 봉사해야 합니다. 일년이면 365일 내내 열심히 봉사해야 합니다. 무슨 대가를 바라고 일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주만 따라가야 합니다. 충성한 후에 우리 자신이 영광 받을 만 하면 우리는 그 자리에서 사라져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청지기의 충성하는 모습입니다.
본문의 청지기는 주인의 눈에 거슬리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주인은 그 청지기를 파면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런 찰나에 청지기가 눈치를 채고 자기의 잘못을 후회하고 깨닫기 시작합니다. 주인은 그러한 청지기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었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충성하지 못해서 주님이 책망하시려고 할 때 빨리 알아차리고 회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자비로운 주님은 우리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십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고 팔복산으로 가셨습니다. 지금 그 팔복산에는 기념 예배당이 있습니다. 거기 올라가면 그 아래로 갈릴리바다가 내려다보입니다. 그 산에 올라가는 중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돌 하나씩 주어가지고 가자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큰돌을 끙끙거리면서 가지고 올라갑니다. 그런데 가롯유다는 조그마한 돌을 가지고 올라갑니다. 올라가면서 제자들을 얼마나 비난하는지 모릅니다. 어리석은 제자들 조그마한 돌이나, 큰돌이나 돌은 마찬가진데 뭐 저렇게 고생하는 뜻입니다. 가롯유다는 자기가 가장 지혜로 사람인 줄로 착각을 합니다. 예수님께도 불평을 합니다. 저 산꼭대기에는 돌이 많은데 무엇 때문에 이런 고생을 시키는가? 라고 말입니다. 산꼭대기에 올라가더니 예수님께서 그 돌을 내려놓으라고 하십니다. 힘들게 올라 왔더니 몹시 배가 고팠습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시므로 가져온 돌들이 전부 떡이 되었습니다. 큰돌을 가져 온 제자들은 실컷 먹고도 남았지만 잔재주를 부리면서 작은 돌을 가져온 유다는 떡이 모자라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구걸하면서 허기를 채웠습니다. 이 내용은 유대인의 전설에 나오는 것입니다. 전설이기는 하지만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일하는 사람들이 열심히 살지 않고 잔꾀를 부리거나 술책을 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꾀를 부리는 성도는 우직하게 일하는 성도를 비난합니다. 즉 자기의 행동이 가장 지혜로운 처사인양 우직하게 충성하는 성도를 미련하다고 비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의 직분자들은 모두 이런 일이 없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 스스로가 판단할 때에는 어리석어 보이는 것 같더라도 충성하고 순종하는 대로 되고 또 받는 것입니다. 그 말씀 속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엄청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들어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직하게 충성하는 그 충성을 계산해 보자고 하십니다. 이 충성이 미래를 위한 우리의 준비입니다. 본문은 불의한 청지기에게 지혜롭게 일한다고 칭찬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재물을 불의하게 처분한 것을 칭찬한 것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준비를 한다는데 대해서 칭찬한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준비가 없는 사람은 어리석은 부자와 같습니다(눅12:13-21). 우리 하나님은 반드시 미래에 대한 준비를 점검하십니다. 그 준비가 곧 현재의 충성입니다.
III. 네 믿음을 셈하라 (13-)
13절을 보게되면,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두 주인은 하나님과 재물을 의미합니다. 본문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한 번 점검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믿음을 결산해 보자는 말입니다. 나의 믿음이 진실한 믿음인지, 진실하지 못한 믿음인지 시험해 봐야겠습니다. 농사짓는 농사꾼은 꼭 가을 추수할 때 결산을 보지만, 주님은 하시는 일의 범위가 넓고 크시기 때문에 5년 뒤에 결산할 수도 있고 10년 뒤에 결산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시간이 많다고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참 믿음이 있으면, 그 믿음은 어떤 형태로든지 나타나는 것이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믿음은 반드시 나타나게 되어 있는데 세 가지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 사랑으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우리가 두 주인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리니 두 주인을 섬기게 되면 하나는 반드시 미워하고 하나는 반드시 사랑한다는 겁니다. 똑같이 사랑하지는 못합니다. 만약에 재물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재물을 사랑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재물을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을 종으로 여기게 됩니다. 재물이 목적이요, 하나님을 수단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재물이나 모아 주고 누리게 해주는 머슴 정도로 하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귀하게 여기지를 않습니다. 그와 반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재물을 부려씁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재물을 투자합니다. 이웃을 위해서 재물을 사용합니다. 재물을 귀하게 생각하면 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재물은 얼마든지 하나님을 위해서 내놓을 수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재물을 하나님 사랑을 위해서 쓸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 반대로 믿음이라는 것은, 재물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그 재물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결국, 믿음은 하나님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한 번은, 실망하고 낙심하여 갈릴리로 고기잡이를 떠난 베드로를 찾아가셨습니다. 아마도 부활하신 주님을 보는 순간 베드로는 "아이쿠 이제 죽었구나"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하고 칼부림을 하고 못할 짓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향해 "너는 왜 나를 부인했느냐 그리고 저주는 왜 했느냐?"하면서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과거를 묻지 않으시고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면서 사랑만 묻습니다. 만약 베드로에게 아직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이 사랑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주님은 사랑을 묻습니다. 너 공부를 얼마나 했느냐? 혹은 얼마나 많은 재물을 가졌느냐? 고 묻지 않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할 수 있느냐?"고 사랑만 묻습니다. 그 이유는 믿음의 별명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고백처럼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의 고백이 없이는 믿음이 있다고 자부할 수 없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을 중히 여기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를 경히 여기거나, 저를 중히 여기니라"는 말이 무엇인고 하니, 두 가지를 모두 중하게 여기지 아니하고 한가지만을 중요하게 여겨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중히 여기면 재물은 자동적으로 경히 여기게 됩니다. 반대로 재물을 중요하게 생각하면 하나님은 자동적으로 관심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한번은 이태리에서 귀부인들이 모였습니다. 내로라 하는 사람들의 부인이니까 입은 옷은 화려하고 목걸이 귀걸이 팔지 등 세상에서 값나가는 물건으로 온 몸을 치장했습니다. 서로 서로 이것이 얼마나 비싸다는 둥 자랑하기를 시작합니다. 그 귀부인들이 모인 집의 주인은 과거에 수상을 지낸 분이었습니다. 그 수상은 얼마나 청렴결백했는지, 잘 사는 집이 아니었습니다. 귀부인들이 그 집에 와서는 수상을 지낸 집이니까 값나가는 보물이 많이 있을거라 생각하고 한 번 구경시켜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조금 있다가 수상의 부인이 2층으로 올라오라고 합니다. 귀부인들은 2층에 보물이 가득찬 방이 있나보다 생각하고는 2층으로 올라갔습니다. 올라가서 방을 열었는데, 보물은 없고 열심히 공부하는 아들과 딸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바로 저 아들과 딸이 나의 보물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귀한 보물을 갖다줘도 아들과 딸과는 바꾸지 않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금 보다 귀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재물을 보배로 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만이 참 보배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주밖에는 복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우리에게 있는지 결산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 믿음을 하나님은 보고싶어하십니다.
세 번째로는 하나님 섬김으로 나타납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하나님의 일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고 봉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자원하는 노예가 됩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은 재물의 노예가 됩니다. 재물을 섬깁니다. 재물의 주인이 되기는커녕 재물의 노예가 되어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노예가 된 사람은 재물의 노예가 되지 않고 오히려 재물의 주인이 되어 재물을 바르게 사용합니다. 그래서 두 주인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자랑하고 높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재물을 사용합니다.
본문에 사용된 "섬긴다"라는 말은 좋은 예배 즉, 예배를 잘 드린다의 의미를 나타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높인다는 것은 예배를 잘 드리는 일입니다. 예배드리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주일에 예배를 드리지 않고 직분 받은 자들이 산으로 놀러가고, 해수욕장으로 놀러 가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배에 빠지면서 봉사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지만 있다고 하여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섬김은 예배를 잘 드리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예배에서 시작되는 섬김의 믿음을 계산해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에게 이러한 믿음의 셈이 꼭 있으시기 바랍니다.
한 곳에 불의한 청지기가 있었는데 주인이 나타나 네 보던 일을 셈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네가 얼마나 직분을 잘 감당하였는지를 따져보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직분 잘 감당하였는지를 셈해 보자고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종에게서 주인은 직분을 빼앗으려 했으나 오히려 칭찬을 하였습니다. 그의 불의한 일에 대한 칭찬은 아니었습니다. 미래를 위하여 준비하는 모습을 보고 칭찬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미래를 위한 준비를 어떻게 하였는지 점검해 보자고 하십니다. 칭찬을 받을 만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주인은 그 종에게 믿음을 셈해 보자고 하였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귀중히 여기고 하나님께 봉사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반드시 믿음의 셈을 받아야 합니다. 잘했다고 칭찬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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