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누가복음

[눅 17:11] 그 중의 한 사람 _ 김창인 목사

'코이네' 2025. 2. 26.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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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의 한 사람

본문 : 누가복음 17: 11-19

설교 : 김창인 목사(광성교회)

 

 

누가복음 1711절에서 19절까지의 말씀을 가지고 그 중의 한 사람이란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추수 감사절로 지키는 날입니다. 이 추수감사절의 성서적 근거는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농사를 지어다 거두어들인 다음 하나님 앞에 그 중에 제일 좋은 것을 가지고 와서 일주일 동안 축제를 벌이며 감사했던 수장 절에 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키는 감사절의 직접적인 동기는 청교도들의 추수감사절에 두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영국의 종교개혁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개혁파들이 종교 개혁에 성공했다가 다시 천주교가 득세해서 뒤엎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신교도들이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이 신교도들을 우리는 청교도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청교도들은 그들의 좋은 집, 많은 재산 등 애써 이루어 놓은 기반을 포기하고 아메리카 대륙을 향해서 배를 타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 건너갔습니다. 이들은 신앙의 자유를 위해 모든 것을 다 포기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가서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사를 지었고 가을에 추수한 다음 함께 모여 하나님의 축복을 감사하면서 곡식을 모아 놓고 감사절기를 지켰습니다.

 

 

그러기까지 그들 가족 중에서 굶어 죽는 사람, 병들어 죽은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런 중에서 이들이 근본적으로 감사했던 것은 신앙의 자유를 찾았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곳에 가서도 신앙의 자유를 못 찾고 농사지어 풍성한 곡식만 쌓아둔 것이 감사할 일이었다면 고향 땅을 무엇 하러 떠났겠습니까? 이들이 고향에선 못살았습니까? 고향에서도 그것보다 더 잘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감사한 것은 마음놓고 예수 믿는 이 신앙의 자유야말로 가장 근본적으로 감사할 조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쌓아놓고 감사한 중에서도 불행한 조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남편이 죽은 사람, 혹은 아버지가 죽은 사람, 아들이 죽고 혹은 딸이 죽은 사람들이 많았고, 먹지 못해서 굶어 죽었고, 또 병이 들었어도 병원이 없어서 치료도 받아보지 못한 채 안타까워하는 부모의 눈앞에서 죽어 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곡식을 쌓아놓고 보니 얼마나 가족 생각이 나겠습니까? 그런 불행하고 좋지 못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좋은 조건과 축복만을 생각하고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에도 우리들 집안에 다 좋은 일들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좋지 않은 일도 있고, 좋은 일도 있는데, 좋은 일만 생각하면서 감사한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이런 의미로 지키는 그 청교도들의 감사절, 이것이 우리가 청교들의 후예들에게서 선교를 받고 우리도 지키게 된 것이 감사절의 유래입니다.

 

 

본문의 내용으로 들어가 보면 열 사람의 문둥이가 예수님을 만났는데,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로 다 고침을 받았습니다. 아홉 사람은 전혀 얼굴도 나타내지 않았는데, 그 중의 한 사람만이 돌아와서 감사함으로 예수님께서 그렇게 기뻐하고 좋아하셨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 중의 한 사람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I. 믿음 좋은 사람(11-14)

 

 

첫째, 만남의 신앙(11-12절 상반절)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명이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예수를 만남, 이것이 우리들에게는 상당히 중요한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사람에 대해 알기 위해서 그의 전기를 읽어 알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디에서 태어났고, 언제 태어났으며, 어떤 집에서 자라났고, 공부는 어느 정도로 했고, 또 가진 것은 얼마고, 일은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배워서 아는 것입니다. 맞대면을 시키면 서로 모릅니다. 그렇게 배워서 알기보다는 직접 만나서 사귀게 되면 정이 들게 됩니다. 만나면 만날수록 새로운 면을 발견하고 깊이 알게 됩니다. 오늘 만났던 사람에게 '이런 면을 가지고 있구나' 느끼고, 다음날 만나면 '저런 성품도 있구나' 라고 느끼게 되며 또 그 다음에 만나면 '그런 삶의 자세를 갖고 있구나' 라며 자꾸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진짜 아는 것이요, 진짜 사귐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배움의 신앙과 만남의 믿음은 다른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통해 예수를 배우고, 목사님을 통해 예수님을 배운다고 해도 예수님과 정들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과 관계가 깊어질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직접 만나 사귈 때에 정들고 관계가 깊어져 예수님을 안 믿고는 못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만남의 신앙, 즉 열 문둥이가 예수님을 만났는데 찾아가서 만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다가 마을에 들어오실 때에 찾아와 주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하나님 만나는 방법을 가르칩니다. 세상의 다른 종교에서는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가서 만나게 되므로 귀신을 하나 찾아 놓고도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지만 그것은 잘못 찾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와서 만나 주실 때 바로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와 주시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와 주실 때 만나는 믿음이 좋은 믿음이요 바로 된 믿음입니다. 이것을 복음이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영으로, 여러분 마음 속을 찾아와 그 영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만나는 믿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말씀의 신앙(12절 하반절)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멀리 섰다고 하는 것은 상당히 의미가 깊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성경 레위기 1345-46절 사이에 보면 문둥병자가 되면 집에서 쫓아내고 동네에서도 쫓아내고 동네 밖에서 혼자 살라는 것인데 무슨 일이 있어도 집에 들어오거나 동네에 들어오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지나가게 되면 한 손으로는 입을 가리고, 한 손으로는 흔들면서 "나는 부정하다, 부정하다" 외쳐야 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을 가까이 못 오게 하려는 것입니다. 또 가까이 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부르짖는 사람이 있으면 "저기 문둥이가 있구나" 하고 사람들이 돌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부정해지는 것을 막으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열 명의 문둥이들도 하나님의 말씀 따라 멀리 섰습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고 그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그리고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기에 예수님께 달려가고 싶은 생각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러나 믿음이란 것은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하거나 제 생각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꼭 지켜 순종해야 합니다. 이렇게 말씀에 대한 철저함, 이것이 바로 질 좋은 믿음입니다. 말씀대로 철저히 따라 믿는 사람이 믿음 좋은 사람이라고 본문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말씀에 철저한 신앙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순종하는 신앙(13-14)

 

 

본문 말씀을 보면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고 하였는데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무엇이 이루게 지기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순종하고 나면 일이 된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멀리 서서 이 사람들이 하나같이 예수님의 도움을 청합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때로 성경은 예수님을 가리켜 선생이라고 하기도 하고 주님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다 좋은 뜻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그 누구도 가르쳐 주지 못하는 진리와 하늘나라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참 선생이 바로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는 말은 "우리를 고쳐 주소서" 라는 말이기도 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뜻을 아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몸을 제사장에게 찾아가서 보이라" 고 한 마디를 하셨습니다. 그 당시 유대나라에는 문둥병에 걸리면 제사장에게 찾아가 진찰해야 합니다. 손이나 혹은 몸을 보이면 제사장이 진찰해서 문둥병인지 아닌지를 판정했습니다. 또 문둥병에 걸렸다가 문둥병에서 나음을 얻었으면 역시 제사장에게 가서 자기 몸을 보이며 다 나았는지 아닌지를 진찰 받았습니다. 병원에 찾아가 의사에게 진찰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라" 고 하신 말씀은 "너희들의 몸이 깨끗해졌으니 즉 병이 나았으니 가서 나았다는 진단을 받고 반드시 결례로 행하는 제사를 드리라" 하는 뜻입니다. 이것은 제사장의 깨끗해졌다는 '정결선언' 이 있어야만 천형으로 인해 그동안 다시는 볼 수 없었던 사랑하는 가족이 있는 가정으로 혹은 그의 일터로 돌아갈 수 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정결법' 은 예수님 당시에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그 순간에 문둥병이 나았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가다가 보니 병이 나은지라" 고 한 것을 보면 문둥병자들이 그 말을 믿고 순종함으로 제사장에게 가는 도중에 병이 나은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순종하고 나면 됩니다. 그 말씀이 무엇인가 이치에 맞지 않고 도무지 무언가 납득이 가지 않아도 순종해 놓고 보면 이루어지는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성경에서 많이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순종하는 믿음이야말로 참 좋은 신앙이요 또 건강한 신앙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수학 문제를 풀 수 있는 것은 공식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공식만 외우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문제를 풀려고 하면 반드시 그 문제에 공식을 대입시키고 응용할 때에만 제대로 풀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은 인생의 문제를 푸는 하나의 공식적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외우고 있어서만은 안됩니다. 이것을 우리의 생활 속에 그대로 적용을 시켜 풀어 나갈 때에 자신의 문제도 가정의 문제도 모두 해결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자신의 생활에 적용하고 순종하며 실천하다 보면 이루어지는 것이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 놓고 보는 믿음이 질 좋은 믿음이요, 살아있는 믿음인 줄을 아셔야 합니다. 이렇게 믿음 좋은 사람은 만남의 신앙, 말씀의 신앙, 순종하는 신앙의 소유자입니다.

 

 

II. 영광 돌리는 사람(15-16)

 

 

첫째, 체험으로 영광(15)

 

 

먼저 15절을 보면 체험을 하고 주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문둥병이 나은 것을 본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문둥병이 전부 깨끗하게 나은 것을 보았고 자신의 몸에 주님의 능력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몸에 주님의 사랑이 나타났다는 것, 자신의 몸에 주님의 축복이 나타났다는 것, 이런 체험을 한 후 제사장에게 가는 것보다 예수님께 찾아가는 것이 더 급했기에 가던 길을 돌이켜 찾아와 감사했다는 것이 아닙니까? 체험을 한 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2천년 전의 옛날 이야기로만 듣지 마세요. 지금 우리의 믿음도 체험하는 믿음이 되어야만 합니다. 성경에는 아브라함의 믿음, 모세의 믿음, 다윗의 믿음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이야기를 아무리 들어봐야 그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이요, 다윗의 믿음이지 내 믿음은 아니 것입니다. 이 믿음이 바로 내 자신의 생활 속에 체험으로 나타날 때 비로소 나 자신의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체험 없는 믿음은 믿음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론적인 신앙입니다. 이론적인 신앙, 관념적인 신앙은 따지고 보면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이론이 아니기 때문에 관념이 믿음일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생활 속에, 사업 속에, 또 우리의 가정 속에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축복이 나타났다는 체험이 있을 때에 우리는 만사를 제쳐놓고 하나님께 돌아와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생활 속에서 정말 하나님을 체험하시고 무엇보다 만사를 제쳐놓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감사함으로 영광(16절 상반절)

 

 

16절을 보면 "예수의 발아래 엎드려 사례하니" 라고 하였습니다. 이 문둥병자가 문둥병에 걸렸을 때에는 감히 가까이 못하고 멀리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오지 못하고 있다가 이제는 다 나았기에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리고 사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렸다고 하는 것은 겸허한 자세를 가라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 돌릴 때에는 겸허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문둥병자는 감사할 때에 '사례' 라는 방법으로 감사했습니다. 사례라고 하는 것은 직접 무엇인가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체적인 감사이요, 실질적인 감사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바로 그 사례를 받아들고 하나님께 영광 돌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데 있어 이 열 사람이 하나같이 깨끗함을 받았지만, 아홉 사람은 얼굴조차 비치지 않았습니다. 그럴 수 있을까 생각하겠지만 우리 가운데도 그런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라고 우리와 다른 사람들이겠습니까? 저는 아홉 사람들의 감사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사람들이 어디에 먼저 갔겠습니까? 아마도 자기 집, 자기 고향, 자기 동네에 먼저 갔을 것입니다. 부모, 처자식, 친구, 친척, 이웃들 모두 하나같이 "자네 어떻게 살아 돌아왔나, 죽으면 송장도 못 찾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때에 그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했을까요? "예수께서 나에게 말씀 한 마디로 고쳐 주시는데 난 목숨이 열두 개일지라도 몽땅 주님께 다 바쳐도 한이 없겠다" 라고 안 했다면 그건 사람도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그 아홉은 어디 갔느냐?" 라고 물으십니다. 단지 말로 감사하고 마는 것을 주님은 섭섭해하십니다. 그들이 제사장에게 가지 아니한 것이 분명합니다. 만약 제사장에게 갔다면 예수님께서 어디 갔느냐고 묻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제사장에게 가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시간에 추수감사절로 지키는데 심방 감사, 생일 감사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감사입니다. 우리가 일년 동안 살아온 은혜, 내 가정을 하나님이 돌보아 주시고 건강을 지켜 주시고 이만큼 믿음 생활하도록 키워주신 것은 보통 감사할 일이 아닙니다. 이럴 때에 그 한 사람처럼 사례하며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면 우리 집 구석 구석에 주님의 축복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내와 남편의 얼굴을 서로 보기만 해도 감사하고 건강해서 집안 잘 꾸려주니 얼마나 고맙고 감사할 일이며 아들 딸들이 잘 자라고 하나님이 그런 아들 딸을 주시니 또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힘껏 하나님 앞에 사례하며 감사로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하겠습니다.

 

 

셋째, 이름없이 영광(16절 하반절)

 

 

16절 하반절을 보면 "저는 사마리안이라" 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주님이 만천하에 공포하며 끔찍이 좋아하시던 그 사람을 단지 사마리아인이라고만 소개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어디 한두 사람입니까? 수십만 명도 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수십만 명중에 한 사람인데 단지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할 때에는 아쉬울 수도 있으나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생각하면 많은 은혜가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영광 돌릴 때에는 "절대로 내 이름을 나타내지 말라" 고 하는 뜻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다 나타내고 자신이 영광을 받으면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이 없습니다.

 

 

신학생들 중에는 상당히 어려운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등록금을 내지 못하여 휴학하는 사람, 등록금을 분납하며 쪼들리고 재촉 받는 사람, 점심도 먹지 못하고 공부하는 사람이 아직도 많습니다" 라고 어느 주일에 설교하면서 말씀을 드렸더니 자신도 넉넉하게 살지 못하는 어느 집사님이 신학생 한 사람의 등록금이라도 될까 해서 봉투 하나를 가지고 왔습니다. 내가 신학생을 소개해 드릴테니 직접 드리라고 하니까 싫다고 하면서 목사님이 알아서 전해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신학생 한 명을 불러서 남 모르게 전해 주면서 그 분을 위해서 기도하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학생은 누구에게서 받았는지 모르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이 집사님은 이름 없이 행한 것이요 영광은 하나님이 다 받으신 것입니다. 만약에 신학생에게 큰절을 받고 주었다면 영광은 자신이 받고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광은 전부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며 이름 없이 돌려야 마땅한 것입니다.

 

 

III. 축복 받은 사람(17-19)

 

 

첫째, 인정받는 축복(17-18)

 

 

17, 18절을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 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온 자가 없느냐?" 라고 그 한 사람에게 예수님은 물으셨던 것입니다. 이 한 사람의 믿음과 한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 돌렸다는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인정받는 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자신을 좋아하고 칭찬할 지라도 자신의 남편에게 인정을 못 받는다면 그 아내의 속이 얼마나 타겠습니까? 겉으로는 웃지만 속은 탈 것입니다. 또 세상 사람들이 다 자신을 인정해도 아내가 자신을 인정해 주지 않으면 그 남편 역시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세상의 사람이 다 나를 인정해 주어도 주님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신자는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인정해 준다는 것은 큰 축복 중의 축복인 것입니다. 주님의 인정을 못 받는다면 지금까지의 믿음은 헛 믿은 것입니다. 헛 믿었다면 인생을 헛산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인정받는 것은 가장 귀한 축복인 줄 알아야 합니다.

 

 

둘째, 자유의 축복(19절 상반절)

 

 

19절 상반절을 보면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예수님의 발 앞에 아직도 엎드려 사례를 하고 있는 그 이방인, 즉 사마리아 사람에게 "일어나 가라" 고 하셨습니다. 어디로 가란 말입니까? 제사장에게로 가다가 돌아왔으니 제사장에게로 계속 가라는 것입니다. 이제 가서 떳떳하게 진단 받고 떳떳하게 결례를 드린 다음에 자신의 집으로 가고 자신의 직장으로 가고, 즉 사회에 복귀를 한 후 가고 싶은 회당에도 성전에도 마음대로 가고 마음대로 활동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 사람에게 자유의 선언입니다. "이제는 너를 구속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는 말씀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 사람은 자유란 자유는 모두 빼앗기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가정을 가질 수 있었습니까? 사람들과 마음대로 말을 할 수 있었습니까? 또 예배를 드리고 싶다고 예배당에 갈 수 있었습니까?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구속할 자도 또 구속될 일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에게만 자유를 선언하신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에게도 죄가 우리를 더 이상 구속하지 못하도록, 병마가 우리를 더 이상 괴롭히지 못하도록, 가난이 우리를 더 이상 괴롭히지 못하도록 자유를 선언해 주시는 줄 믿어야 합니다. 자유의 선언이야말로 큰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 구원의 축복(19절 하반절)

 

 

19절 하반절 말씀을 보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는 기록이 있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는 말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믿음으로 문둥병에서 구원받았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다른 아홉 명에 대한 구원은 선언하지 않았습니다. 한 명에 대한 구원만 선언했다는 것은 병고침을 받아 병에서 구원을 받는 것과 즉 건강해 지는 것과 영적으로 구원받는 것이 전혀 별개의 문제임을 가르칩니다. 가령 이 세상에서 물질의 부자가 되는 것과 영적으로 믿음의 부자가 되는 것이 별개이듯이 건강하여 장수하는 것과 영혼이 건강하여 영생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믿지 않는 사람은 다 병들고 다 가난하게 됩니까?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에 나오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는 말은 영적인 구원으로 영생을 선언 받지는 못한 것입니다. 아홉 사람도 병 고침은 받았지만 하늘나라의 영생을 선언 받지는 못한 것입니다. 이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 딸 권세를 받아 하늘나라에서 영생한다고 하는 영적인 구원이야말로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이요, 우리가 지향하는 최고의 축복이요, 목표입니다. 본문에서의 축복은 인정받는 축복, 자유의 축복, 구원의 축복입니다.

 

 

결론적으로 오늘의 주인공은 믿음 좋은 사람,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사람, 축복 받은 사람, 즉 사마리아인입니다. 오늘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주님이 그렇게 기뻐하시던 그 중의 한 사람처럼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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