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요한복음

[요 15:7] 기도

'코이네' 2024. 8. 24.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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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성경:15:7

 

 

<서론>

 

본문은 기도에 관한 엄청난 약속을 주는 말씀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어떤 기도에 관한 다른 약속도 이처럼 무한대한 약속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와 약속이 엄청난 정도로 조건이 까다로롭습니다. 그런데 대개 우리는 그 결과의 무한함에 매료되어서 조건에는 신중한 시선을 보내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포도나무이고 너희는 가지니 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이 포도나무 비유입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등장한 것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8절로 넘어가서는 과실을 많이 맺으면 아버지께서 영광을 얻는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결론을 내리기를, 기도란? 열심히 매어달리어 열매를 많이 맺는 것이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의미는 전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은 조금 전에도 말씀드린 것과 같이 `너희가 나에게 붙어 있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가지가 줄기에 붙어 있지 않는 한 그 가지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4절에 보시면 "내 안에 거하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라고 했습니다. 가지가 열매를 맺는 것은 자기가 생산해 내기 때문이 아니라 포도나무 둥치에 붙어 있기 때문에 거기에 열매가 매달릴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는 지금 기도에 관한 말씀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다시 7절을 보십시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는 전제와 단서가 붙어 있다는 점을 좀 더 깊이 상고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듣는 기도에 관한 설교나 시중에 나온 기도에 관한 서적들이 대부분 기도의 방법론에 관한 문제들을 주로 다루고 있습니다. , 어떻게 기도를 잘해서 응답을 받을 것인가? 하는 문제들을 훨씬 강조하여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접근방법이 기도를 고무시키고 열심을 불러 일으키게 하는 원동력이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기도에 대한 자세에 관한한 많은 실수와 오해와 오류를 불러 일으킨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의 원리적이고 근본적인 측면을 강조하다 보면 너무 메마른 감이 들고 급기야는 기도할 마음이 없어지도록 사기를 떨어지고 위축되는 듯한 어려움이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기도에 찬물을 끼얹고 위축감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도에 대한 정확한 자세를 가지기 위해서 어려운 부분들을 건드리며 추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론>

 

대부분의 신자들을 만나서 신앙 생활의 잘못된 것들을 지적하면 `, 이게 틀린것이구나! 이렇게 해야되겠구나!'하면서 고치는 것이 아니라, `아니, 그럼 어떻게하란 말입니까?'하고는 안 합니다. `동쪽으로 가지 마라! 동쪽이 아니고, 남쪽으로가라!'고 그랬더니, `남쪽으로 가라!'는 말은 안 듣고 거저 `가지말라!'는 그 말에걸려 힘을 잃고 주저 앉아 그냥 울고만 있는 모습이 대부분 신자들의 실상이라는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기도란? 우리에게 있어서 어떤 결과들을 만들어 내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기도해서 어떤 일이 가능해 지고, 간구해서 무슨 일이 현실화되는 것에 이 기도가 훨씬 많이 동원되고 있습니다. 물론 맞습니다. 우리는 겸손함을 위하여 기도해야 되고, 말씀을 깨우쳐 달라고 기도해야 되고, 우리에게 말씀을 따라 살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기도의 전부는 아닙니다. 더 풍성한 부분들이 이 기도에는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오늘 본문대로 하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가 너희 안에 있으면" 이제 구할 것은 기도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기도를 함으로써 어떤 결과가 발생된다기 보다도, 기도란? 이미 그리스도 안에 거한 결과로서 허락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기도란? 기도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결과의 반증이요, 포도나무에 계속 붙어 있어서 어떤 수준과 경지에 도달해 있다는 자기 증거요 감사거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 포도나무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 있기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아니며, 가지된 우리가 스스로 열매맺기 위하여 기도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기도란? 내가 그리스도 안에 거했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이요, 드디어 그 그리스도와의 연합된 자리에 나아갔기 때문에 맛보고 소유할 수 있는 결과로서 기도가 허락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찬송과 기도 중에 어느 쪽이 더 수준이 높아 보입니까? 보통 찬송이 수준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아직 목적지에 못 가있기 때문에 그 과정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아우성일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아직 내가 목표로 삼고 있는 데를 다 못 가서 애를 쓰는 과정에서 나오는 것이 기도라면, 찬송은 목적지에다 갔기 때문에 그 결론으로 흘러나오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지금 요15:7절 오늘 본문에 언급하는 기도는 그런 의미에서 찬송과 같이 `내가 어느 경지에 도달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묘사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드디어 나올 수 있는 것이 기도라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면서 우리는 대부분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기도 했지만 응답받지못했다. 기도했지만 힘이 없었다. 밤낮 기도만 하고 제대로 된 적도 없고 또 기도한 대로 살지도 못했으니 도대체 이게 뭐냐?'하면서 자신의 기도 생활을 훨씬 자책하며 절망스러워 하는 분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란? 오늘 본문 식으로말하자면 기도를 할 수 있다는 그 자체가 이미 나는 다른 존재요, 주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기에 기도 한다는 그 자체가 감사한 일이요, 그것 자체가 영광스러운일이요, 이미 감격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따라서 기도란 우리가 무슨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이나 실력이나 능력이기 전에, 신자의 정당한 신분 앞에 누리도록 약속된 것이라는 일차적인 결론이 나옵니다. 이와같은 결론은 곧 신앙의 더 깊은 경지로 들어가는 문이 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잘 오해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께 기도해서 어떤 능력을 행사하게 됨으로써 하나님이 혼자 하실 수 없는 일을 내가 협력하여 이루어 드리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진 돈이나 지혜나 실력이나 어떤 힘을 필요로 해서 우리를 부른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기도란? 어떤 일을 이루는 방법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기도는 해야하고 무엇에 필요한 것입니까? 그것은 단 하나의 이유 때문입니다. , 그의 일에 우리를 동참케 하여 우리를 기쁘게 하며 우리를 대접하고 사랑하여 그의 사랑 안에 충만케 되게 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지가 포도나무 원둥치를 붙잡고 있어서 줄기가 원둥치에 열매를 맺어 주는 것이 아니라, 원둥치가 가지를 위해서 버팀목이 되어주고 양분을 줌으로써 열매를 맺히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이 답답해서 여러분의 주머니에서 돈을 뺏아오시겠습니까? 하나님이 무엇이 답답해서 여러분의 건강이 필요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도와드리는 것으로 되어 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 우리가 큰 교회를 지어야 되고 돈을 갖다 내고, 사람을 많이 모아야 되는 것입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사랑이 나에게 넘쳐나서 죽어가는 심령들을 불쌍히 여기는 하나님의 사랑에 동참하는 안타까움으로부터 출발된 마음입니까? 아니면 실력있고 돈가진 사람이 필요해서 입니까? 우리의 기도에는 거의 습관적으로 `실력있는 신자가 되고, 이 교회에서 없어서는안되는 신자가 되게 해 주옵소서!'라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같은 기도를 과연 어떤 자세로 하고 있는지 정검해 보셨습니까? 없어서는 안 되는 신자란?하나님과 사랑을 나누며 그분 안에 있는 기쁨이 충만한 것으로서 `난 하나님 없이는 못 살아!'라고 고백하고 동시에 하나님께서도 `난 너 없이는 못 살아!'라는 깊은 관계에서의 고백이 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 없이는 이 교회가 안돼' 할때 여러분이 교회에 내고 있는 무엇 때문에 - 인원수 때문에, 실력 때문에 등등으로 - 비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무엇 때문에 내가 없으면 교회가 안 되고 천국이 안 된다는 식의 사고 방식이 우리에게 들어와 있지는 않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이미 우리에게 깊이 물들어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17:21-2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우리 죄를 대속케 하시며 우리를 부르신 구원의 가장 내용과 경지가 무엇인지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알았삽나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여기에서, 어떻게 피조물인 인간이 감히 그 높고 경이로우신 하나님께 대접받고 있으며 사랑을 받고 있으며, 도대체 어떤 계획과 어떤 뜻 속에 부르심을 받고 있는냐가 희미하게나마 소개되고 있습니다. 창조주 되신 하나님께서,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로 그와 하나 되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신이 되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단지 피조물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차원에서 하나님은 어쨋든 우리를 떼어 놓고는 만족하지 않겠다고 작정하신 셈입니다.

우리로하여금 그 분을 사랑하게 하며, 또 그분의 사랑을 우리 안에 다 채우기까지 주님은 쉴 수 없다는 이야기를 성경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그를 십자가에 매어 달리게 하는 희생을 치르게 하기까지 이 이을 이루시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 된 인간들의 손에 의하여 조롱을 받으시며 수욕을 당하시는 것까지 불사하시고도 이 일은 이루시고야 말겠다는 것이 구원의 목적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얼마나 교인 머리수를 채우는 일과 헌금을 내는 일과 교회를 위하여 힘이 되고자 하는 일에만 주력해 왔습니까? 이런 것들은 모두 하나님을 향한 여러분들의 사랑와 진심의 외형적 표현에 불과한 것들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신앙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진심이 없이 헌금하고 모이고 힘쓴다면 그것은 무의의할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에 해를 끼치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얼마나 많이 하나님을 능력적인 차원에서 보필하고 싶어하고, 지혜적 차원에서 참모가 되고 싶어 합니까?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하나'된다는 표현이 많습니다. 그래서 요14:1절에 예수님게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믿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과 같다고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어떻게 두 분이 그런 의미에서 일체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마음과일체되어 있고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과 계획과 뜻이 예수 그리스도와 어떻게 하나되어 있는가? 하는 점을 묘사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14:9-10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믿지 아니하느냐?" 분명히 여기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이 어떻게 일치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서로가 자기만을 위하여 살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하나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한 걸음, 한 말씀, 한 사건도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좇지 않고 하신 것이 없다는데 촛점이 맞춰져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들에게까지 동일하게 넘어갑니다. 고전 11:1절을 보십시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예수님께서 요14:1절에서 말씀하신 것과 방불한 말씀을 기록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과 나는 하나'라고 하는 것과는 급수가 전혀 다릅니다마는 여기에는 어떤 힌트가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이것을 교만하다거나 오만하다고 생각하셔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요구하는 신앙의 핵심이요, 가장 중요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이야기 하는 것과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았으니 너는 나를 본 받으면 곧 예수를 본받게 된다'는 것은 자만이 아니라, 어떻게 모든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일체가 되는가?를 보여주며 동시에 구원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의 생애를 보면, 인간의 눈으로 볼 때에 성공스러워 보이는 사역이 없습니다. 가는 곳마다 방해를 받고 매맞고 쫓겨 다녔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 나타난 바울이 당한 고난의 기록을 보면 같은 동족이 그를 쫓아다니며 방해하였으며, 이방인들도 핍박을 하였다고 기록합니다. 그래서 곤장과 태장으로 맞고 돌에 맞아거의 죽기도 하였고 배고프고 헐벗고 고생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바울이 그러한 일을 당하면서 감당하는 그 일이 주를 위하여 무엇으로 보답하고 있는가에 촛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과 일체가 되어 기꺼이 세상에 올 수 있었던 그것을 그대로 바울이 본받아서 이제 그가 세상에서 할큄을 당하고, 방해를 받고 물어뜯더라도 살든지 죽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기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촛점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1:8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바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졌다고 말합니다. 그 자신이 온통 죽어가는 영혼들을 향한 구령 사업을 얼마나 많이 하였는가가 아닌, 인간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갖고 있는 그 크신 사랑에 하나가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가 기록하고 싶은 최고의 핵심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교회를 얼마나 많이 개척했느냐? 얼마나 많이 복음에 대하여 사랑을 가지고 일하였느냐?가 촛점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촛점은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께 항복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사랑에 강권함을 받고 있느냐 하는 점이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세상의 어떠한 방해와 괴롭힘으로도 그를 막아내지 못하였다 하는 것을 성경이 기록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빌3:17절에는 이 말씀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자들을 보이라" 여기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을 보이신 것같이, 즉 하나 되신 것같이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었는데 바로 이것을 너희들고 본받고 그렇게 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기도란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이 세대와 이 세상을 향하여 갖고 계시는 마음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안타까우심,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하나님의 자비하심 온유하심, 은혜로우심, 긍휼히 여기심에 동참하는 자가 되는 것이 기도입니다. 죄에 대하여 한숨이 나오고, 그 죄악 속에 널부러져 있는 자들을 향하여 갖고 계시는 하나님의 안타까우신 눈물이 우리의 눈물에 맺히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는 어느 선까지 합니까? `저 원수들로부터 구원해 주소서!' `나를 사용해주소서!' `백배의 이익을 남기게 하소서!' 등으로 일관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종교적인 사업이나 기독교적인 탈을 쓰고라도 능력있는 자신을 증명하고 싶은 것입니다. 쉽게 말해 세상에서 사업을 잘 하고 성공하여 교회에 들어와서는 재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사업적이거나 내 욕구 충족을 위한 방편을 위해서 허락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훨씬 인격적이고 신성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의 마음에 동참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신앙입니다. 이러한 자세는 어떤 형편에서도 기도할 수 있게 해주며, 어떤 괴로움 앞에서도 충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여러분의 마음 속에 `지금 이 모습으로는 하나님 앞에 봉사 할 수 없다!'하는 생각은 없습니까? 만일 그것이 죄에 관한 문제라면 옳습니다. 이 죄를 짓는 한 내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봉사하겠느냐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옳은 생각입니다. 나쁜 버릇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회개하야 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것 이외의 것이 있어야 충성할 수 있다면 그건 분명히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바칠 돈이 있고, 건강이 있고, 지위가 있어야만 하나님의 일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교회를 유지하거나, 여러분이 기독교를 지탱하거나, 여러분이 하나님을 보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불렀고, 하나님께서 지금도 여러분을 위하여 애쓰고 계시며, 모든 것을 주시며, 인도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나에게 돈이 없어도, 건강이 없어도, 지위가 없어도 얼마든지 그것들과는 상관이 없이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초대받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 모든 것이 없더라도 우리는 얼마든지 하나님의 마음에 동참하게 되며, 오늘 하나님의 눈을 가지며,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며, 그의 심장을 가지며, 그의 기쁨과그의 영광과 계획과 능력에 동참하게 되는구나! 하는 기쁨이 기도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말씀의 핵심입니다.

 

? 많은 신자들이 그의 신앙 생활에 기적이 없고 감동이 없음을 호소하고 있습니까?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이 도무지 신앙적이지도 영적이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집요하도록 물질적이기 때문입니다. 15:11절을 보십시오. 분명히 부언하고 있는 이 말씀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하려 함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죽음을 앞두고 계시는 분이신데 기쁘답니다. 이제 곧우리 인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실 것입니다. 마지막 만찬을 끝내시고 하시는말씀 중에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충만하게 하기 위하여 이것을 허락하고 있다'고 그럽니다. 주님께서 가지셨던, 하나된 아버지의 사랑 안에 동참한 그 기쁨을 우리에게 있게 하실 것입니다. 그 기쁨을 지금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가능한 약속이요, 누려야 할 신앙의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또한 무슨 말씀으로 넘어가는지 보십시오. 15:13-14절을 보십시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 이상 더 큰 사랑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시는 것은 우리를 친구로 대접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어 15절을 보시겠습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하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따라서 신자란 이런 차원에서 전혀 다른 신분입니다.

 

<결론>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친구로 초대받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신자는 이 세상에서 남보다 우월한 것을 증명하도록 요구받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었는데 내가 저 사람보다 승진이 늦으며 더 불행하며 더 고생하십니까?' 참 신자는 그와 같은 문제들을 기도 제목에 넣어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신자는 세상을 보는 눈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영원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하나님 아버지와 한마음이 됩니다. 그래서 영원이라는 시야를 가집니다. 영적 세계라는 다른 차원 속에 들어가 있는 자입니다. 그리고 비록 세상이 신자를 물질로 괴롭히고, 건강으로 괴롭힐 수는 있을 지라도 슬프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다시말해 하나님과의 교제는 막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된 것을 막을 방법이 없고 이간시킬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특권이요, 신비요, 기적입니다.

지금 당장 누리실 수 있습니다. 신자이기에 여러분 모두가 가능합니다. 그런데 왜? 이것을 놓치는지 아십니까? 물욕에 눈이 어두워서 그렇습니다. 자기 욕심에 빠져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떨쳐 일어 나십시오. 여러분이 신자인 이 놀라운 축복의 자리에 있다는 것을,이 지위를 누리지 못하는 것을 놀라셔야 합니다. 이 안으로 돌아 오시기 바랍니다.그리고 감사하십시오. 신앙생활의 참 맛을 누리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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