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베드로서

[벧후 1:8] 지속적인 영적 성장

'코이네' 2024. 8. 11.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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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적인 영적 성장
베드로후서1:8-11



우리들은 신앙 생활에서 향상이 있어야 합니다. 영적 생활에서 성장이 없으면 제자리 걸음이 아니라 뒷걸음질을 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의 독자들에게 곧 닥쳐올 위험들을 경고하려고 그의 두 번째 서신을 집필하였습니다. 이 위험들은 신자들 자신 속에서 주로 일어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굳건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한다고 힘주어 강조하였습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1:5). 하나님의 백성들은 앞으로 나아가는 진보를 날마다의 삶 속에서 이루어 가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그들은 죄를 회개하고 세례도 받습니다. 그러나 그후에는 아무런 진전도 없습니다. 그들은 가끔 성경을 읽어보고, 가끔 기도를 하며, 가급적이면 선을 행하면서 교회에 다니면 다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성장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5-7절에서 8가지 덕성들을 열거하고서 모든 신자가 자신의 삶에서 그런 품성들을 함양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것들은 마치 믿음을 기초 석으로 하고 사랑을 관석(冠石)으로 한 건축물의 마루 바닥과 같습니다. 건물은 외형만 갖추어져서는 제구실을 다 못합니다. 마루 바닥과 벽들이 가구로 채워져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는 무엇인가 보여줄 것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곧 성경에서 말하는 열매 맺는 생활입니다.

풍성한 결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열매가 우리의 삶 속에서 맺히기를 갈망해야 합니다. 열매 맺는 삶이 성도의 인생 목표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불신자들도 더러 선을 행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동기는 바르지 못할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의 선행을 살펴 주기를 바라거나 혹은 그 대가로 사람들의 칭송을 받고 싶어합니다.
힌두교들은 자신들의 선행을 내걸고 내세에서 보다 높은 차원의 생명체로 환생되기를 바랍니다. 모슬렘교도들은 자신들이 코란 경전의 가르침을 순종했기 때문에 알라신이 잘 보아주기를 희망합니다. 인본주의자들은 같은 인간들의 복지에 헌신했으므로 죽은 후에 좋은 이름이 세상에 남기를 희망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그리스도인은 열매를 맺어 하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기를 열망합니다.
우리 신자들은 믿음,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 우애 및 사랑을 항상 우리들의 삶 속에서 보이도록 관심을 쏟아야 합니다. 이제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이 8가지 덕성들을 하나씩 짚어 보며 나 자신이 얼마나 그런 품성을 함양시키고 있는지 점검해 보십시오.
이러한 덕성의 함양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더 잘 알게 해줍니다. 예수님은 지상에서 사시면서 이러한 덕성들을 하나씩 보여주셨습니다. 물론 우리들은 예수님처럼 이 세상에서 죄가 없는 완전한 삶을 살지 못합니다. 그래도 우리들은 날마다 그리스도를 닮는 생활을 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들은 무력한 생활에서 벗어나 주님과 더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모두 복음의 증인들입니다. 우리가 보다 효과적이고 능력 있게 복음을 전하려면 그리스도인의 덕성들을 날마다 함양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닮아 가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고 속삭이는 사단을 마음에서 몰아내어야 합니다.
‘아무도 그리스도를 닮아 가며 살지 못합니다. 그런 덕성들을 길러 보려는 노력은 시간 낭비지요. 당신은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포기하십시오!“
이런 말 속에도 어느 정도 진리가 내포되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리스도를 닮아 가면서 살아야 할 성도의 삶이 주어진 자들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려고 더 힘써야 하며 그 축복된 은혜들을 향해 앞으로 전진해야 합니다.
우리들에게 참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살려는 열망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더욱 힘써 기도하고 성경을 공부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영적 생명의 성장을 가로막는 것들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영적 진보가 막힌 까닭은 이 세상의 염려들과 재물에 대한 유혹 때문이었습니다(마13:22).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세상 일들에 대해서 우리는 지나치게 염려하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런 염려를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주님의 돌보심을 받고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사실이라면 장래에도 주께서 우리들의 필요를 채워 주실 것으로 믿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더 잘 알고 싶어합니까? 그렇다면 한 손에는 믿음을 다른 손에는 사랑을 쥐고서 그 사이에 다른 모든 덕성들을 함께 붙잡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 생활이 지속된다면 무력하고 비생산적인 삶은 적지 않게 제거될 것입니다.

눈을 여십시오.
영적 성장을 막는 위험 요서 가운데 하나는 우리들이 근시안이 되거나 눈이 머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본문에서 영적 맹인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후서 4:4절에서 중생 되지못한 자들에 대해 진술하였습니다. “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영적으로 눈이 먼 사람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전혀 보지 못한다는 사실은 매우 슬픈 일입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2천 년 전에 살았던 한 선량한 인간에 지나지 않으며 오늘날 그들의 삶에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인물일 뿐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지금 기독교 신자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너희’ 또는 ‘우리’라는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遠視)치 못하고”(1:9). 베드로는 그의 독자들이 영적인 맹인들이 아니기를 바랐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적으로 눈이 멀지는 않더라도 의식적으로 영적 진리에 눈을 감을 수는 있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이 세상을 위해서만 삽니다. 그들은 장래를 투시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히브리서 11장에서 서술된 신실한 주의 백성들과 같지 않습니다. 거기에 나오는 사람들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였습니다. (히11:16).
현재의 연락들만 위해서 사는 육적인 기독교인들은 얼마나 무력하고 비생산적 인지요! 그들의 목표는 현세에서 이름을 내고 축복을 다 받아 내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이익과 즐거움을 찾아낼 수 있을까를 궁리합니다. 그들은 “교인은 세상에서 물질의 복을 많이 받고 부자가 될 것”이라는 식의 가르침을 퍽 좋아합니다. 그런 육적인 교인들은 예수님의 보혈로 모든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리고는 교인이 되었기 때문에 지옥에 가지 않으니까 마음대로 살아도 잘될 것이라고 희망합니다. 그저 천국의 한 쪽 구석에라도 들어가기만 함 좋다는 것이 그들의 자위적인 말투입니다. 그러나 로마서 6장은 그런 논리를 반박하고 있습니다. 육적인 교인들의 생각은 매우 위험하고 사악합니다. 우리들이 진정으로 교인이라면 자신의 안락에 빠질 것이 아니라,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께 영광을 돌릴 생각을 해야 합당합니다. 교인들은 이기적이거나 감사를 모르는 자들로 보여서는 안 됩니다. 근시안적인 교인들은 그들을 위해 쌓여 있는 미래의 보고를 바라볼 줄 모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러한 육적 교인들이 미래를 바라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과거를 돌아 볼 줄도 모른다고 지적합니다.
눈이 먼 교인들은 자기들이 어디에서 구원받았는지를 잊고 있습니다. 그들은 회심하기 전에 큰 죄인들이었음을 잊고 있습니다. 그들은 한때 지옥으로 향한 자들이었음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령에 의해서 죄의 무서움을 확신한 사실도 잊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죄를 고백하고 주님의 용서를 받았던 일도 잊고 삽니다. 그들은 믿음의 선물을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을 증언했던 사실도 잊어버립니다. 그들은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공적으로 선포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써 죄를 씻었다는 사실을 떳떳이 증거한 것도 잊고 삽니다.
근시안적인 맹인 교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행하신 모든 것들을 잊고 이 세상에 속한 옛 생활로 되돌아갑니다. 그들의 삶은 너무도 자기 중심적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것에만 온 정신이 쏠려 있어 그들이 애초에 주님을 끝까지 따르겠다고 선언했던 의도가 과연 무엇이었는지를 의심하도록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눈을 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육적인 교인들이 기억력을 되찾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거룩한 생활을 회복하기를 기대하십니다.

안전
첫째, 모든 참된 교인들은 은혜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자신이 스스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작심을 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된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나 자신이 죄를 회개하려고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처럼 생각됩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믿음의 손을 펼쳤기 때문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실 우리들의 구원에는 하나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개입되셨습니다.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우리들이 하나님 자신에게로 돌이키도록 부르셨습니다. 우리들은 그 부름에 응답하였고, 하나님을 따랐으며, 영광스런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둘째, 모든 신자는 구원을 받도록 선택되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 교리를 잘 수락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들이 타락 속에 멸망해 있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선택해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따르도록 불러 주셨습니다.
베드로전서1:1절에서 베드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들도 자신들을 이렇게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해 주셨다는 사실은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우리들이 아무리 서러운 일을 당하고 고난을 겪어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친히 택해 주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오히려 모든 것을 참고 안전하게 느끼며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이 확실한 사실이라고 진술하였습니다. 그의 관심은 우리들이 이 은혜로운 사실을 “굳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우리들이 구원을 얻도록 선택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5-7절에 나왔던 8가지 덕성들을 지니고 살면 됩니다. 이것들은 우리들을 구원해 주지는 않지만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표지가 됩니다. 야고보도 이와 유사한 믿음의 증거들에 대해서 말하였습니다. 
(약2:18)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우리들이 선택되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면 두 가지 놀라운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 우리들이 절대로 구원을 잃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구원의 안전은 우리들의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지을 때마다 넘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팔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가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양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10:29)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 큰 환영 속에서 하늘나라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벧후1:11)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여기서 ‘넉넉히 준다’는 말은 ‘큰 환영을 받는다’는 뜻으로 옮길 수도 있습니다.(NIV역). 고대 그리스의 올림픽 경기에서 우승한 영웅들은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갈 때에 일반 성문이 아닌, 특별히 단장된 승리의 문으로 우레와 같은 박수 갈채를 받으면서 진입하였습니다. 우리들이 하늘의 본향에 닿을 때에도 승리의 나팔이 울려 펴질 것입니다. 번연의 천로역정처럼 우리가 사망의 강을 건넜을 때, 하늘의 모든 나팔이 우리를 위해 울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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