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베드로서

[벧전 4:12] 고난 중의 기쁨

'코이네' 2023. 5. 31. 17:42

고난 중의 기쁨
베드로전서 4:12-19

 

 

 

본문은 모두 여덟 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베드로는 여기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에 대해서 말합니다. 베드로는 이 고난의 주제를 거듭 언급해 왔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수신자들이 살던 북부 터어키 지방에 네로의 박해가 임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고난은 생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여러 세기 동안 빈번하게 고난을 당해 왔습니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았었고 바벨론에서 포로로 잡혀 있었습니다. 신약 시대에 와서도 그들은 여러 차례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중세기 때에 유럽 전역에서 학대를 받았었고 히틀러와 공산주의 세력들은 유대인을 말살하려고 억압하였습니다. 유대 민족의 고통은 첼로 오케스트라 곳으로 작곡된 에른스트 블로호(Ernest Bloch) 의 쉘로모(Schelomo)와 같은 음악 속에서 아름답고 슬프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방 민족들에게는 그런 고난의 체험이 없으므로 베드로는 이방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부드러운 어조로 고난에 대비시키는 글을 썼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의도는 그의 수신자들이 이를 악물고 박해를 견디도록 하려는 것이라기 보다는 핍박의 고통을 통해 유익을 얻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고난의 축복들

베드로는 그의 수신자들에게 고난을 보고 놀라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그들을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2:11절에서도 같은 표현을 썼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베드로가 그의 수신자들을 사랑하며 그들의 고통을 동정한다는 뜻을 잘 드러냅니다. 그래서 그는 시련을 보고 놀라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고난을 받는 것은 매우 자연스런 일입니다. 대핍박의 때가 닥쳐도 그리스도인들은 이상한 일이 생긴 것으로 생각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베드로의 권면입니다. 주님이 받으신 고난을 그의 제자들이라고 해서 어찌 면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을 따르기를 즐거워하는 신자들이라면 주님이 사신 삶을 끝까지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오해와 고통을 수반하는 것이며 때로는 잔인한 죽음도 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베드로는 신자들이 부당한 고난을 겪으면 즐거워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한 때 주님이 고난을 받으신다는 말을 싫어하였습니다.

(16: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16: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16: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하시고

 

베드로는 흠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수긍할 수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북부 터어키의 신자들도 그들에게 닥치는 고난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들에게 고난의 긍정적인 측면을 지적하였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고통들을 생각지 말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기에 합당한 자들로 인정된 것을 기뻐하십시오.”

왜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을 받습니까? 초대 교회의 신자들처럼 지금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리스도를 전파하기 때문에 고난을 겪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경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큰 노력을 하지 않고도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돌아가는 일이 단순히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께로 회심하는 것임을 믿지 못합니다. 그들은 다음의 성경 말씀을 믿지 못합니다. 그들은 다음의 성경 말씀을 믿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 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3:16).

하나님은 우리들을 붙잡으시면 절대로 놓지 않으십니다. 이 사실을 잘 알지 못하면 그리스도인들도 때로는 고통을 받습니다. 여러해 동안 고통을 받다 보면 여러 명의 불신자들마저 당신의 믿음도 이럴 때는 소용이 없지 않습니까?” 라고 공격을 해 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 대부분이 믿음이 줄어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어리둥절하고 허탈할 때에도 오히려 믿음만은 강해져야 합니다. 다른 무엇에 기대를 가질 수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매달리 수 있는 유일한 희망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들의 피난처이시며 영원하신 팔로 우리를 붙들어 주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33:27)

(33:27) 영원하신 하나님이 너의 처소가 되시니 그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

고통의 시련들은 큰 축복들을 가져다줍니다. 베드로는 1:7절에서 금이 불로써 정련될 때 그 가치가 드러난다고 이미 지적했습니다. 귀금속이 정련사의 불을 통과하면 모든 불순물이 타 버립니다. 그래서 남은 것은 순금이며 깨끗한 은입니다. 이처럼 고난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순화시킵니다. 고난은 영광의 준비물입니다. 고난은 인생의 현실을 직시하도록 합니다. 우리는 고난 속에서 그리스도를 우리 삶의 제일로 삼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을 새롭게 깨닫게 됩니다.

고난받는 신자들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 끝날이 언젠가는 올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 날이 오면 우리들의 기쁨은 충만할 것입니다. 그 날은 그리스도의 영광이 계시되는 재림의 날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친히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21:4).

신자들은 지금도 그리스도를 위해 일할 때 세상 사람들의 멸시와 조롱을 자주 받습니다. 전도를 해 보면 금방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불신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욕설로 쓰기도 하고 그분에 대한 믿음을 비웃기도 합니다. “저희는 너희에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하지 아니하느냐”(2:7).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는 그 이름이 기독교와 동의어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섬기려고 하면 자연히 이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4:14)입니다.

베드로는 신자들이 모욕을 당할 때에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해 계심이라”(4:14)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매우 큰 위로가 됩니다. 예수님의 다른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15: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15:20)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부끄럽지 않은 고난

우리들은 가끔 수치스러운 일을 행할 때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말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4:15). 우리는 이런 괴악한 짓을 삼가야 합니다. 이런 악행들은 우리 자신에게 수치스러울 뿐 아니라, 우리들의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들 전체에 욕을 돌리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에 진정한 관심이 없으면서도 신자들을 걸어 넘어뜨릴 수 있는 구실들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당신은 베드로가 살인자와 도둑들과 같은 악행 자들을 언급하면서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도 같이 포함시킨 것을 주목하였습니까? 예수님도 간음과 악독 등을 열거하시면서 교만도 함께 넣으셨습니다(7:20-23). 이 세상이 죄라고 부르는 것만 나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불신자들로 하여금 우리 교인들의 신앙 고백에 침을 뱉게 하는 것은 뚜렷이 드러나는 죄들만이 아니라 가리기 힘들거나 뚜렷하지 않은 죄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를 영어로 몸이 바쁜 사람’(busybody)이라고 표현합니다. 자기가 상관할 일이 아닌데도 바쁘게 돌아다니면서 참견하고 말썽을 일으키는 자들이 교회에 있지 않은지, 혹은 나 자신이 그런 사람이 아닌지를 반성해 보십시오.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4:16).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원래 경멸 조의 별명이었습니다. 오늘날의 감리교인’ (Methodist)이나 침례교인’(Baptist)이라는 말도 처음에는 하나의 별명으로 붙여졌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은 성경에서 단 3회 사용되었습니다(본절. 사도행전11:26, 26:28).

(11: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컫음을 받게 되었더라

(26:28)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 도다

그러니까 베드로의 말은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경멸 조의 이름으로 불리더라도 수치스럽게 여기지 말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게 된 것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에 이렇게 썼습니다.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 에게요 또한 헬라인 에게로다

 

하나님의 뜻에 따른 고난

심판은 누구에게나 옵니다. 우리는 이 주제가 본 장에서 점철되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어느 날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서게 될 것이며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할 것입니다(14:10,12). 예수님은 마지막 때의 심판을 양과 염소의 분리로서 서술하셨습니다. 양들은 그들의 하늘 기업으로 들어가고 염소들은 마귀와 그의 부리는 자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갈 것입니다(25:31-46).

만일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들의 믿음이 증명되기 위하여 심판(벌이 아님)을 받는다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겠습니까?(4:17). 그들은 그리스도를 거절한 데 대한 벌을 크게 받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잠언 11:31절을 예시로서 인용하였습니다.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4:18).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을 얻는 데 있어서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여기서 말해 줍니다. 그는 예수님의 다음 말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7:14).

신자들에게는 구원을 이루어나가야 할 믿음 생활의 측면이 있습니다(2:12). 그렇다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론 아무도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불신자가 하나님을 예배하거나 사랑하지 않고 그분의 계명을 무시한다면 어떻게 구원을 받겠습니까? 베드로는 이 질문에 대해 답변을 주지 않습니다. 너무도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뜻에 따라 고난을 받는 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4:19)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23:46).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하나님께 우리 자신들을 안심하고 내맡길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모든 고통과 어려움이 닥침에도 불구하고 선을 행하는 가운데”(4:19) 살아갑니다. 베드로는 성도들의 선행을 줄곧 언급해 왔습니다(2:15, 20 3:6, 11, 17).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사랑과 긍휼의 선행을 계속하면서 하나님께 우리를 맡겨야 합니다.-은혜목회정보- 97.11 설교/박성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