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세례와 교회
예수 그리스도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그리스도로 고백한 베드로에게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마 16:18)고 말씀하시고,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 1:5)고 말씀하신 대로, 십자가에서 희생제물이 되어 죽으면서 흘린 피로 교회를 사셨고(행 20:28) 부활 승천하신 후에 성령을 보내어 세례를 주심으로 교회를 역사적으로 세우셨다.
성령세례로 그리스도가 교회를 오순절 날에 세우신 일에 관하여 신학자들의 견해는 거의 일치하고 있다. 퍼거슨(Sinclair B. Ferguson)에 의하면, 성령의 하시는 일은 개개인을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새로운 공동체 곧 그리스도의 몸을 창조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어 그리스도의 한 몸인 교회를 이루셨다.
에릭슨(Millard J. Erickson)은 좀더 확실하게 말하기를, 누가가 자신의 복음서에서는 “교회”(ἐκκλησια)라는 용어를 전혀 사용하지 아니했으나 사도행전에서는 24회나 사용한 사실에 주목하여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을 통해서 교회가 공적으로 조직된 교회로 탄생했다고 결론지었다.
차영배도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시고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엡 2:20) 오순절 성령세례를 통해서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교회들의 초석을 놓았다고 하였다.
로이드 존스(D. Martyn Lloyd-Jones)의 말을 들어보면 더욱 확실하다. 성령께서 오순절 날에 임하셨을 때, 즉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세례를 주셨을 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설립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피로 사신 교회(행 20:28)가 한 성령으로 한 세례를 받아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한 몸이 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고, 구약의 경우와는 달리 하나로 통일된 몸으로서의 교회가 세워졌다.
죠지 래드(George E. Ladd)는 반복해서 경험하는 성령충만과는 달리 “성령세례는 다양한 인종적 차이점들과 사회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영적으로 통일시킴으로써 그들이 그리스도의 몸 곧 교회를 이루도록 역사하는 성령의 사역이다”라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교회가 오순절 날에 성령세례로 탄생되었으며, 따라서 구약의 제자들은 단지 맹아적인 교회 즉 미조직 교회인 것이다. 래드가 강조하는 바에 의하면 성령세례는 공동체적이며 교회론적인 사건이다.
래드의 견해에 동의하여 이한수도 고전 12:13에 근거하여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된” 것의 신학적 의미가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통일된 그리스도의 한 몸 속으로 들어온 것”으로 이해하였다.
박형용의 견해도 이와 동일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부활, 승천에 이어 일어난 오순절 성령세례 사건을 통해서 교회가 설립되고, 그 교회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 및 땅 끝까지 전파되었다고 그는 말한다.
서철원도 성령강림 곧 성령세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자기 백성 가운데 내주하여 그들과 함께 거하심으로 교회가 세워졌고, 이방인들도 성령세례 받아 그리스도의 교회에 가입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성령세례의 성격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교회에게 주신 세례는 구원 역사적 즉 구속사적 사건인가, 아니면 구원의 서정의 한 요소인가? 그리고 성령세례는 단회적인가, 아니면 영속적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세례는 여러 신학자들에 의하면, 구속사적인 차원과 개인적인 차원이 있다. 구속사적인 차원에서는 영원히 반복되지 않는 단회적인 성령강림이요,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지속적인 성령의 사역이다. 즉, 구속사적인 차원에서는 그리스도의 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과 관련되어 있으며,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으로 변화되어 가는 성령의 지속적인 사역이다.
서철원은 성령세례의 구속사적 성격을 아주 분명하게 강조한다. 성령세례 곧 성령강림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귀결이고 완성이며 연장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근거하여 그리스도가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성령을 받아 보내신 것이다.
즉 성령강림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승천 이전에는 성령강림이 없었고, 불가능하였다. 그리고, 성령강림은 승천하신 예수의 자리에 대신 오신 것이기에 예수의 오심이요, 그들과 영원히 함께 거하기 위한(요 14:16) 오심이기 때문에 반복될 수 없는 단회적 사건이다.
서철원의 견해와 일치하여 박형용도 주장하기를, 사도행전 1:5에 근거하여 볼 때 오순절 성령사건은 구속사적인 성령세례 사건이라 하였다. 오순절 사건은 성도 개인의 구원 체험을 위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에 큰 획을 긋는 중대한 사건이다. 다시 말해서, 그에 의하면, 오순절 사건은 예수님이 성취한 구속 사건들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한 단회적인 유일한 사건이다.
그런데, 박형용은 고린도전서 12:13에 비추어 성령세례를 개인 성도의 구원 경험 곧 구원서정의 한 요소로 이해한다. 그에 의하면, 개인적 차원에서의 성령세례는 중생의 경험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을 개인 성도에게 최초로 적용시키는 일이 성령의 고유한 사역이요, 성령이 성도에게 믿음을 주시어 예수를 구주로 고백케 하시며 의롭다 함을 받게 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할 뿐 아니라, 성령세례를 통해서 교회의 회원이 되게 하기 때문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서철원도 이에 동의하여 이방인들의 경우 성령세례는 성령 받음이요 성령 받음이 중생이라고 말한다. 그에게는 성령세례=성령 받음=중생이다. 그리고 믿음과 성령받음이 불가분한 관계이므로, 믿음이 중생이고 성령받음이다. 즉, 그에 의하면, 성령이 임하자 이방인들이 예수 믿고 성령으로 세례 받아 그리스도의 교회에 가입한 것이다. 권성수와 이승구 등도 성령세례를 중생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박형룡의 경우는 중생을 회개와 신앙과 구별하여, 중생의 증거 곧 결과가 회개와 신앙이다.
성령세례를 구원 역사적 차원에서 이해하여 단회성을 주장하는 자들의 경우, 성령세례의 목적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임을 말하면서, 이 성령세례가 단회적으로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120명의 제자들에게 베풀어져 교회가 세워짐과 더불어 사도직이 소멸된 것과 관련하여, 사도들에게 주어진 은사들(방언, 예언, 지식, 신유 등)이 사도직의 소멸과 함께 중지되었다고 주장한다. 특히, 방언과 관련해서는 오순절파의 은사운동이 활발하던 때에는 방언이 일시적으로 많이 나타났으나 교회성장운동이 일어나면서 방언현상도 전세계적으로 크게 퇴조하여 거의 사라졌다고 말한다.
성령세례가 구속사적 차원에서 단회적임을 강조하는 견해에 반대하여 차영배는 성령세례를 구원의 서정 차원에서 영속적임을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더불어 구속사적 대사건이다. 또한 그리스도가 성취한 구원을 교회 안에서 성도들에게 성령이 적용하시는 차원에서 보면 성령세례는 구원의 서정에 속한다.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오순절 날 강림하시어 교회를 세우신 것처럼 그는 동질의 교회를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야 하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오셔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래서, 그에 의하면, 사도행전에 나타나 있듯이, 예루살렘교회 뿐만 아니라 사마리아교회와 이방인들의 교회들도 동일하게 성령세례를 받은 것이다. 차영배는 성령세례를 구원론적 차원에서는 은혜의 상태인 칭의와 영화의 상태인 성화를 연결하는 그리스도와의 신령한 연합으로 이해하였다.
한편, 능력적 은사들 곧 이적의 중지론을 주장하는 견해에 반대하여, 차영배는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성경의 완성과 함께 종결되었으나 그 계시는 운동력이 있고 지금도 역사하기 때문에 이적은 여전히 계속되며, 이로써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새롭게 하고 견고케 한다고 주장한다. 차영배의 의견과 같은 의미로 권성수도 능력적 은사들과 방언의 은사의 계속성을 적극적으로 인정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성령세례의 성격을 놓고 단회성과 영속성을 주장하는 두 견해가 대립되어 있다. 전자는 성령세례를 구속사적으로 보면서 좁은 의미의 중생으로 보는가 하면 기적과 능력적 은사들의 종결을 주장하는데 반하여, 후자는 구원의 서정으로 보면서 넓은 의미의 중생(성화)으로 보는가 하면 기적과 능력적 은사들의 계속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 상반된 견해들은 동일하게 그리스도가 그의 몸인 교회 설립의 경우만 성령세례를 인정하고 이후의 교회들의 경우는 단순한 성령받음이요 교회의 확산으로 이해하였다. 이로써 성령강림의 단회성을 뒷받침한 것이다.
그러나, 칼빈이 키프리아누스의 교회론에 근거하여 밝힌 대로,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이면서 동시에 여럿이다. 빛이 하나이면서 그 광선이 여럿이요, 나무의 줄기는 하나이나 가지들은 여럿인 것과도 같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보편적 교회는 하나이면서 동시에 지역적으로 많은 교회들이 역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지역 교회들이 모여서 하나의 교회를 이루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하나의 교회가 여러 지역 교회로 확산된 것도 아니며, 각 지역 교회마다 거룩한 전체 교회를 대표하는 독립된 영광스런 교회이다. 또한, 칼빈에 의하면, 교회는 성도들의 어머니요 학교로써 성령의 외적 은혜의 수단이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하나이면서도 지역적으로 역사적으로 여럿인 점을 고려하면, 그리스도가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베푼 성령세례는 단회적이면서도 다중적이요, 이 땅에 교회가 존재하는 한 영속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교회가 성령의 은혜의 외적 수단인 점을 고려하면, 그 교회를 세우는 성령세례는 외관상 구속사적 사건이면서도, 실제로는 그리스도가 성취한 구원을 교회를 통해서 성도에게 적용하는 구원의 서정 또는 구원의 상태와 관계된 성령의 사역이다.
-나용화 '성령세례와 충만에 대한 신학적 이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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