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자료

성서에 나타난 설교자들의 삶과 메시지_정장복 교수

'코이네' 2022. 3. 14. 00:07

 

성서에 나타난 설교자들의 삶과 메시지

정 장 복 교 수 (한일장신대 총장)

 

 

서 론

 

서론적 접근에 있어서 제 2바티칸 공의회의 결정사항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할 때는 당시의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고유한 성격을 지닌 것들이 많았습니다.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는 일반 신자들은 알지 못하는 라틴어로 모든 미사(예배)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430년 어거스틴의 죽음 이후 설교는 미사의 현장에서 사라졌습니다. 성경도 라틴어 성경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무도 성경을 자기 나라의 고유한 언어로 번역하지 않았습니다. 찬송 또한 라틴어로 되어 있어 모든 회중이 동참하기에는 너무나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의 영향이 그처럼 전 유럽에 삽시간에 파급되었던 것은 행함이 아닌 믿음으로 구원얻었다는 교리적인 이유보다는 얘배의 현장에서 모든 개혁의 요소들이 나타났었기에 가능하였던 것입니다.

종교개혁은 미사때 사용되는 언어를 바꾸었습니다. 자국의 언어로 예전을 집례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많은 사람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던 것입니다. 성경도 독일어로 번역되어 독일 사람은 자국의 언어로 성경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잃어버렸던 설교를 회복하게 되고 설교의 바람이 일어났습니다. 찬송도 독일어로 부르게 되었고 독일의 민요에 곡조를 붙여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완전한 혁명입니다. 개혁이 아닌 혁명입니다. 그럴 때 종교개혁이 전 유럽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이것이 개신교의 고유한 성격이요 내용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바라보았던 로마 카톨릭 교회는 자체 종교개혁으로 Counter Reformation을 시도했으나 불행히도 래트란회의에서 부결되어 버리고 아무런 변화없이 이전의 상황이 계속되었습니다. 만약 당시에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Counter Reformation이 통과되고 실천되었다면 개신교는 현재와 같은 세력을 유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1962~1965년에 있었던 제2바티칸 공의회의 의결로, 로마 가톨릭 교회는 그동안 개신교만의 고유한 성격과 내용이던 것을 없애 버립니다. 즉 제2바티칸 공의회에서는 다음과 같이 의결하였던 것입니다. 첫째, 미사는 현지어로 한다. 둘째, 설교를 철저히 한다. 각 신학교마다 설교학 교수를 둔다. 셋째, 성서를 자국어로 번역한다. 넷째, 찬송가는 그 나라 민속곡에 찬송 가사를 넣어서 부른다. 다섯째, 문화에 맞게 미사를 집행한다.

한국 천주교 교회에서는 얼마 전에 제사상을 차려놓고 수저를 꽂아 놓는 것도 허용한다고 결정했습니다. 엄청나게 발전적으로 전래 문화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근 500년 동안 간직되어 왔던 개신교만의 고유한 성격들이 로마 카톨릭 교회에 의하여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이제 개신교와 가톨릭의 차이는 없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는 많은 엘리트 계층들이 종교를 결정할 때에 천주교를 택하는 것을 봅니다. 그들은, 개신교에는 엄숙한 예전이 없는 것 같고 설교도 만담 비슷하여 예화나 늘어놓는 것 같아 남는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개신교는 바른 설교의 전파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본 론

 

설교자는 언제나 이상적인 설교가를 마음에 두고 성장을 꾀하며 모방을 하려고 합니다. 그 설교자의 삶과 설교세계를 유심히 보면서 자신이 추구할 설교의 방향과 그 이상을 설정합니다. 이러한 과정은 유능한 설교자가 되려는 꿈을 가진 사람에게는 일찍부터 마음에 자리잡은 삶의 중요한 형태가 되고 있습니다.

자신이 따르고 싶은 이상적인 설교자를 정할 때 흔히들 자신 앞에서 설교하는 인물이나 또는 기독교 역사 속에 설교의 거성으로 남은 인물들을 스스로 설정합니다.

21세기의 문전에서 설교 사역을 좀더 깊이 생각하고, 참된 설교자 상을 찾는 한국의 설교자들은 그 대상이 다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기독교 설교자들이 가장 기본적인 이상과 기준으로 삼아야 할 설교자는 역시 성경에서 나타난 설교자들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21세기는 교인들이 보다 높은 차원의 세계를 달리는 설교자들의 설교를 들으려고 할 것입니다. 많은 수입과 훌륭한 차와 좋은 집과 풍성한 삶을 위해 설고자의 위치를 구축하려 한다면 문제입니다. 메시지와 삶이 일치하는 교회의 설교자만이 21세기를 주도하는 목회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설교자에게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를 먼저 살펴본 후에 성경에 나타난 설교자의 모습을 살펴 보겠습니다.

예레미야 1414절에는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하거나 이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거짓 계시와 복술과 허탄한 것과 자기 마음의 속임으로 너희에게 예언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언이란 하나님께서 맡기신 말씀입니다. 즉 설교입니다.

예레미야 2332절에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거짓 몽사를 예언하여 이르며 거짓과 헛된 자만으로 내 백성을 미혹하게 하는 자를 내가 치리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며 명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들이 이 백성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에스겔 1319절에는 너희가 두어 움큼 보리와 두어 조각 떡을 위하여 나를 내 백성 가운데서 욕되게 하여 거짓말을 곧이 듣는 내 백성에게 너희가 거짓말을 지어서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이고 살지 못할 영혼을 살리는 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설교자는 자신의 말을 지어서 하는 자가 아닙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위탁받아 전하는, 말씀의 사자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맡은자는 말씀을 위탁받은 자로서 자신의 삶을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말씀의 사자는 칼빈이 말하는 전권대사로서 모두가 오늘 우리가 봉독한 예레미야 1414, 2332, 에스겔 1319절에 나온 자들처럼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운반하는 사람이 설교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그대로 운반하는 자들입니다. 그러한 존재로 부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이용하거나 자신의 생각으로 짜맞추어 외치는 존재가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의 내용은 이러한 뜻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 말씀이 바로 이 현장에 필요한 말씀이라고 운반해 주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저는 설교자의 정체성을 정의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의 운반자라고 표현합니다. 설교자는 말씀의 운반자일 뿐입니다. 결코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 자기 마음대로 쏟아붓는 자가 아닙니다. 이것을 기억하면서 설교의 현장에서 사역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성경에 나타난 설교자들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모든 설교자들을 다 언급할 수 없다는 제한성을 먼저 제기하면서 설교의 성격에 따라 그 대표적인 설교자 네 명을 찾아 그들의 삶의 형태와 그들이 남긴 설교의 형태를 현대 설교의 이론에 따라 분석해 보겠습니다.

 

1. kerygmatic 설교자 베드로

 

베드로가 외친 설교의 성격

kerygmatic이란 선포하다” “나팔을 분다는 뜻입니다. kerygmatic preaching이란 전도설교, 선포설교라 이름을 붙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선포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일곱 가지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오심, 그의 생애, 그의 교훈, 수난, 부활 그리고 그의 승천과 재림 등 예수 그리스도의 일곱 가지 사건을 집중적으로 메시지화 하여 외친 것이 케리그마 설교입니다.

현대 설교학에서는 본 설교를 선포적인 설교(kerygmatic preaching) 또는 전도설교라고 이름하면서 기독교 설교의 가장 기초적인 형태로 정의합니다. 이 설교가 없이는 기독교의 복음이 바르게 선포될 수 없으며 기독교의 내용이 빠지게 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베드로는 기독교의 초석이 되는 바로 이 복음을 외친 설교자입니다.

 

베드로의 생애

첫째, 뜨거운 신앙을 소유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와 관련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물 위로 걸어오시는 주님을 향하여 자신도 걸어가기를 요청하였고 허락이 떨어지지마자 물 위로 뛰어들어 가던 모습입니다. 참으로 겁없이 주님을 사랑했고 그를 따르던 뜨거운 신앙을 소유했던 자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외치는 설교자는 어떤 경우에도 출발 지점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복음을 외치는 설교는 뜨거운 신앙과 열정적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 진정한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리처드 박스터는 루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루터는 죽어가는 사람으로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한 사람이었다. 그는 임종 3일전까지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그에게는 주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열정이 있었습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자신이 견딜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신앙의 열정이 진실된 설교자의 출발 요건입니다.

둘째, 천추에 한이 된 실패의 쓴잔을 마신 사람입니다.

설교자가 완전히 성화되어 설교자로 출발한 이후 죽을 때까지 그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다면 그 메시지가 상처받은 영혼과 만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설교자로서 부름받은 이후로 한이 될 수밖에 없는 실패의 쓴잔을 마시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실패의 쓴잔은 나를 다시 일으켜서 주님 앞으로 더 가까이, 충성된 종으로 다가서게 하는 요소입니다. 우리는 지나간 실패의 쓴잔으로 인하여, 그리고 오늘 당하는 실패의 쓴잔으로 인하여 괴로워하거나 슬픔속에 오래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우리는 주님을 더 뜨겁게 사랑하고 베드로와 같은 설교자가 되리라는 비전을 마음에 품어야 하겠습니다.

셋째, 별다른 열정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순교로 자신의 실패를 만회한 주님의 제자 베드로의 삶 속에서 설교자의 삶을 지켜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소명을 받았을 때에는 참으로 뜨거운 감동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 뜨거움을 아무리 회복하려고 해도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고민입니다. 10대 때에 시골교회의 마룻바닥에 엎드려 추운 겨울 새벽마다 기도하던 생활, 시골 논두렁을 오며가며 찬송을 부르던 모습, 어머니에게 닭을 팔아달라고 하여 사경회에 참여하면서 철야를 하던 그 뜨거웠던 신앙의 열정이 지금은 모두 다 사라져버린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뜨겁게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실패의 잔을 마시기도 합니다. 지금은 물질만능의 시대가 되어서 더 잘 살고, 더 화려하게 자신의 삶을 꾸미려는 욕망으로 살고 있습니다. 물질만능의 풍조에 푹 젖어 있습니다. 우리가 그 일에 앞서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치와 방종에 젖어 근검 절약은 뒤로 미루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넷째, 순교로 실패를 만회한 주님의 제자였습니다.

베드로는 복음의 설교자로서 하늘을 바라보며 죽을 수 없다며 나는 발끝으로 피를 흘려가며 죽을 존재가 못 된다.”라고 하며 거꾸로 십자가 못 박혀 죽는 생의 종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단을 가지고 사는 삶이기에 복음의 메시지에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삷의 자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이 이러한 삶을 사셨습니다. 그분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죄를 위햐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의 구원자입니다.”라고 복음의 메시지를 전할 때에 모든 사람들이 그 앞에 거꾸러지면서 3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같은 삶의 자세가 없이는 그러한 설교가 우리에게서 나오기 어렵습니다. 설교자에게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신앙이 있을 때 상처받은 영혼을 치료할 수 있는 설교를 할 수 있습니다.

 

2. didatic 설교자 바울

 

바울이 외친 설교의 성격

didactic이라는 말은 교훈이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그를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믿는 사람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서의 삶의 규범이 필요합니다. 기독교 예배 공동체의 사람들이 된, 성도들에게 바른 길을 가르치고 그 가르침에 의하여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을 지속시켜야 하는 메시지를 가리켜 현대 설교학에서는 교훈적인 설교또는 교리적인 설교라고 합니다.

일찍이 영국의 신약신학자였던 C. H. Dodd사도들의 설교의 원형과 발전이라는 책에서 설교의 종류를 두 가지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베드로의 복음적인 설교이며 다른 하나는 바울과 같이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에게 어떠한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가르침을 주는 설교로 분류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수많은 서신서들을 통하여 어떻게 하면 기독교인들이 바르게 하나님을 섬기고 믿고 생활할 것인가에 대하여 가르쳤습니다. 바울은 이방인들이 기독교에 들어올 때 이방종교의 삶의 본질들을 벗어버리고 기독교의 참된 교리와 신학과 삶의 내용이 바르게 지켜질 수 있는 메시지를 외친 설교자였습니다.

 

바울의 생애

첫째, 지식의 정상을 달리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만큼 지적인 사람이 없습니다. 바울은 성경에 나오는 어느 누구 보다도 지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지식은 설교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지만 그 지식이 설교자보다 앞설 수는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할 수 없는 핍박 가운데서도 자신이 가진 지식을 도구로 자랑하거나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그의 생애를 보석처럼 빛나게 했습니다.

둘째, 기독교 박해의 선봉장이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박해하던 박해자에서 사도로 변신한 사람입니다. 오늘날에도 기독교를 박해하던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여 하나님의 종으로서 헌신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바울은 다메섹의 회심 이후 온전히 하나님께 헌신된 사람이었고 주를 위하여 순교의 삶을 살아갔습니다.

셋째, 살아도 죽어도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하는 설교자였습니다.

바울이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는 설교자였음을 증거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14:8). 설교자의 삶의 철학은 어디에 있습니까?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서 죽고,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서 산다는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내가 사나 죽으나 주님의 말씀을 운반하는 운반자로서의 부끄러울 것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삶의 철학으로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 이 땅에 많아질 때 한국 교회는 세계의 교회로 우뚝 세워질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3. 소망을 심어주던 설교자 이사야

(therapeutic Preaching)

 

고유한 이사야 설교의 기본 초점

본 설교는 일명 목양 설교 혹은 위로 설교, 치유설교라고도 합니다. 즉 어려운 시대의 혼탁한 물결에 상처를 입고 괴로워하는 심령들을 찾아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의 메시지를 전해주는 특유한 형태의 설교입니다.

현대인들이 자신의 혼돈된 죄악과 상처와 고독한 삶에서 가장 호감을 나타낸 설교가 위로설교입니다. 용서와 위로 속에서 소망을 갖게 하는 목양의 설교는 현대설교학에서 새롭게 평가를 받는 설교입니다.

이사야는 당시의 정치와 사회의 부패상을 예리하게 지적하는 선지자의 사명을 다하면서도 메시지의 초점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두었습니다. 그는 구원과 위로의 메시지를 중심으로 설교했던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메시지를 사실적 형태(indicative mode)를 취하여 설화체 형태로 메시아에 관한 메시지를 외쳐 십자가를 지신 어린양의 희생 현장을 실감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러기에 이사야는 이 부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 메시아적 복음을 외치던 으뜸가는 설교자의 이상으로 나타납니다. 물론 이사야 선지자는 사회 현실에 대하여 정의를 외치고 비판하는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지만 그의 메시지에는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새로운 세계가 전개된다는 구원의 복음이 중심 내용이었습니다. 이 복음은 현대 설교자들에게 대단히 인기가 있습니다.

1960년대 초반에 한 설교자가 등장합니다. 그에게서 성령의 이름으로 위로의 설교가 터져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전쟁 이후 사람들이 가난과 상처와 혼돈 그리고 무질서 속에 있을 때 그는 성령으로 영혼도 잘되고 범사도 잘되고 강건하게 된다는 메시지를 외쳤습니다. 이 위로의 설교는 대단한 능력을 동반하여 많은 기존의 교인들 특히 장로교 교인들이 많이 그곳으로 갔습니다.

이처럼 위로설교, 목양설교를 현대인들이 많이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쪽으로만 치우친다면 문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의 자녀들이 쌀밥과 소고기만 좋아하고 다른 음식은 먹기를 거부한 다고 할 때, 그 자녀에게 쌀밥과 소고기만을 먹일 부모님은 안 계실 것입니다. 자식을 사랑할진대 편식을 시킬 부모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자식에게 골고루 영양분을 섭취하게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편식을 시켜서 교인을 병들게 하는 것은 설교자의 죄입니다. 문제를 잘 파악하는 설교자가 참으로 이 시대에 필요한 설교자입니다.

 

이사야의 생애

첫째, 남유다의 귀족 출신 설교자였습니다.

이사야는 웃시야에서 히스기야에 이르는 4대 왕의 통치기간(B.C 750~695)에 예언한 궁정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왕족으로 요아스왕의 손자였고 아모스의 아들이며 모든 선지자 중 대선지자또는 선지자들의 왕이라 불리었습니다.

우리 한국에서도 복음이 가난한 자나 천민에게만 전해진 것이 아니고 귀족층에도 많이 전해졌습니다. 특히 성공회는 귀족층인 양반들이 많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의 예전과 말씀이 양반 사회의 정서에 맞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설교자는 과거의 신분이나 자신의 내력에 대해서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설교자는 허탄한 자랑과 인간의 말을 해서는 안되며 이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용납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설교자가 과거의 자기 신분에 도취되어서 오늘도 거기에 맞는 대접을 받으려 하는 사람들에게 진노하십니다.

둘째, 주저함이 없이 응답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름 앞에서 대답하기를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했습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뜨겁게 응답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소명에 응답하는 사람만이 참된 설교자로서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한국의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뜨거운 소명으로 불타는 설교자가 한국의 설교자입니다. 문제가 있다면 물질 문명과 우리를 안일하게 만드는 이기적인 것들에 쉽게 타협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극복할 수 있다면 참으로 좋은 설교자의 자격을 갖춘 일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셋째, 메시아의 노래와 그의 고난을 먼저 본 설교자였습니다.

이사야는 미래지향적인 설교를 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날을 고대하면서 여호와의 날에 초점을 맞추고 끝까지 충성하면서 나아갔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이 본받아야 할 모습이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사야 50장 이하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메시아의 노래와 그의 고난을 먼저 본 설교자였습니다. 그러므로 메시아의 고난의 노래를 통하여 백성들은 많은 위로를 받았던 것입니다.

 

4. 사회정의와 회개를 외치던 설교자 세례 요한

(social-prophetic preaching)

 

세례 요한이 외친 설교의 성격

성경에 나타난 설교자는 한결같이 사회정의를 외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세력들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정의의 메시지를 들어야 했습니다. 선지자들은 왕실의 부패를 예리하게 지적하면서 심지어 생명을 바쳐 주의 말씀에 헌신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운반하고 전하는 선지자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의로운 나라와 그 백성을 만드는 데 조금의 양보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설교를 설교학에서는 사회와 개인을 향한 예언적인 설교라고 합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에게 어떠한 결과가 올 것인지 잘 알면서도 개인을 향하여서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부르며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그리고 헤롯왕에게는 그의 결혼이 바른 길이 아님을 서슴없이 지적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는 목이 잘려 쟁반 위에 놓인, 보기 드문 순교의 설교자로 남게 됩니다. 바로 그는 생명을 내어 놓고 설교사역을 감당한 순교적 설교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특유한 삶을 보여준 세례요한

첫째, 사명감에 불타는 금욕과 청빈의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에는, 의인이 없는 민족은 망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의인 10명이 없어서 불과 유황으로 멸망하였습니다. 예레미야 51절에서는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지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라고 말씀하면서 한 사람의 의인을 강조합니다.

우리 한국 교회에도 세례 요한과 같이 청빈한 삶을 살아가는 의인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북한이 이 나라를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말하는 그 위기 가운데서도 우리가 보호받고 있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어디서인가 보이지 않게 농촌에서 교인 한두 명을 섬기면서 자기 생애를 바치며 새벽마다 하나님과 뜨겁게 기도하며 영교하는 아름다운 의인들의 기도가 우리 주변에 있기에 우리는 지금도 건재하고 있다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 설교자들은 이 의인의 반열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강직하고 검소한 삶의 설교자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제사장 가문에서 율법을 통달하였습니다. 그는 잘 살 수 있었습니다. 조건이 갖추어져 있기에 욕심을 낸다면 남부럽지 않게 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늘 검소한 삶을 살았습니다. 외제에 눈을 번뜩이는 사람과는 상대도 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간 사람입니다. 강직하고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옳다고 생각되는 것은 어떠한 타협도 없이 끝까지 견지해 나가는 설교자의 모습을 세례 요한에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셋째, 불의를 묵과하지 않은 설교자였습니다.

설교자가 반드시 기억하고 지켜야 할 삶의 자세는 불의에 대하여 묵과하지 않는 것입니다. 설교자가 불의에 대항하여 옳고 바른 것을 외치지 못한다면 그 설교자는 죽은 생명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 유신정권과 5, 6공화국을 거치면서 너무나 많은 압제와 안기부의 통제로 인하여 바른 말을 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이제 우리도 군인이 아닌 민간인 대통령이 통치하는 시대를 맞았습니다. 바른 것은 바르다고 이야기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저는 지난날 바른 말을 외치다가 감옥생활을 하였던 선배 목사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 목사님께서 동참하려는 후배들에게 두 가지의 사실에 자신 있는가를 묻습니다. 하나는 여자에 대한 스캔들이 없고 미인계에 넘어가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였고, 다음은 돈에 대하여 깨끗할 수 있으며, 고문을 견딜 수 있느냐는 물음이었습니다. 그분은 순교자의 무덤 앞에 가셔서 늘 자기 점검을 계속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순교를 각오하고 나섰던 분이셨습니다. 반공포로였던 그분이 자신을 공산주의자로 모함하는 자에게 반공강연을 하시기도 했습니다.

불의를 묵과하지 않은 설교자는 대한민국에 몇 사람 되지 않습니다. 저도 불의를 보고 묵과한 사람 중의 한 사람입니다. 저는 5.18사건을 TV로 보고서 8월 초에 귀국했습니다. 그러나 엄청난 고문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하여 불의에 대하여 묵과했습니다. 괴로운 하루하루였습니다. 불의에 동참하지는 않았으나 당시의 불의에 대하여 말하지 못하고 묵과한 설교자로 지금 여기에 서있습니다.

이제는 말해야 합니다. 잘못하는 것이 있다면 그 잘못에 대하여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불의에 대하여 눈감아 주는 것이 도와주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자들은 예언자로서 말씀의 사역에 충성해야 합니다.

지난날 미가서를 봉독하던 설교자를 법정에 고소했던 시대에 우리는 살았습니다. 더 아픈 현실은 그분을 법정에 고소했던 검사가 바로 장로교 통합측 장로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말없이 굽신거리며 살아왔던 우리의 과거의 모습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설교자는 불의에 대하여 묵과해서는 안됩니다.

 

맺는 말

 

오늘날 한국 교회의 강단에는 어떠한 형태의 설교자들이 주역을 담당하고 있습니까? 자신의 메시지의 성격은 어떤 것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습니까? 생각해 보면 우리 한국 교회의 절대수의 설교자들은 양들이 원하는 음식만을 제공하면서, 그들을 이끌고 가는 설교가 아니라 그들에게 끌려가고 편승해가는 불행한 설교사역을 감당하고 있다는 진단을 하게 됩니다. 그 결과로 편식을 계속하여 양들의 정신과 육체는 병이 깊이 들어가고 있습니다.

성경의 위대한 설교의 거성들이 보여준 흔적을 우리 자신의 설교사역에서 적용할 수 있는 길은 정녕 없는 것인지 반성해 볼 시점에 와 있습니다. 특별히 물질만능(materialism)에 도취되어 있는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메시지는 어떤 것들이어야 하고 그 메시지를 전하는 설교자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지 21세기의 목회의 장에 돌입하는 한국의 설교자에게 깊은 관심을 촉구하는 문제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사랑하는 양들에게 비타민 A,B,C,D를 고르게 먹여서 건강하게 만들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설교는 크게 분류하면 네 가지로 나눕니다. 복음적인 설교, 교훈적인 설교, 위로의 설교, 예언적인 설교 등입니다. 이것은 비타민 A,B,C,D와 같습니다. 만약 우리 자녀가 비타민A만 달라고 고집한다면 계속해서 그것만 줄 부모님은 없습니다. 설교자는 양들의 영혼을 강건하게 유지시켜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양들이 싫어하든지 좋아하든지 비타민 A,B,C,D를 골고루 먹여야 합니다. 복음적인 설교이든, 교훈적인 설교이든, 위로의 설교이든 그리고 예언적인 설교이든 고르게 먹어야 합니다.

문제는 네 가지 유형의 설교에 대한 비율을 어떻게 하느냐입니다. 먼저 선포의 설교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설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생애와 교훈과 수난, 부활 승천, 그리고 재림에 대한 내용이기 때문에 참으로 중요한 설교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30%에서 35%의 비율로 설교하면 되겠습니다.

다음으로 교리적 혹은 교훈적인 설교는 20%에서 25%의 비율이면 되겠습니다.

위로의 설교는 현대인들이 제일 좋아하는 설교입니다. 그러므로 위로의 설교, 목양의 설교는 30%~50%의 비율이면 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언적인 설교는 자주하게 되면 많은 역작용을 가져오는 부분들이 있기 때문에 10%에서 15%의 비율로 설교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보통 때에는 전혀 전하지 않다가 열 편의 설교를 한다면 마지막 열 번째에 깨끗하게 개인의 회개를 촉구하고 이 나라의 부정과 부패 그리고 지도자의 잘못을 세례 요한처럼 지적하는 설교를 한다면 좋은 설교가 될 것입니다.

설교자가 그의 양들에게 편중된 내용의 설교만을 전함으로써 교회를 기형적으로 성장시킨다면 그것은 설교자의 잘못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자신이 전하는 설교에 대하여 책임있는 응답을 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