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요한복음

[요 9:1] 당신의 운명을 바꾸라

'코이네' 2024. 2. 3. 20:16

 당신의 운명을 바꾸라

본문 : 요한복음 9 : 1 -3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얄궂은 운명으로 태어나 자신을 저주하며 살아 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께서 길을 가실 때 이 소경된 사람을 보시게 되었는데 제자들이 묻기를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이냐고 물었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그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한 것과 같이 어떤 사람이 고 난을 당하는 것은 그 부모나 자신에게 죄의 결과로 오는 것이라고 느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하고 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가 그를 불행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소경을 운명적인 존재로 단정하지 않으시고 무한한 가능성을 제시하셨으며, 미래에 되어질 창조적이고 긍정적인 삶을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고자 히-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하신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불행한 모든 운명의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와 창조의 가치를 부여하는 말씀이올시다.

모든 불행을 숙명적으로 해석하는 불교나 유교의 영향을 받은 한국 사람들은 소경으로 태어난다든가 불구자가 되면 평생 거지나 인생 낙오자로 생을 저주하며 살다가 죽어 버리는 것이 당연지사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인생고의 불행이 자기 앞에 휘몰아칠 때 운명으로 맡기고 생을 저주하며 불행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나. 이 역사 속에는 무수한 사람들이 고난에 직면하고 있지만 그 고난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보람을 느끼면서 성공적인 인생으로 승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간은 어떠한 환경에서나 가혹한 운명의 회오리바람이 거세게 휘몰아칠지라도 자신의 운명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창조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불행한 자들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여 주셨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운명에 맡겨 살도록 하지 않으시고 불행한 운명을 바꾸어, 보다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도록 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회를 편히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배우라' 인생고의 모든 문제를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고 따를 때 비로소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가는 곳마다 병든 자를 고쳐주셨고, 배고픈 자들에 게 빵을 주셨으며, 슬퍼하는 자들에게 위로를 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가난한 자들에게 부요함으로, 실패한 자들은 성공적인 삶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죄인들을 의로운 사람으로 바꾸어 주셨고, 쓸모없는 인간들을 쓸모있는 인간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가 저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이 세상의 방법과는 다른 차원에서 해결하기도 했습니다. 부모를 잃은 자는 부모를 잃은대로, 날 때부터 소경된 자는 소경된대로, 그 환경과 현실에서 삶의 의미를 느끼며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그리스도를 통하여 여러분의 운명이 바뀌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우리는 자신에게서 삶의 가치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에게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는 예수님의 대답은 그 어떤 사람도 존재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산다고 하는 것은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할 일이 없다는 것은 죽은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우리의 주변에는 자아의식에 대한 서로 상반되는 두개의 가치관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비교 의식이며, 다른 하나는 창조 의식입니다. 많은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외모, 재능, 환경, 직업을 보면서 자기 자신을 평가 비교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러한 비교의식을 통하여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났을까?'하면서 자기 존재에 대한 회의에 빠지고, 불만스런 현실에서 반항하고 원망하며 생을 포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창조 의식을 소유한 사람은 이 세상에 절대로 나와 유사한 다른 존재는 하나도 없음을 깨닫고 나는 나로서 삶의 가치를 인정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에게 창조 의식을 일깨워 주신 것입니다. 인간이 살았다고 하는 자각은 여기에서 부터 출발하며, 비로소 사명을 받은 인간의 존엄성을 자신에게 발견하게 됩니다.

한국 맹아의 기적을 낳은 한 인물, 양 정신 목사가 있습니다. 그는 일곱살에 맹인이 되어 아무 쓸모없는 아이로 멸시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때로는 집에서 쫓겨나 남의 집 처마 밑에 누워서 개들이 따스하게 해주는 체온으로 밤을 지새우기도 하였습니다. 정녕. 눈물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불쌍하고 가련한 아이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집을 방문한 교회 여전도사닝으로부터 '네 부모는 너를 버릴지라도 하나님은 너를 영접하시리라(시편 27:10)는 간곡한 위로의 말씀과 기도에 용기를 얻고 어린 정신은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모든 사람들이 나를 쓸데없는 것이라 하는데, 이 쓸모없는 것이 살아서 무엇 할까요? 하나님은 내가 쓸 데가 있으신가요 ?' 이렇게 기도할 때 그녀의 마음속에 이런 응답이 왔습니다. '너는 눈이 안 보여 네 눈이 쓸데없지만 네 몸에 남아 있는 것을 헤아려 보라. 지금 너에게는 남은 것이 있으니 못쓸 것은 하나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쓸 수 있으니 두 귀가 있고 코와 입이 았으며 손과 발이 있지 않느냐 ?'

그때 그녀는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하나님, 이제 죽지 않고 살아서 오직 눈을 감은 채로 열심히 일하겠나이다'하고 감사를 하였습니다. 입으로 주님을 증거하고 귀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 손으로 하나님을 더듬어 찾겠습니다'라는 뜨거운 신앙의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녀는 삶의 가치를 발견하였습니다.

과연 그녀는 할 일을 찾았고, 눈은 안 보였으나 눈 뜨고 보는 우리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쓸 수 없다고 내버린 인간 부스러기, 고장난 인간, 앞 못 보는 한 소녀를 들어서 하나님께서는 깜짝 놀랄 일을 하셨으며 지금도 계속하고 계십니다. 지금 양 정신 여사는 대학교의 강사로, 교회의 목사로, 글을 쓰는 문인으로 일하고 있으며 엄청난 운명의 변화를 가져온 것입니다.

인간이 참으로 행복을 느끼며 감격스런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은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간에 주를 위하여 일하는 데는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생의 의미를 찾을 수 도, 느낄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할 일을 찾는 백성, 할 일을 찾는 교회, 할 일을 찾는 목사, 할 일을 찾는 교인이 되자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은 그의 확신이나 재능이나 외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이든지 오직 주님을 위하여 할 일이 무엇인가 찾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다메섹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후 제일 먼저 터뜨린 기도가 주여,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22 : 1o)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실망과 불행을 모르고 일생을 살아간 것은 환경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 그의 할 일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로망로랑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가라, 그리고 죽으라. 반드시 죽을 운명을 타고난 그대들이여 ! 가라, 그리고 괴로워하라. 반드시 괴로움을 겪어야 할 그대들이여! 산다는 것은 행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산다는 것은 나의 할 바를 다하기 위해서이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주어진 운명을 감사하는 자에게 반드시 그 운명을 바꾸어 주십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면 환경을 변화시키고 운명을 바꾸어 놓게 됩니다. 슈바이쳐 박사는 '내게 주어진 운명을 운명으로 알고 감사하는 것은 지극히 큰 축복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감사를 잃지 않는 사람은 삶의 놀라운 축복을 받고야 맙니다. 자기의 현실에서 불평과 원망을 하는 사람은 삶 전체를 저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의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은 감사가 곧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되 삶 전체를 감사로 드려야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좋으신 분으로 신뢰한다면 언제나 결과를 좋게 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로마서 828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하였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옥중에서 감사할 때 옥문이 열리고 간수가 전도되었으며, 빌럽보 지방의 전도의 문을 열게 된 것입니다. 어떠한 환경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됩시다. 고통과 절망이 변하여 기쁨과 축복을 가져오는 진리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남북 전쟁 때, 남방의 한 이름 없는 병사가 쓴 시가 있습니다.

'무엇이나 얻을 수 있는 힘을 달라고 하나님께 구했으나 나는 약한 몸으로 태어나 겸손히 복종하는 것을 배웠노라. 큰 일을 하기 위하여 건강을 요구하였더니 도리어 몸에 병을 주어 더 좋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노라. 부자가 되어 행복하기를 원했으나 나는 가난한 자가 되므로 오히려 믿음으로 부요하게 되었노라. 한번 세도를 부려 만인의 찬사를 받기 원했으나 나는 세력 없는 자 되어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노라. 삶을 즐기기 위해 온갖 좋은 것을 다 바랐지만 하나님은 내게 생명을 주사 온갖 것을 다 즐길 수 있게 되었고, 내가 바라고 원하는 것은 하나도 받지 못하였으나 은연중 나는 희망찬 것을 다 얻었나니 나는 부족하지만 내가 간구하지 않았던 더 좋은 것으로 다 응답되었다.'

 

셋째, 어떠한 고난이 우리에게 임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인간이 참으로 나를 알고 나를 사랑하고 나를 용납하고 나를 성숙 시키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아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을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를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2:10)

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하여 만들어진 하나의 작품입니다.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이 신기하고 놀라운 작품인 나 자신을 발견할 때 비로소 모든 경우에 삶의 뜻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어떤 고난도 불행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습니다. 이 뜻을 알면 자기에게서 창조의 형상을 새롭게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의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 니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주가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너에게 족하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바울은 질병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이 고통이 제거되는 것이 그의 원하는 바였으나 하나님의 뜻은 그 가시가 바울의 몸에 있으므로 영광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한 바울은 그 고통을 지니고 사는 것으로 기뻐할 수가 있었습니다.

내게 되어진 일 하나하나를 기도하는 가운데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뜻을 찾으면 더욱 의미가 있고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간디는 말하기를 '고난은 인생을 하나님께로 이끈다'고 하였습니다. 인류의 모든 역사 가운데서 위대한 사람들은 인생의 수 없는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께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신앙은 애굽의 압박과 광야의 고생 중에서 자라났고, 인도의 철학은 다른 민족과 사나운 자연과 싸우는 동안에 브라만에 이르렀고, 지옥에 가는 길이 넓고 평펑하게 포장되었다면 하나님께로 나가는 길은 고난과 가시로 포장된 길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고난이 임할 때 곧 회개하는 기회임을 알아야 합니다. 탕자가 굶주리고 고난을 겪은 후에야 자기 죄를 발견하고 아버지 집을 찾는 것처럼 인간은 고난이 임할 때 회개하는 심령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고난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고 한 걸음 하나님께 나아가게 만들어 줍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인간들의 어떠한 블행과 환경도 능히 승리로 바꿀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를 불행에 울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려 도움의 손길을 펴고 계십니다. 우리는 바울처럼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고난을 통하여 위대한 생을 창조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마 위에 깊은 주름살이 깊을 때 마음속에 심오한 지혜가 생기고, 살을 뚫는 상처가 있을 때, 그 영혼에서 솟아오르는 향기가 높습니다. 생명의 깊은 뜻은 피로 쓰는 글과 눈물로 그리는 그림으로만이 나타낼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만고에 길이 남을 불멸의 저서를 남기게 된 것은 평안한 별장의 침대 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춥고 어두운 감방 속에서 창작된 것입니다. 만약에 사도 바울이 사형 선고를 받은것 같은 마지막 소망까지 끊어지는 고독과 고난이 아니었던들 그토록 위대한 서신이 나오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위대한 사상과 신앙과 인격은 다 고난의 산물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무사안일을 원하는 것보다 수 없는 시련을 보다 가치있게 창조하는데 더 큰 보람이 있고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환난을 당할지라도 그 환난의 친구가 되고 우리 인생을 유익하도록 만들어주자는 것입니다.

믿음이 고난을 이기는 것입니다. 여기에 인생고의 해답이 있습니다. 우리가 원치 않는 불행한 환경도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 들이십시다.

지금 우리는 우리의 실패와 불행한 환경과 가흑한 시련을 도피주의자의 방법으로 응하지 말고 정중하게 직면하여 이 가시를 승리의 면류관으로 바꾸어 놓아야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삶의 보람과 승리의 벅찬 감격을 소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