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고린도서

[고전4:2] 충성된 종

'코이네' 2022. 1. 1. 21:20

 

충성된 종

 

본 문: 고전 4: 1-13

 

 

우리 하나님의 은혜가 말씀 듣는 여러분 위에 풍성하시기를 축원한다.

오늘 우리들이 여기에 모인 것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하여서이다. 안식일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율법을 따라 성전에 모인 백성들과, 주의 부활을 기뻐하여 안식후 첫날 자리를 같이한 초대교회는 예수를 구주로 한 신앙 공동체임이 분명하다. 이 신앙공동체 속에서 발견되는 것은 ①사도들의 가르침이 있었고, ②교제하는 것과 ③떡을 떼는 것 그리고 ④기도하는 일이었다. 이와 같은 공동체 속에 핍박이 쏟아지면서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흩어져 있는 곳에서 복음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말씀의 실천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마 28:19-20 에 기록된 이 말씀은 주님의 지상명령이다. 교회는 이 과업을 수행하기 위하여 땅 위에 세워졌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일'을 위하여 일군들을 세웠다.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죄의 종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종이다. 자기 중심의 삶이 아니라 예수중심의 일꾼들이다. 사람들은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핍박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그리스도인들은 아골골짝이나 소돔같은 거리에도 언제든지 찾아가 헌신하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그러나 현대에 접어들면서 교회가 일군을 필요로 하고 헌신을 요구하게 될 때, 사람들의 대답은 불행하게도 그 일에서 제발 나를 빼달라고 한다. 도무지 헌신을 다짐한 사람의 모습이 아닌 것이다.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 나라의 청지기들이다. 청지기는 관리인이다. 새로 출간된 표준새번역본을 보면 본문 1절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이와 같이 누구든지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관리인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런 경우에 관리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신실성입니다." 라고 번역하고 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예수그리스도는 아들로 하나님께 충성을 다한 분이시다. 예수는 섬기는 종으로 오셔서 기꺼이 십자가를 지셨다. 우리는 그를 따라가는 그의 제자들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처럼 섬김과 봉사의 자세로 충성을 다하여야 한다. 자기의 명예와 이익만을 생각하며 열심을 낸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충성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하여 의를 행한 사람들이었다.(마 6:1-5) 그들의 기도와 구제와 금식이 모두 그러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양심에 꺼리낌이 없이 충성을 다한 인물이다. 복음을 전할 때에도 거리낌이 없이 전하였다. 복음을 전하면서 그는 어느 누구의 물질도 탐하지 않았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와 함께 천막을 만들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복음을 전하면서 자기 생명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않은 인물이었다 .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은 심판날이 이르면 어두움에 감추인 모든 것이 들어난다. 뿐 만 아니라 사람의 속에 있는 마음의 뜻도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고전 4:5)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숨겨진 동기와 성품이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십자가의 복음을 따라 충성을 다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넉넉한 칭찬의 말씀을 듣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충성은 어떠한 것인가 ?

1. 신실성이다.

개역성경에 충성이라는 단어는 신실성이라고 번역하였다. 신실성은 헬라어로 pistos 라 기록하였다. pistos 는 '믿을 수 있는 것' Trustworthy 이다. 신실함이란 라틴어 'Sinecera' 에서 나온 것으로 '없다'는 뜻의 Sine 과 '밀초,밀랍'을 뜻하는 'Cera'의 합성어이다. 다시 말해서 밀랍으로 때우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지금이야 포장술이 발달되어서 아무리 먼 곳에서 수송하여도 물건이 상하지 않지만 옛날에는 세미한 부분이 다소간 파손되어 도착되는 예가 흔하였다. 그러면 떨어진 부분을 밀납으로 깜쪽같이 때워놓아 전문가가 아니면 식별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부분적으로 땜이 없는 물건이라는 뜻의 'Sinecera' 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신실함은 속임이 없는 것 순수한 것이란 뜻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재주부리는 사람보다는 성실하고 신실한 사람을 필요로 한다.

 

신실함은 두 마음이 아니다.

마 6:24를 보면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하나니...'라는 말씀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고 경고하셨다. 누구든지 둘 중 하나를 사랑하거나 귀하게 여기고 남은 한가지를 미워하거나 경히 여기게 마련이다. 우리가 누구나 똑같이 사랑한다 하지만 그것은 말로 가능한지 몰라도 실제로는 어느 한 사람이거나 한 부분을 더 사랑하게 마련이다. 마 22:37-8에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다. 우리가 가진 사랑을 % 로 나타낸다면 몇 % 로 사랑하라는 뜻인가 ?

이 말씀의 뜻은 분명하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100 % 사랑하라는 것이다.

마음, 목숨, 뜻은 사람이 가진 유일한 것들이다. 그러므로 한가지로 섬기라는 뜻이다. 하나님을 자신보다 더 사랑해야 한다. 의사 누가는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 및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기록하였다.(눅 14:26) 하나님을 섬기며 따르는 것이 편리를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당국자의 협박이 있어도 베드로는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 듣는 것 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일갈하였다. 신실함이란 보는 사람이 있거나 없거나 동일하다. 사도들은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더 마땅한 것으로 확신하고 움직였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식의 신앙이 아니었다. 어제와 오늘의 말이 똑같고 처음과 나중의 말과 행동에 일관성이 있는 것이다.

 

2. 대세를 따르지 않는 행동이다.

본문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고린도교인들이 사역자들을 비교한 것처럼 묘사한 것을 보게 된다. 곧 고전 3: 에서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또 어떤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는 주장을 책망하고 있다. 본래 고린도교회의 설립자는 바울이다 그가 고린도를 떠나면서 아볼로를 목회자로 세워 놓은 것이다. 얼마 뒤에 베드로 사도가 그곳을 다녀갔다. 고린도를 떠나 에베소에 머물러 있는 바울에게 들리는 소식은 고린도교인들이 제나름대로 '나는 어느 전도자가 좋더라.' 하는 편파적인 행동을 보게 된 것이다.

 

바울은 전도자로 훌륭하다. 아볼로는 가르치는 일에 뛰어났다. 베드로는 봉사하는 일에 열심이 있었다. 바울이 언제 자기가 최고라 한 적이 있었던가 ? 아볼로가 언제 바울을 비방하였으며 베드로가 언제 바울을 무시하였던가 ? 문제는 고린도교인들이었다. 그들 중에 시기와 분쟁이 있었고 그들 중에 교만한 마음이 일어나 파당을 만든 것이다. 저는 여러분들 가운데 이러한 파당이 없는 줄 믿는다.

 

바울은 갈 1:10에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말하였다. 바울은 적어도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나기 전까지는 대세를 따라 움직인 사람이었다. 나쁜 줄 알면서도 따라가고 안되는 줄 알면서도 동참하는 일은 스스로의 생명을 단축할 뿐이다.

포은 정몽주의 글에 이런 시조가 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향한 일편단심 가실 줄이 있으랴 ?"

대세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얼굴 붉어지게 하는 시조이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것 때문에 모진 고난을 받았다. 옥에 갇히기를 여러 번 하였다. 태형도 많이 맞았다. 여러 번 죽을 뻔하였고, 여러 번 먼 길에 도적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협을 만났다. 바울은 이러한 형편을 본문에 기록하기를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고전 4:9)

 

그 다음 구절을 넘어가 보면 바울은 '바로 이 시간까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기같이 되었도다.'

 

구약을 보면 수많은 하나님의 종들이 당한 고난이 기록되어 있다.

노아는 그의 사위들에게 업신여김을 받았다. 하나님의 경고를 전해 주어도 농담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릿 시냇가의 엘리야는 이세벨이 그의 목숨을 노렸다. 다급한 엘리야는 하나님 앞에 드러눠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하고 울부짖었다. 베드로도 바울도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힌 경험들이 있었다. 그들은 결국에 가서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였다.

먹을 것이 있을 때에나 모여들었던 벳세다 광야의 5,000 명, 나귀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볼 때 지금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회복할 때로구나 생각하고 호산나 부르며 따라 나섰던 많은 사람들처럼 되어서는 안된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는 조건으로 돈을 뿌리는 제사장들과 장로들을 따라 움직인 가련한 백성들처럼 되어서도 안된다. 성도들의 충성이란 대세와 관계없이 처음과 나중이 일관되어야 한다.

 

3.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

충성스런 일꾼은 어떠한 사람인가? 8가지 실예를 소개하겠다.

-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깨닫고 실천하는 사람.

- 조금 눈치만 보여도 곧 알아차리고 일을 해 내는 사람.

- 부탁을 받을 때 앗불싸 하며 즉시로 일하는 사람.

- 명령을 받고 명령 안에서 해내는 사람.

- 명령을 받고도 실행결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여 재차 지시를 받는 자.

- 명령을 받아도 두 세번 요청을 받아야 겨우 움직이는 사람.

- 누가 뭐라도 제 고집 제 멋대로 하는 사람.

- 무슨 일을 부탁을 받으면 지레 겁을 먹고 한숨짓고 큰일 났다고 낙심하며 교회의 모든 일에 부정적이고 불평 불만이 가득하여 자기 몸 둘 곳을 모르면서도 명목상 직책에 겨우 매달리는 사람.

 

마태 25장에 기록된 달란트 비유 속에서 우리들이 발견하게 되는 진리는 무엇인가 ? 달란트를 받은 두 사람 즉 5 달란트 2 달란트를 받은 사람들이 주인에게 와서 '보소서 내가 또 5/2 달란트를 남겼나이다.'하고 보고할 때에 주인은 그들에게 칭찬하였다. 칭찬의 말은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다.'는 것이다.

 

모정치인이 충성이란 단어를 구사하였다 하여 화제가 된 모양이다.

구시대적인 사고방식이라고 몰아치는가 본데 비록 세월은 바뀌었어도 충성은 오늘날도 여전히 요구되고 있다. 눈에 보이는 소득이 있다고 충성하고 소득이 없다고 충성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놀랍게도 충성이라는 단어는 성령의 열매에 나타나는 단어이다. (사랑/희락/화평/오래참음/자비/양선/충성/온유/ 절제) 비록 재주가 없어도, 맡은 바 책임과 사명이 어떠하던지 그 섰는 곳에서 충성을 다하여야 한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충성된 사람을 사용하셨다. 야곱도 모세도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한 사람이었다. 여호수아 갈렙 다니엘 모두 모두 충성된 사람이다.

 

위선은 하나님께 부끄러운 일이다. 영광을 가리울 뿐이다. 대세를 따라 움직여서도 안된다. 역경과 고난이 있다고 쉽게 포기하여도 안된다. 세월이 바뀌어도 변함없이 주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