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마태복음

[마11:16] 감동을 잃은 사람들

'코이네' 2021. 1. 15. 23:33

 

감동을 잃은 사람들

본문 : 마태 11: 16-17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길 수 있으랴? ”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를 감동을 잃은 세대라고들 합니다. 오직 즉흥적인 느낌만 살아서 쉽사리 흥분하고 반응을 보이지만 사실 그것이 자신과 깊이있는 연관을 가지지는 않습니다. 느낌은 느낌대로이고 자신은 언제나 그대로 남아있을 뿐입니다. 어쩌면 마음이나 자신의 이기적인 세계가 단단하게 굳어져서 도무지 어떠한 움직임이나 반응이라고 하는 것이 애초 불가능한 상태로 남아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감동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은 살아가는 일에 지쳐서 혹은 분주하여 어떠한 것도 마음에 둘 여유가 없다는 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남아있는 것은 끝없이 축소되고 위축되어버린 마음과 이유없는 조급증세에 빠지거나 자기 안에 갇혀버린 마음 뿐입니다.

 

감동은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도 사람의 깊이에서 작용하여 일관되고 깊이있는 움직임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감동이라고 하는 것이 다름아닌 자신을 다시금 바라보게하는 힘인 까닭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살아가는 방식을 돌아보게 하고, 내가 왜 살아가는지, 그리고 나를 지탱하게 하고 살게하는 힘이 무엇인지, 다시 일어서게 하는 힘이 무엇인지를 깊이있게 생각하게 합니다. 이러한 감동의 결과는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동일한 환경을 걸어가고 있으며, 동일한 문제지점에 서있지만, 그리고 주위에 널려있는 위험이나 아픔도 그대로 이지만 그것을 대하는 방식이 전혀 새로와 지는 것입니다. 더이상 자신을 위축시키고 실망하게 하고 괴로움을 주는 일은 없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풀어내야할 마땅한 자신의 과제일 뿐이고, 당장의 아픔 조차도 절망적 한숨을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이러한 결정적인 삶의 감동이 우리에게 너무나도 절실한 때 입니다. 우리가 오랜시간을 대면하였다는 것이, 서로에게 익숙해 졌다는 것이 주는 의미에는 이미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과거에 우리가 한때 경험했던 일들을 우리의 무용담으로 만들어 내는 것도 역시 그러합니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감동을 주는 일입니다. 그렇다고해서 우리가 서로에게 특별하고 인상깊은 일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감동을 일으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누구 누구에게 감동을 일으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사실상 달리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만약 있다면 그것은 서로에게 투명해 지는 것입니다. 어떠한 허위의식도 우리의 만남 속에 끼어들지 못하게 하고 서로에게 마음을 열어놓는 것입니다. 이렇게 열린 마음으로 서로가 서로를 신뢰하는 가운데 아주 작은 일 속에서도 서로에게 감동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감동이 되는 말이 달리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진솔하고 소박한 말마디 속에, 따스한 손을 내밀고 서로의 지친 어깨를 감싸는 작은 손길 속에 놀라운 감동이 피어나는 법입니다.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에서, 예수의 통탄스러운 마음이 도대체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길 수 있으랴라는 말속에 집약되어 나타나고 있음을 봅니다. 냉담하고 편협한 사고방식이 전면에 자리잡고 있는 상황 속에 예수는 서있었습니다. 한마디로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울어도 함께 가슴을 치치 않는서로에게 냉소적인 상황입니다. 남아있는 것이 있다면 화석처럼 굳어진 마음과 얇팍한 처세술 뿐입니다. 자신의 이기적이고 뒤틀려진 잣대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를 평가하고 적대적인 반응을 보일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그들의 형제를 판 댓가로 로마로 부터 보장된 안전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구약에서 요셉을 팔아넘긴 다른 형제들이 그랬듯이 로마의 금화 몇개에 자신의 영혼을 팔아먹고 약한 형제들을 로마의 칼에 넘겨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 관한 온갖 도전적인 선포는 그들에게 감동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오직 약삭빠른 체세술만 번득거리고 있을 따름입니다. 여기에 감동이 자리할 구석이 있을 턱이 없습니다. ‘피리를 불건 울음을 터트리건그건 광대의 초라한 몸짓에 불과하다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예수는 그것을 생생하게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의 선포가 감동을 일으킨 곳은 따로 있었습니다. 약한사람들 오직 야훼 하나님께 마음이 열려있는 사람들, 처세술에 능한 권력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이 만들어낸 지켜낼 수 없는 여러가지 제약들 속에서 허덕이며괴로움을 당하던 사람들, 그들은 야훼는 우리의 희망이라는 구약의 어느 예언자의 말에 가슴으로 동감하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이 약한 사람들의 가슴에 하나님의 나라는 놀라운 감동이 되었습니다. 그들을 움직이게 했고, 그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 주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따랐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그들의 가슴속에 그들 사이에 이미 자리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나라는 자라나는 씨앗과도 같았습니다. 작은 씨앗이 따에 떨어져 싹을 내고 커다란 나무로 자라오르는 기적이 그들에게서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는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약한 사람들과 철부지 어린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마태11:25)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약삭빠른 처세술이 아닙니다. 만일 이러한 처세술에 관한 것이라면 함께 모여 고민하며 아픔을 나누는 자리가 아니어도 만들어 내거나 전수받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 속에 들려오는 말은 서로가 서로에게 감동이 되는 삶에 대한 것입니다. 이로써 하나님나라의 선포가 우리에게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고, 이것은 서로를 일으키고 우리의 처진 어깨에 힘을 주는 계기가 될 것 입니다.

 

더이상의 감동이 우리에게서 사라져 버렸습니까? 아니면 우리의 마음이 굳어져 버린것입니까? 더이상 감동을 주고 받음이라는 말이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렸습니까? 우리는 지금껏 서로에 대해 어떠한 생각으로 살아온 것입니까.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만나서 함께 마음을 모아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또 어떤 이유에서 입니까? 우리가 발딛고 서있는 곳은 과연 어디인지를 서로에게 다시금 물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