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마태복음

[마20:20] 십자가를 질 수 있나?

'코이네' 2020. 11. 27. 16:44

십자가를 질 수 있나?

마태복음 20 : 20-28

 

 

할렐루야!!항상 은혜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오늘도 은혜를 사모하여 주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성도 여러분에게 이 시간 충만하게 임하시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방금 전에 성가대가 부른 "십자가를 질 수 있나" 라는 찬송가는 미국의 엘 보우맨 말랏(Earl Bowman Marlatt) 이라고 하는 신학대학교 교수가 지은 찬송입니다. 말랏 교수는 18925월 미국의 인디아나주 콜롬버스에서 감리교 목사의 쌍둥이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디포(De Paw) 대학을 마치고 보스톤 대학교 신학대학교에서 다시 공부를 하고 영국으로 건너가서 옥수포드 대학과 독일의 베르린 대학에서도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는 세계 제1차 대전때 포병 소위로 근무를 하였고 전후 1923년부터는 보스톤 대학교 철학과 조교수로 있다가 1925년 정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는 항상 하나님을 향한 투철한 신앙심으로 성시를 즐겨 썼습니다. 그러던 1926년 종교교육학부의 헌신예배 때 부를 찬송시를 써 달라는 부탁을 받고 이 찬송시를 썼으며 헨리 씰버메일 메이슨(Henry Silvermail Mason)의 곡에 결합을 시켜서 3일후에 있은 헌신예배 때에 이 찬송을 불렀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 찬송에 은혜를 받고 변화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말랏 교수가 이와 같이 훌륭한 찬송시를 쓰게 된 뒤에는 그에게 있어서 잊지 못할 두 가지의 사건이 있습니다. 그가 보스톤 대학교에서 공부를 할 때에 말커스 뷰엘(Marcus D. Buell)이라는 교수가 바로 오늘의 이 말씀을 가지고 강의를 하였습니다. 이 강의를 듣고 있던 말랏 학생은 요한과 야고보가 말한 "우리가 할 수 있나이다"(We are able) 라는 말이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났어도 말랏학생에게는 뷰엘 교수의 이 말이 항상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그리고 요한과 야고보의 말도 계속해서 생각이 나며 말랏 자신에게 질문해 오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따라올 수 있느냐?" 고 주님이 물으신다면 요한과 야고보처럼 "내가 할 수 있나이다" 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였습니다. 이 질문은 말랏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고 있으면서 "죽기까지 따르겠습니다" 라는 확신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와 같은 신앙과 믿음을 찬송시로서 고백하여 옮겨놓게 된 것입니다.

그가 이 찬송시를 쓰게 된 또 하나의 동기는 1922년 보스턴 신학대학을 마친 후 유럽을 순방하다가 오버라멀고(Oberammerg)라는 산촌마을에 왔을 때 그곳에서 수천명의 관광객들과 함께 세계적으로 유명한그리스도의 수난극(Ter Passion Play)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수난극에서 무엇보다도 인상이 깊었던 장면은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못박힌 강도 하나가 회개 할 때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신 말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23:43) 라는 구원의 말씀을 하시는 장면이었습니다. 말랏교수는 이 두 번의 신앙적 체험을 바탕으로하여 이와 같이 훌륭한 찬송시를 쓰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오늘은 사순절 넷째주일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주님께서 이 주간에 겪으신 일들을 생각하면서 은혜받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3년간의 공생애를 마치고 다시 예루살렘을 향하여 떠났습니다. 예수님의 수난의 때가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월절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당신께서 수난을 당하실 것과 그리고 고난을 당하신 후에 다시 부활을 하실 중요한 예고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와 같은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그 뜻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의 말씀은 아랑곳하지 않고 전혀 다른 생각들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예수님의 왕국이 성취가 되면 권세가 자기들에게 돌아올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때에 재빠르게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인 살로메가 예수님에게 나아와서 청을 합니다. 주님께서 에루살렘에 들어가서 임금이 되신다면 자기의 두 아들 요한과 야고보를 주님의 좌우편에 않혀 주실 것을 구하였습니다. 주님의 나라에서 대왕의 다음가는 권력자리에 않혀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웃으운 일은 이 말을 들은 다른 열명의 제자들이 모두 분히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두가 이와 같이 예수님과는 전혀 다른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떡 줄 사람은 생각지도 않하는데 김치국 먼저 마신다' 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면 고난을 당하시고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몸을 대속물로 주신다고 하였는데 제자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면 정권을 잡고 임금이 될 줄로 생각을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면 새로운 왕정을 수립하시고 자기들은 모두 한 자리씩 하는 생각 뿐이었지 십자가를 지시고 죽음의 고통을 감당해야 하는 최후의 길이라고 하는 사실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중에는 두가지의 주님의 질문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 질문은 요한과 야고보 그리고 그의 어머니인 살로매에게 한 질문이지만 오늘도 우리들의 심령속에 들려오는 예수님의 질문입니다. 이 예수님의 질문에 우리들은 어떻게 뭐라고 대답을 하여야 하겠습니까? 이시간 깊이 생각하면서 함께 주님의 뜻을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1. "무엇을 원하느뇨?" 라는 질문입니다.

 

요한과 야고보는 예수님과 함께 3년간이나 동거동락하였고 특별히 다른 제자들보다 더 사랑받는 제자였습니다. 변화산에서는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과 비밀까지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진정한 마음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을 구한 것이 아니라 세상의 부귀와 영화를 구한 것입니다. 인간들에게는 크고 작건간에 소원이 있습니다. 소원이 크면 클수록 큰 일을 하고 소원이 작으면 작은 사람 밖에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소원이 거룩하면 거룩한 사람이 되고 소원이 악하면 악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소원대로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소원과 이상을 가지고 노력하는 사람이 비로서 성취를 할 수가 있습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는 모세에게 소원을 묻는다면 애굽에서 종살이 하는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며 사는것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이 "네 소원이 무엇이냐?" 고 물으실 때에 "주께서 나로 땅의 티끌 같이 많은 백성의 왕을 삼으셨아오니 주는 이제 내게 지혜와 지식을 주사 주의 백성을 다스리게 하소서" 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들은 예수님께 무엇을 구하여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당시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은 모두가 병고치기 위해서 찾아왔고 구경하려고 찾아왔고 하나같이 올바른 소원이 없었습니다. 이제 우리들은 예수님께 우리의 간절한 소원을 아뢰어야 하겠습니다. 무엇을 구하여야 하겠습니까?

 

(1)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구하여야 하겠습니다.

(14:1-3)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2) 우리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받기를 구하여야 하겠습니다.

(1:4-5)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7:7-8)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3)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구하여야 합니다.

(6:33-34)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주님께서는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또 주님께서는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6:9-13)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하나님의 뜻을 구하여야 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주님도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였습니다.

 

2.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도 마실수 있느냐? 는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 질문에서 하도 어이없는 대답을 듣고 다시 두 번째 질문을 하셨습니다. (10:3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의 고통이 눈앞에 놓여 있는데 3년이나 따라 다녔다는 제자들이 우의정 좌의정 이나 꿈꾸며 자리 다툼이나 하고 있는 이 제자들과 살로매를 그래도 주님은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이 질문에 두 사람은 "할 수 있나이다" 라고 서슴치 않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아마도 이들은 우의정 좌의정이 되는 구두시험 정도로 착각하였는지도 모릅니다. 혹은 주께서 뜻하시는 세례를 그당시 궁중에서 임금들이 받는 포도주 잔으로 착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쓰리고 쓰린 고통의이요 아픔수치의 세례로서 주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14:34) 라고 하셨고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26:42) 라고 하시고 또한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떻하겠느뇨"(12:50) 라고 하시며, 십자가의 쓰라린 고통의 잔을 불가피 해서 받은 것인데 그들은 대담하게 "할 수 있나이다" 라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저들의 잘못을 아시고 말씀하시기를 (10:39-40)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신 나의 마시려는잔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1) 십자가의 고난의 잔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죄인처럼 버림을 받아 죽임을 당할 십자가의 고난을 말하는 것입니다. (22:42)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고난의 잔을 마신것처럼 우리들도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고난의 쓴잔을 마셔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마지막 만찬에서 포도주 잔을 주시면서 이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행14:22절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요한과 야고보는 이와 같은 주님의 뜻을 모르고 그 잔을 마시겠다고 대답을 한 것입니다.

주님의 쓴잔을 맛보지 않으면 주님의 쓴잔을 모르리

주님의 괴로움 당하지 않으면 주님의 고통을 모르리

주님의 심자가 져보지 않으면 주님의 죽으심 모르리

주님의 쓴잔은 내것이며 주님의 괴로움 내것이며

주님의 십자가 내보물이라 또한 그의부활 내영광이리라

 

이 복음성가는 뇌성마비인 송명희씨가 작시를 하고 957월에 우리교회에 와서 간증집회를 하신 김석균 집사님이 작곡을 한 찬양으로서 수 많은 사람들이 이 찬양을 통하여 은혜를 받고 주님의 십자가의 쓴잔을 체험하였습니다. 오늘 우리 창정교회의 성도 여러분들도 주님의 쓴잔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2) 주님의 쓴잔은 목숨을 대속물로 주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성체를 희생하셨습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14: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그래서 스데반은 돌에 맞아 순교를 당하였고 베드로는 십자가에 꺼꾸로 못박혀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요한과 야고보는 주님께서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고 물으실 때 그 주님의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하였던지 모르고 하연던지 "마실 수 있나이다" 라고 대답을 하였기 때문에 야고보는 12제자들 중에서 가장 먼저 순교를 당하였고 요한은 골고다 산상에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이 운명하시기 전에 "보라 네 어머니라" 고 마리아를 부탁하였기 때문에 그후 마리아가 죽을 때까지 평생 마리아를 모시고 피난을 당하다가 마리아가 에베소에서 죽은 뒤에 마리아를 장사지낸후 에베소에서 체포되어 지중해 가운데 있는 밧모섬으로 유배를 당하여 그곳에서 순교를 당하였는데 12제자중에 가장 마지막으로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무심코 하는 한마디의 말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5:34)고 하셨고 구약에서는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반드시 갚으라"(23;21)고 하였습니다.

 

(3) 주님의 쓴잔은 남을 섬기는 잔입니다.

본문 26-28절 말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섬김과 봉사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은 이세상에 오셔서 33년동안 섬김과 봉사의 일생을 보내셨습니다. 우리들도 이 섬김과 봉사의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이 말씀하신 주님의 쓴잔입니다.

 

결 론 : 오늘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수님께서 요한과 야고보에게 하신 두가지의 잘문을 다시 한 번 마음속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의 그 말씀의 뜻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는 질문입니다.지금 여러분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위해서 밤낮 수고를 하고 있습니까?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여러분들은 어떻게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진정 주님께서 가신 골고다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16:24)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아무쪼록 주님가신 골고다의 십자가의 길을 주님따라서 올라가는 성도가 되어서 주님의 쓴잔을 함께 마실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