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마태복음

[마8:18] 죽은 자와 산 자 _박종순 목사

'코이네' 2020. 7. 25. 23:29

죽은자와 산자

본문 : 마태복음 8:18-27

설교자 : 박종순 목사

 

 

오늘날 많은 가정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죽어가는 가정을 회복 할 대안에 대하여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합

니다.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에워싸임을 당하셨습니다. 회은 사람들이 주님에게 오는 것이 당연했고, 주님께서는 저들에게 말씀을 증거하며 가르치실 사명이 있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8절 말씀에서는 그런 많은 사람들이 오는 것을보시고. 그들에게 말씀과 가르치심을 주시기는 커녕 오히려 다른 편으로 그들과 멀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갈릴리 해변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몰려들었지만. 주님께서는 맞은편으로 가셔서 저들을 피하려 하셨습니다. 맞은편으로 가셔서 만나지 않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저편으로 건너가기를 명하셨습니다.

 

주님은 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계신데 왜 무리들을 마다하고 피하셨을까요 그것은 무리들이 예수님께 나온 목적이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과 달랐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무리들은 허기진 배를 채우는 빵이 그들의 목적이었습니다. 육신의 질병을 치료 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습니다. 로마로부터 정치적인 해방을 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습니다. 이 현세적인 축복과 부와 명예, 그리고 저들이 이 세상에서 주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모두 얻으려는 것 이 바로 저들의 속셈이요, 주님을 에워싼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주님 의 목적은 저들의 현세적이고 세속적인 목적과 달랐기 때문에 저들을 받아들이고 수용하지 않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는 무리들은 예수님과 일대일로 개인적인 만남을 가질 수 없으므로, 대증 선동이나 군중심리로 행동의 영향은 미칠 수 있으나 그들의 인격은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기 때문에. 물론 대중 설교도 하셨지만,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헌신을 주님은 더욱 요구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많은 사람들로부터 둘러싸임을 원하고 인정과 인기와 명예와 축복을 받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그것을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의 이런 개인적인 만남을 어느 한 서기관이 알고서 조용히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19절에는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겠습니다.' I9, 21절 그리고 23절에서 시작하는 세 단락은 세 가지 그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로 별개의 그림입니다

 

그런데 저자 마태는 의도를 가지고 이 세 그림을 조합하고 있습니다. 이 세 본문은 서로 떨어져 있습니다만 '좇는다'라는 동사를 통하여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기 '주를 좇는다 하는 말은 선택적인 용어가 아니라, 필연적으로 따라야 될 필수적인 용어인 것입니다. 신하는 왕을. 제자는 스승을 그리고 자식은 부모를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당연히 좇아야 되는 것입니다.

 

19-20절에 있는 첫번째 그림을 살펴보겠습니다. 서기관은 예수님의 제자가 지금 되길 원하는 마음에서 말합니다.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제가 좇=s습니다.' 제자로 거두어 달라는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 서기관이라고 하는 사람은 성경을 전문적으로 잘 연구하고 정리하는 사람입니다 지금은 인쇄술이 잘 발달되어 있으나 그 당시엔 서기관들이 손으로 성경을 양피지에, 파피루스에 기록을 했습니다. 그러니 성경을 얼마나 잘 아는 사람입니까. 그리고 그런 사람이 예수를 따르겠다고 하니 얼마나 대견하고, 얼마나 좋은 선택입니까. 그러므로 그의 요청은 예수님의 귀에 좋게 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서기관의 이 말에 흔쾌히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의 마음에 큰 부딪힘을 주는 말씀을 하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증의 새도 거할 곳이 있지만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왜 따르겠다고 작정하고 나서는 사람에게 이렇게 찬물을 끼얹올까요 그를 격려하고 고맙다고 말해도 부족할텐데 왜 앞길을 막듯이 애기할까요

오늘 주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주를 따라 제자가 되겠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 주시길 원하십니다. 주님은 따르겠다고 하는 모든 사람을 다 제자로 삼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친히 선택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 서기관은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재가 주님을 좇겠습니다. 당신을 좇겠습니다.' 이 얘기입니다. 그의 의지력과 결단력은 대단하지만 주님은 그런 것을 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겸손한 순종을 원하십니다. 성령의 감동 안에 있는 사람들은 '내가 주님을 따르겠다'는 것과 '내가 주님을 따르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 동일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내용은 서로 상치되는 것이지만, 주님이 보실 때는 동일한 말입니다. 왜냐 하면 '내가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는 것은 '나의 주도권'이 주님을 좌지우지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바로 주님을 선택하지 않고 내가 주님을 포기한다는 의도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누구도 주님을 선택할 자유가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우리를 부르실 뿐입니다. 열두 제자 중 한 사람도 먼저 주님을 좇은 적이 없습니다. 주님은 갈릴리 바다에 서 그물 던지는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세관에서 일하는 공무원인 마태를 부르셨습니다. 그 부르심과 신택의 주도권이 인간에게 있는 한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주도권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 주님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당신을 좇겠습니다. 좇지 않겠습니다.' 하는 말이 주님이 보기엔 똑같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 서기관은 스스로 뭔가 하고 싶었습니다. 내 결단이 주님께 칭찬받고 싶었습니다. 내 헌신이 주님께 감동을 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것에 감동하는 분이 아닙니다. 정말 주님이 가시는 그 길을 이해할 때 따를 수 있는 순종적인 마음이 일어나게 되는 데 이 서기관은 아직 그것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선언하십니다. '들에 있는 여우나 공중에 있는 새라도 거할 곳이 있다. 그러나 오직 인자는 - 사람들도 다 거할 곳이 있지요 여기서 인자는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이 세상을 통치하는 메시아 이 하나님 아들 인 자는 - 머리 둘 곳이 없다.'

이 세상이 주님의 것인데 주님이 거처할 곳이 없단 말씀입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마굿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날 때도 빌건 무덤에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주님의 소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정말 주님을 따르고 좇겠다고 하는 사람은, 결단과 헌신을 한 사람은 내 것을 두고 주님을 좇겠습니다.'가 아닙니다. 그것을 완전히 포 기할 수 있을 때 주님을 따르겠다는 결단이 생기고 그런 소신이 필요하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다른 한편에서 이 서기관은 주님을 따를 때 오는 이득과 실리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이득과 실리에 정반대되는 말씀을 하십니다. 네가 나를 따를 때 이렇게 엄청난 희생이 있고,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두번째 그림은 제자 중 한 사람이 예수님께 조용히 말합니다. ,주여, 지금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장례를 지내고 곧 되돌아오겠습니다.' 문제없죠. 장사를 지내고 돌아오겠다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갔다오라.' 그러나 주님은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말 에 대한 허락이 아닙니다. 죽은 자는 죽은 자들로 장사지내게 하고 너는 나를 좇아라.' 정말 이 사람이 부친의 장례 때문에 잠시 주님 곁을 떠났다가 돌아오려는 마음이었을까 의문을 갖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그의 겉 표현대로가 아니라 그의 중심을 헤아리고서 그 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법이란 우리의 내면적인 것보다 외면적인 것에 치중하기 때문에 곤경에 빠질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소위 증거라고 하는 것이 화보되지 않으면 정말 결백하다해도 범인으로 몰리고 마는 것이지요 무고한 죄 값을 치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렇습니다. 정의로운 것도 있지요. 그러나 완전한 정의는 기대하지 마십시오. 우리 주님은 겉과 표면과 이 세상적인 것을 보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깊은 내면을 통찰하시는 주님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내도 속일 수 있습니다. 목사도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령님 앞에서는 낱낱이 드러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장례 지내는 것, 얼마나 중요한 문제입니까. 증차대한 것이지요 그러나 이 사람에게는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인자는 머리둘 곳이 없다. 인자의 가는 것은 이렇게 고통스럽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곁에서 듣고 '내가 가는 길은 이게 아닌데, 내가 주를 따른 것은 이게 아닌데.' 이는 장례문제를 핑계로 삼고, 주에게 다시 오겠다 는 것이 아니라 주님 곁을 떠나겠다는 겁니다.

사실 이것이 이 제자만의 문제입니까? 저나 여러분이나 마찬가지죠. 그런 마음들이 수없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주님 때문에 당하는 흔란과 고통이 있을 때 아! 이 길이 아닌데 왜 이런 고통과 환난이 나에게 오는가.' 그러나 여러분, 주님이 허락했다고 하면 그 영흔은 영원히 지옥의 구렁텅이로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으로 그를 붙드십니다. 주님께서 그 마음의 갈등과 여러 가지 번민을 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문제를 떠나 바로 핵심으로 들어가 '너는 나를 좇으라'고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 제자와 같이 주님을 가까이서 좇다가 시련과 낭패와 환난을 당할 때 '이게 아니다 하고 슬그머니 돌아서지 마십시오 돌아서는 날에는 그것이 바로 죽음이요 사망이요 패망인 것을 기억하십시오. 주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시고 아직 붙드셨을 때, 하나? 앞에 감사하시길 축원합니다. 아직 우리는 생명력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위대한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

여러분, 사실 이미 죽은 사람은 무덤에 있죠. 살아있는 사람은 곧 무덤에 갈겁니다. 지하철을 오고 가는 분주한 발걸음, 시내를 질주하는 많은 차들이 어디로 가는지, 가만히 보면 다 무덤으로 가기 위해 애쓰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볼 때 살아있는 게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실 때 살있는 게 참 살아있는 것임을 믿습니다. 예수의 영이 없는 사람은 죽은 자입니다. 육신의 부모도 귀합니다. 육신의 친구도 귀합니다. 육신의 사업도 귀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예수의 영이 없으면, 성령이 없으면 그것은 이미 죽은 자입니다. 죽은 사업입니다. 죽은 일입니다, 어떤 죄를 지은 사람이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직 형집행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사형집행만 안되어서 그렇지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이 땅에 많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모두다 영적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들인데 이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없는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미 심판에 이르렀다고 말합니다. 아직 하나님이 사형 집행을 하지 않으셨을 뿐 입니다. 유보하신 것입니다. 이 제자는 죽은 자를 위해서 일하려 했습니다.

예수님께 붙어있는 것이 참 생명임에도 블구하고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고 은혜를 추구하는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주기는 커녕 죽은 자를 위해서 일하려 하니 주님이 그를 가게 할 수 있겠습니까.

너는 나를 좇아라."

오늘 여러분의 가정 위의 심령에 죽어있는 영이 아니라 살아있는 예수의 영이 함께 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세번째 그림은 갈릴리 호수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잔잔하던 호수를 가로질러 그 반대편으로 가시길 원하는 주님이 몇몇 제자와 합께 배에 동승했습니다. 주님은 육신적으로 많이 피곤하셔 서 잠이 드셨습니다. 제자들은 쉴새없이 이야기를 합니다. 낮에 무슨 일아 있었는지, 주님은 어떤 분인지 그들은 하염없이 이야기가 즐거웠 습니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이 처음에는 참 시원하고 좋았습니다.

그러나 이 순한 바람이 점점 거칠기 시작합니다. 그 배를 치기 시작합 니다. 물결이 고요하던 것이 배를 삼킬 만큼 높은 파도가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넘어오는 물들을 자신들의 손으로 바가지로 퍼냈지만 역부 족이었습니다. 점점 자신들이 어찌 할 수 없음이 느껴지고 죽음에 대 한 공포심이 생겼습니다. 두렵게 되었습니다. 당황한 그들은 더 이상 그들이 할 수 없다고 느꼈을 때. 이제 우리는 죽었구나." 하고 포기 했을 때 주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그 공포 속에서도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주무시는 주님을 제자들은 깨웠습니다.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게 되었나 .' 마가복음에는 좀더 직설적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된 걸 보고만 있습니까.' 주님은 말씀합니다. "너희들은 왜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없는 자들아.' 주님께서는 한 배에 타셨습니다. 그들이 적어도 주가 누구인지를 알았다고 하면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놀라는 것과 두려워하는 건 다릅니다. 누가 툭 쳐서 놀라는 것을 어떤 사람들은 믿음이 없다고 하는데 그건 본능적이죠 믿음이랑 상관없 습니다. 그러나 환경과 조건과 여러 가지 내 삶을 구성하는 외적인 혹 은 내적인 세력 앞에서 두려워하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왜요? 그 배는 제자들만 탔던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타셨습니다. 주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생댕의 주요,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해를 못했습니다. 알지를 못했습니다. 따르긴 따랐지만 믿음이 없었습니다. 말씀은 듣기는 들었지만 적용을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그것을 지적하시고 이제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서 고요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세 그림을 보고 있는데 서로 별개인 이 세 그림이 어떤 통일성을 이루고 있을까요?

 

첫번째 그림에서 서기관은 주님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주님으로 고백하고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산상수훈의 많은 가르침과 설교를 하시는 위대한 선생님으로 불렀습니다. '당신의 가르침을 내가 좇겠습니다, 사사해 주십시오.' 이렇게 주님을 모르고 좇겠다고 하는 이 사람을 향해서 주님은 당신이 가는 길이 어떤 길임을 보여주셨습니다.

 

두번째 그림에서는, 제자 중 한 사람이라 하는 것은 열두 제자 가운 데 한 사람을 가르킵니다. 이미 그들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누구인지 이름이 나와 있지는 않습니다. 그물질을 하다가 부름을 받은 사람인지, 아니면 주님의 부름을 받았는데 돈 나오는게 없에서 다시 내 갈 길로 가야겠다고 생각하는 그 제자인지 알 수는 없지만 주님의 부름 요에, 주님의 선택 앞에 있던 그 사람이 세상으로 다시 가는 것 을 원치 않으셨기 때문에 '너는 나를 좇으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주님을 조금씩 조금씩 가까이서 알게 되고 주님과 좀 더 가까 이 돼 있는 이 세번째 그림에서 주님을 따르고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거처할 집만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인생이 매우 고독하고, 때로 는 십자가의 고통같은 환난도 우리에게 엄습해 올 수 있다는 것을 보 여주고 있습니다. 적어도 주님의 부름을 받고 제자로 서있는 사람은 고요하던 우리 인생에 먹구름이 있고, 풍랑이 있고, 그 죽음이 드리워지는 그림자가 있을지라도 바로 그 옆에 주님이 계신 것과 같이 우리의 인생을 주님 이 함께 이끌어 나간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가정에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이 계십니까? 얼마나 주님 의 이름으로 여러분의 모든 일들, 모든 사업들, 여러분의 자녀를 훈계 하고 교육을 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참 포도나무, 우리는 그 옆 에 붙은 가지라 했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다른 말로 믿음이 없다고 하십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라틴어에 보면 크리드(Creed) 라는 말이 있는데 '신앙을 고백한다 "믿는다' 하는 단어입니다. 이 말은 접착되어 있고, 붙어 있다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요한복음 l5장 말씀처럼 오늘 우리들이 가지로서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죽은 것과 같고 붙어 있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우리는 믿음 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정말 내 마음대로입니다. 골프장에 부킹이 되면 골프하러 가고 부킹이 안되면 교회에 옵니다. 심심풀이입니다. 악세사리나 취미생활에 지나지 않는 그런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국민의 25%의 인구가 기독교인이라 하지만 저는 다 기독교인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교인일 뿐입니다. 어떤 사람은 등록하고 어떤 사람은 둥록 안하고 다니는 교인일 뿐 이지 정말 주님이 원하는 제자는 아니라고 봅니다. 여러분, 자녀들에게 꿈과 비전과 희망이 있습니까? 뭘 위해 공부합 니까? 일류 대학과, 일류 기업과, 최고의 연봉과, 좋은 저택, 이런 것이목표가 되어 산다고 하면 죽은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죽게 했습니까. 우리들이 죽게 했습니다. 예수의 영으로 제자의 길을 걸어가는, 생명력 있는 이 삶은 힙든 십자가의 길이지만 오늘 우리가 견딜만한 힘을 주님은 주신다고 했습니다. 견디지 못할 때 주님은 우 리를 안아서 가십니다. 제자의 길이 물론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왜요?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기 때문 입니다. 언제나 우리는 주님을 찾고 찾으면 됩니다. 언제나 주님을 의 지하고 의지하면 됩니다. 세상의 법이나 세상의 지식이나 세상의 것들 에 안주하거나 기대지 마십시오. 그보다 더 강력하고 완전한 분이 계 십니다. 그 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분이 우리 가 정을 지휘하고, 이 분이 우리 가정을 통치해야만 생명력 있는 가정, 복한 가정이 될 줄 믿습니다. 가장이 믿음이 없고, 주부가 믿음이 없고, 자녀가 믿음이 없는 그 가정은 죽은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가정은 예수로 온 가족 이 하나가 될 때 입니다. 살아있는 가정은 은혜가 넘치고 행복이 넘치 는 가정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째서 십자가를 지시고 피흘림의 대 가. 수치의 대가, 고통의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받 은 데 대해서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영접하고 그를 믿은 것 그것밖에 없습니다. 그건 대가가 아니죠. 그러나 예수를 믿은 그 이후부터 우리는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서기관이나 제자 중 한 사람은 대가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대가를 치르지도 않고 주님을 따르려 했습니다. 사랑하는 교인 여러분, 주 예수를 믿는 대가를 치릅시다. 그게 바로 십자가의 길이고 제자의 길입니다. 이 길은 비록 갈 때는 좁습니다. 시작은 울퉁블퉁하고 괴롭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점점 그 길을 평탄할 길로, 안전한 길로, 축복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이 복 있는 길로 우리 모두가.우리 가정 모두가 함께 손에 손을 잡고 행복한 가정으로 이어 나가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