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누가복음

[눅10:17]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기쁨

'코이네' 2019. 7. 6. 16:34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기쁨

 

성경본문: 10:17~20

 

권투선수 홍수환이 챔피언이 되는 순간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하고 기뻐 외쳤던 소리를 우리는 기억한다. 제자들은 귀신들과의 싸움에서 이겼다. 인간도 아닌 귀신과의 싸움에서귀신들이 항복을 하였으니 오죽이나 기겠는가! 그래서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하고 외쳤다. 그러나 주님은 기쁨에 상기된 제자들에게 조용히 이렇게 말씀하셨다.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이것은 곧 이 세상에서의 어떤 승리가 주는 기쁨보다도 우리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기쁨이 더 크고 값지다는 말씀이다.

이 기쁨은 여러 가지 독특한 특징을 갖고 있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세 가지를 살펴보면

첫째는 세상적인 눈으로 보면 달라진 것이 없는 기쁨이며,

둘째는 평안을 주는 기쁨이며,

세째는 계속되는 기쁨이다.

 

1. 달라진 것이 없는 기쁨

 

우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다고 해서 당장 환경이 변화되는 것은 아니다. 주민등록증의 주소가 바뀌지도 않는다. 예전 그대로이다. 바울의 설교를 듣고 믿음으로 구원받은 간수와 그의 온 가족은 크게 기뻐하였다. 그리고 자기들뿐만 아니라, 이웃까지 청해 잔치하며 함께 기뻐하였다. 사실 간수의 생활 환경으로 말하자면 전과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전에 별로 기뻐하지 않던 바로 그 환경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기뻐하게 된 것이다.

사마리아 여인은 아무런 기쁨없이 목이 말라 우물가에 나왔다. 그런데 뜻밖에 메시야를 만나 구원받고 기쁨으로 달려 돌아가게 되었다. 무엇이 달라졌는가?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사는 것이 지긋지긋하던 사마리아 여인의 삶이 기쁨으로 충만하게 된 것 뿐이다.

어디든지, 누구에게든지 이 복음이 전해지고 받아들여지는 곳에는 기쁨이 있다. 아무 것도 기뻐할 일이 없는데 누구나 기뻐한다. 그래서 영문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오순절의 제자들을 보고 새 술에 취했다고 하였다. 오순절 이후의 제자들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기뻐했고, 바울은 감옥살이를 하면서도 기뻐하며 찬송하였다. ? 바로 하늘에 이름이 기록되었음을 알고있기 때문이었다.

난쟁이 세리 삭개오도 역시 기뻐하였다. 키가 작다고 불평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키가 작아 뽕나무에 올라갔던 일을 감사했다. 그는 재산을 나누어 주어 가난하게 되었지만 더욱 기쁨이 넘쳤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구원받음으로 하늘에 이름이 기록되었음을 기뻐한 것이다.

 

한 집사 할머니가 주님과 함께 살면서 늘 기뻐했다. 입에는 늘 찬송이 떠나지 않았고 온 몸에는 율동이 있었다. 그런데 그집 바깥채에 세들어 사는 불교 할머니는 언제나 울상이었다. 온몸이 눈물 보따리 같아 어디나 건드리기만 하면 눈물이 줄줄 새어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불교 할머니의 몸에는 갖은 질병이 가득했고 마음에는 근심 걱정이 충만했다. 하루는 기독교 할머니가 불교 할머니에게 이런 말을 건다. “댁은 부처님을 위한다면서 왜 늘 울고 지내시오. 날 보세요. 나같이 예수님 믿고 기쁘게 살아요." 그러나 마이동풍이었다. 그러다가 때가 왔다. 집사 할머니가 다니는 교회에 부흥회가 열렸다. 그래서 눈물의 할머니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따라갔다. 그런데 이미 예비 작업으로 그 마음이 반 열려있었기 때문인지, 그날 불교 할머니의 마음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그 후 부처 할머니는 기독교 할머니로 변했으며, 울던 할머니가 춤추는 할머니로 변했다. 하루는 안채 할머니가 예배를 드리고 돌아오는데 바깥채 할머니가 춤을 추다가 그만 숨어 버리더란다. "저렇게 좋은 걸 진작 믿지 그랬수!"

환경이 바꿔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과거와 똑같은 상황이건만 기쁨이 충만한 그런 삶은 바로 하늘에 이름이 기록되었음을 알았기 때문에 가능하다.

 

2. 평안을 주는 기쁨

 

돈이 많이 생기면 기쁨이 생긴다. 맛있는 음식이 생겨도 기쁨이 생긴다. 대통령이 되어도 기쁨이 생긴다. 그러나 그런 기쁨들이 곧 평안을 주는 것은 아니다. 사실 이 세상 기쁨들은 다른 한편으로는 오히려 불안을 야기시킨다. 사업이 잘 되면 기쁨과 함께 혹 망하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이 생겨난다. 자녀가 건강하게 잘 자라면 기쁨의 한 구석에 혹 병이나 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이 생겨난다. 우리 옛조상들이 귀여운 자녀의 이름을 개똥이니 말똥이니 하고 불렀던 것도 귀신에게 붙잡혀 갈까봐 불안해서였다. 즉 귀신이 보기에 하찮은 것으로 여기도록 하기 위한 일종의 행복 공포증이었던 것이다. 실로 세상의 모든 기쁨 중 참 평안을 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모든 것이 다 구비되었다 하더라도 평안치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평안치 못한 몸에 비단 옷을 감은들 무슨 즐거움이 되겠는가? 그래서 유대인의 인사말은 "샬롬"(평안)이다. 그들은 고난의 백성이기 때문에 평안의 의미를 남달리 잘 터득하였던 것이다.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시면서 그의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신 것이 있었다. 그것은 전도 사업을 위한 자금이 아니다. 학식도 아니고, 권력도 아니다. 그런 약속은 단 한마디도 없으셨다. 그러면 무엇을 유산으로 남기셨는가? 성령이 주시는 평안이다. 세상이 주지 않는 평안이며, 세상이 줄 수도 없는 평안이며, 따라서 세상이 빼앗을 수도 없는 평안이다. 하나님만이 주시는 평안이다. 이 평안은 밖에서 보장해 주는 평안이 아니다. 하늘에 이름이 기록되었을 때 저절로 느끼게 되는 평안이다. 거듭난 사람들이라고 모든 은사를 똑같이 받는 것은 아니지만 이 평안만은 예외 없이 골고루 받는 선물이다. 이상하고도 알 수 없는 평안이다. 그러므로 5절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에 평안할지어다 하라" 하신 것은 하늘의 생명책에 이름을 등록시키고 그 기쁨이 주는 평안을 누리게 되기를 빌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평안을 세상이 주는 평안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전쟁 위험이 없어져서 이젠 마음 평안히 사업을 펴나갈 수 있게 되었다는 얘기도 아니다. 몸에 병이 없어서 평안하고, 사업이 잘되기만 해서 평안하고, 누구 하나 반대하는 사람이 없어서 평안한 것이 아니다. 하늘에 이름이 기록되었음을 알았을 때의 기쁨이 주는 평안이란 환경에서 오고 성격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야말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3. 계속되는 기쁨

 

하늘에 이름이 기록된 기쁨은 솟아나는 생수와 같다. 그침이 없으며 계속된다.

문호 톨스토이는 귀족이었다. 그는 문학을 통해서 명성과 돈을 한꺼번에 손에 쥐었지만 그의 마음은 도무지 기쁘지 않았다. 어느 날 그는 우울하고 답답한 심정으로 시골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 거리에서 그는 기쁨이 넘쳐흐르는 한 촌부의 얼굴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너무도 신기해서 그는 물었다. "그 환희의 비결이 무엇인가요?" 그때 가난한 농부는 그 어려운 질문에 너무도 쉽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하나님하고 같이 살기 때문이지요." 톨스토이는 이 짧은 말에서 깊은 지혜를 발견하게 되었고 후에는 그도 기쁨의 길을 찾게 되었다.

누구든지 주님께 돌아오면 샘물처럼 계속 흘러나오는 이 기쁨을 알게 된다. 참으로 믿으면 올 것이 온다. 한번 이 기쁨을 안 사람은 이전에 느끼던 기쁨도 기쁨이었던가 한다. 살아 보기 전에는 그것도 사는 것이라 했지만 이제 참으로 살고 보니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니었다. 이제 한번 웃고 보니 예전의 웃음은 진정한 웃음이 아니었다. 하늘에 이름이 기록되는 순간우리는 이러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

삭개오는 구원받고 기쁨이 넘쳐 잔치를 베풀었는데 여러분은 세례 받고 누구를 청해 잔치를 베풀었는가? 이 기쁨은 죽어 가고 늙어가는 육체에서 나오는 기쁨이 아니라 영원히 살게된 영혼의 계속되는 환희이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이 영원한 환희의 기쁨을 종종 망각하게 되기도 한다. 슬픔에 싸여 울먹일 때도 있고, 눈물을 흘릴 때도 있기 마련이다. 주님 역시 기뻐하셨다고도 하지만 슬퍼하셨다고도 한다. 어찌된 일인가? 거기에 진리가 있다. 주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음이 민망하여 괴로워 하셨지만 그때에도 기뻐하셨다. 구름 밑의 세상에는 어둠이 있고 홍수가 나지만 구름 위의 하늘에는 언제나 맑음 뿐이다. 아래에는 홍수! 위에는 쾌청한 날씨 이것이다. 때때로 구름이 걷히기도 하고 덮히기도 할 뿐이다. 몸에는 아픔과 슬픔이 있을지라도 그 영은 언제나 솟아오르는 기쁨이다.

바람이 부는데 어찌 그 물이 요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깊은 밑바닥에는 고요함이 거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몸은 늘 세상의 변화와 사건에 직면한다. 어찌 반응이 없을 수 있겠는가? 울기도 하고 괴로워도 해야 한다. 그러나 그깊은 곳에는 언제나 기쁨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이름이 하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