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마태복음

[마5:13] 한국 기독교가 안고 있는 문제들

'코이네' 2019. 6. 29. 22:28

복음 운동의 한계와 기독교 문화

성경 본문: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5:13).

 

한국 기독교는 아직도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고 우리 겨레에게 희망의 빛을 비춰 주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질적으로 한 단계 더 성장하기 위해서는 현재 갖고 있는 한계와 문제점을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문제 제시를 통해 2000년대를 향한 우리의 과제의 일단이 또한 얘기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갖가지 문제의 증후들이 1980년대 이후 한국 기독교사에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1983년경으로 생각되는데, 그 당시에 `한국 기독교 100주년 행사'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서 기독교 인구가 전체 인구의 25%가 넘는다는 통계들이 자주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통계 이면에는 당시 실시하려고 했던 신학교 정비 문제가 있었습니다. 교단마다 20만 명을 기준으로 해서 하나의 신학교를 인정하겠다는 정부 방침에 따라 각 교단에서는 통계를 작성해 제시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통계에 근거해서 조금 갑작스럽게 한국 기독교 인구가 1천만이 넘는다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근사치에는 가까우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 통계에는 교단의 이기주의적인 성격들이 내재해 있었고 또 그런 만큼 통계에 과장된 면이 있었다고 지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 나라 도시 인구의 약 30% 정도가 그리스도인이라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신학교는 무인가까지 합쳐 200여 개가 되며 5만 명이 넘는 목사님들과 4만여 개의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한국 기독교가 각종 문제들과 한계점을 안고 있다는 것은 결국 한국 기독교가 양적인 성장에 비해 질적인 내실을 기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제가 어릴 때 목사님께서는 전도를 강조하면서 한국의 모든 국민들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우리 사회의 불의한 죄악들과 정치, 경제 또 남북통일의 문제까지도 모두 해결될 수 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과 같은 식으로 성장해서 전국민이 다 교인이 된다 하더라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 국민 모두가 복음을 다 받아들인다면 사회가 저절로 변혁되리라는 생각은 대단한 망상입니다. 왜냐하면 구조악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이 모두 변한다고 해서 악한 사회 구조가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과 같은 식으로 이 나라 사람이 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문제가 그대로 남아 있지 별로 진전이 없을 것이다 하는, 조금은 절망적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가 안고 있는 문제들

 

1984년을 전후해서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했던 부천서 성 고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 사건을 일으켰던 장본인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는 서울에 있는 어느 미션계 학교를 졸업했고, 범행을 부인할 때도 "하나님 앞에서 난 결코 그런 일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법은 그를 심판해서 교도소로 보냈습니다. 1987년 대통령 직접선거로까지 정국(政局)을 내몰았던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을 일으킨 치안부의 팀장이 예수를 잘 믿는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뒷날 사건의 전말이 들통 나서 그 사람은 의정부 교도소에 들어갔는데 그가 가족에게 보낸 편지가 동아일보에 공개되었습니다. 그 내용을 보니까 아주 구구절절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라는 말이 씌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사람을 고문해서 죽이는 팀장이 되었을까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오대양 사건도 기독교 모교파와 관련되었다고 합니다. 그 무렵에 있었던 사건 가운데 범양 사건이 있었습니다. 범양이라는 회사의 회장되는 사람은 장로교 신자였고 사장되는 사람은 침례교 신자였는데 그 두 사람이 싸워서 회장이 부활 주일날 예배를 드리고 난 뒤에 자기 회사 사옥에서 투신 자살을 했습니다. 매스컴에서는 이 사건을 두 교인간의 싸움으로 얘기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수서 사건에 관련되어 투옥된 사람들 여덟 명 가운데 다섯명이 교인이라고 합니다. 입시 문제지 도난 사건도 신학대학에서 일어났습니다.

1980년대 이후의 이런 사건들만 가지고 보면 한국 기독교의 여러 문제들을 소소한 개인적 측면에서 얘기할 수 있지만 자유당 정권 이후의 기독교 상황을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해방 이후 기독교 내에서는 일제의 신사 참배 및 일제하에서 한국 기독교가 범한 죄악들을 회개하자는 운동이 있었는데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미군정(美軍政)을 이어받은 자유당 정권의 주역들인 이승만 박사나 그 밑에 있던 장관, 국회의원 등 지도자급에 해당하는 많은 사람들이 교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일종의기독교 정권이었으면서도 이승만 정권은 한국사에서 반민주적, 반민족적인 정권으로 낙인 찍혀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지금까지 민주화 문제에서 많은 시련과 갈등을 겪었던 것도 바로 이 이승만 정권과 깊이 관계됩니다. 1970년대에는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유신 정권을 옹호하고 선전했습니다. 5공화국이라는 불의한 정권이 탄생할 적에 조찬 기도회를 열어 그 정권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제일 먼저 축복해 준 것도 개신교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개신교가 제 5공화국 치하에서 인권 문제를 많이 거론하긴 했지만 정권 초기에 저지른 그 잘못을 상쇄할 만한 그런 일은 못 했다고 생각합니다. 6공화국에 와서 열린 청문회에서 제 5공화국의 정치, 경제 등에 대한 비리들은 거론되었지만 우리 교회에서 1980년에 악한 정권을 축복해 준 그 사건에 대해서는 아직도 회개하는 사람도 없고 교회 안에서 거론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과연 그 정권이 불의한 정권이요 누구 말처럼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정권이라고 한다면, 그 정권을 태어나도록 앞장서서 축복해 준 기독교는 민족사에 굉장한 오류를 범한 것이 아닙니까?

한국 기독교는 지금처럼 교회 내에 문제를 안고 있는 상태에서는 이 사회를 향해 정의(正義)를 외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지역감정이 교회 안에 아직도 큰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한국 교회에는 많은 교단들이 난립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큰 교단이라 할 수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에는 등록된 숫자만 해도 50여 개의 교단들이 있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지역감정이 상당히 많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이는 선교사들의 선교지 분할 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미국 북 장로교회가 황해도, 평안도, 경기도 일부와 충청남도, 충청북도남쪽 그리고 경상북도 지역을 차지했는데 이것이 뒷날 예장 통합측의 근간을 이룹니다. 그리고 미국 남장로교회가 호남 지역을 차지했는데 이것은 나중에 예장 합동측의 근간을 이룹니다. 물론 합동과 통합이 분열될 때는 이미 인맥이나 지연이 상당히 얽혀져 있었기 때문에 꼭 그렇게 분류할 수 없지만 주요 인맥을 보면 그렇습니다. 그리고 기장측이 함경도를 차지한 카나다 장로회측과 관련이 있고, 고신측이 경남을 차지한 호주 선교부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렇듯 지역감정은 다른 어떤 데에서 심화되기 이전에 기독교 내에서 먼저 심화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지역 감정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대교단 내에서도 파벌이 대단히 심합니다. 그래서 교단의 장()을 선출하는데 한 해는 A지역, 다음 해에는 B지역, 또 그 다음 해에는 C지역 하는 식으로 돌아가면서 한다고 합니다. 교단 내의 선거에서도 금권 타락이 심각합니다. 그러니 일반 선거에 대해서 기독교가 자신 있게 부정 선거를 하지 말자는 말을 하기가 쑥스럽습니다. 장기 집권 때문에 세대교체가 제대로 안 되는 점에서도 한국 기독교는 사회에 대해 할 말이 없습니다. 합동측 교회, 통합측 교회, 기장측 교회 할 것 없이 1세대 교역자에서 2세대 교역자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불미스런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런 일들의 결과 대부분의 2세대 교역자들이 떠나 버리는 사태를 빚게 되었습니다. 1세대 교역자가 뒤에서 버티고 있으니 2세대들이 설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서는 진보 계열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민주적이고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1세대 교역자를 둔 기장측 교회에서도 그 후임이 결국 몇 년 만에 나가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이 외에 작은 교회들에서도 원로 목사와 담임 교역자 사이의 갈등과 마찰이라고 하는 것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약점을 안고 있는 기독교계가 과연 정치계에 대해 장기 집권에 항의하고 부정부패를 지적할 만한 자격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장로들의 권위 지향적인 자세도 문제입니다. 원래 감리교에는 장로가 없었는데 지금 한국뿐만 아니라 이민 교회에도 감리교에 장로들이 생겼습니다. 아주 이상한 풍조입니다. 그런데 한번 장로가 된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대교체에도 문제가 있고, 교회도 새롭게 일해야 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갱신해 가야 하는데 장로들이 그대로 앉아 있으니까 제대로 일을 못 합니다. 이런 현상은 목사님을 비롯한 교역자들의 카리스마적인 자세를 합리화시켜 줍니다. 그야말로 종교 귀족들이 탄생한 것입니다. 아주 불행한일들입니다.

서울 강남 지역 인구의 45%가 기독교도라는 1987년 통계 자료가 있습니다. 강남에는 한국의 중산층이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이 중산층들이 기독교의 양적 성장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그런데 중산층 교인들이 대거 몰려 있는 강남 지역이 한국에서 향락 퇴폐 문화가 가장 발달한 지역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좀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다른 지역 사람들이 수지가 좋다며 강남에다 유흥 업소를 열어서 지금 이 지경이 된 걸까요? 많은 교인들이 사는 강남이 한국의 소돔과 고모라로까지 불리게 된 데에는 어쨌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이 크지 않을까요?

 

제가 이렇게 창피한 일들을 나열한 것은 한국 기독교의 외적인 성장과 내실이 비례하고 있지 않은 현실에 대한 단편적 예증일 따름입니다. 물론 한국 기독교도 나름대로 잘한 일들이 있습니다. 또 선한 모범을 보이는 목회자와 숨어서 노력하는 많은 평신도들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희망이 되기 때문에 한국 기독교에 대해서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듭 나타나는 타락 현상들과 증후들이 한국 기독교의 양적인 성장과 질적인 내용과의 괴리를 여실히 폭로하고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는 부정한 일을 행하는 일도 능숙하게 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짓는데 필요한 땅을 싯가대로 사면, 가령 10억이다 20억이다 해서 교회에서는 사실 그 돈을 마련하기가 어렵습니다. 또 땅 주인도 그렇게 팔 경우에 세금을 많이 떼이게 됩니다. 그럴 때 땅 주인은 땅값을 15,6억쯤 하는 것으로 하고 3,4억원은 증여하는 식으로 하자며 교회와 협상을 합니다. 그러면 증여하는 측이나 교회나 상당한 이득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세금을 포탈(逋脫)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교회 건축하는데 자료를 가져올 때 세금 계산서를 떼지 않습니다. 세금 계산서를 떼지 않으면 인하를 시켜주는 수법이 있습니다. 교회를 짓는데 그런 수법이 많이 사용됐습니다.

또 교역자들의 세금 문제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교역자들도 세금을 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월급이 아니고 봉급이 아니고 사례인데 뭐 그렇게 하느냐 하지만, 저는 목사님들이 세금을 냄으로써 국민 된 도리로서 납세의 의무를 다할 뿐만 아니라 그만큼 자기 발언이 커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도 지금은 잘 안 되고 있습니다. 정부도 기독교 세력이 크니까 잘못 건드리면 선거에서 표를 잃을까봐 제대로 바른 말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실한 목회자들 가운데서는 개인적으로 자기가 알아서 세금을 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사람들을 제가 몇몇 알고 있습니다.

옳지 못한 수단과 방법으로 교회를 세워 몇 10억 원이 남았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크다"며 떠벌리는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교인들을 길들여 놓았다면, 그 교인들이 자기 사업할 때에 그 방법을 채택 안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런 방법을 채택하여 부당 이득을 취하고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은혜를 베푸셔서 내가 세금 내야 될 것 1억을 안 냈으니까, 하나님 5천씩 갈라 가집시다" 하면서 은혜를 들먹거리는 교인들이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현실을 보면서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 가운데서, 그리고 기독 지성인들 가운데서 고민하는 분들이 참 많이 생겼습니다. 평신도들 가운데도 이런 문제를 두고 굉장히 고민을 많이 합니다. 양적 성장과 질적 성장의 불균형을 극복해야만 우리는 참다운 성장을 이룰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질적인 성장, 이것이 바로 우리 모두의 숙제입니다.

제가 듣기로 일본의 그리스도인은 전체 인구의 2%미만입니다. 그런데 일본은 기독교를 받아들인지 백 년이 채 안되어 영향력 있는 기독교 지도자와 기독교 사상가를 많이 배출했습니다. 지금 2%가 안되는 인구지만 일본의 그리스도인들은 한국 그리스도인들보다 사회에 훨씬 더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특히 이번에 P.K.O. 법안이라든가 군국주의 일본을 재건하는 문제에 대해 일본 기독교는 투쟁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한국 기독교가 오늘과 같은 문제점을 갖게 된 요인은 어디에 있을까요? 이에 대해 저는 이원론적인 신앙 상황과 잘못된 축복관, 그리고 신학의 부재라는 세 가지 요인을 꼽고 싶습니다.

 

이분법적(二分法的)인 신앙 상황

 

이분법적인 신앙 상황은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제가 어릴 적에 시골 교회에서는 교인들이 두 편으로 갈라서서 교회 성장에는 전도가 필요하냐 기도가 필요하냐는 식의 논쟁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 문제에서 신앙이냐 행위냐로 나누어 생각하고 인간을 볼 때도 영혼과 육체로 나누어 생각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얘기할 때도 이 세상은 세속의 나라요 죽어서 갈 곳은 하나님 나라라고 하며, 일이나 직업에 대해 얘기할 때도 하나님의 일과 세상의 일로 나누어 생각합니다. 또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정교분리론도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주변에는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한국 기독교의 질적인 성장을 저해하는 암적인 요인입니다. 특히 한국 기독교에서는 믿음과 행위의 상관관계 부분에서 상당히 문제가 많습니다.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믿음을 강조합니다. 그렇지만 행위를 강조하지 않는 것은 아닌데 어떻게 된 셈인지 행위가 따르지 못합니다. 여기에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전통은 아마도 이신득의(以信得義)를 강조하는 교리와 관련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종교개혁 당시 가톨릭에서는, 물론 믿음으로 구원얻는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행위, 공로로 구원 얻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면죄부는 바로 공로사상의 산물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가들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얻는 다는 것을 교리로 확정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얻는다는 것을 강조했고 행위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는데, 그러는 가운데 어찌된 노릇인지 행위는 덜 강조되고 믿음만 강조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들어온 기독교가 행위를 덜 강조하는 것은 기독교 수용 당시의 지성사적(知性史的)인 전통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의 우리 사회는 주자학적(朱子學的)인 사회였습니다. 조선조부터 주자학이 우리 사회를 지배해 왔기 때문에 조선 중기에 들어온 양명학(陽明學)은 이단시되고 배척당했습니다. 지식과 행위 문제에서 양명학과는 다르게 주자학은선지후행(先知後行)을 주장했습니다. , 먼저 알고 뒤에 행한다는 것입니다. 알지 않고 어떻게 행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반면 양명학은 지행합일(知行合一), 즉 행위에는 지식이 이미 전제가 되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지행합일을 주장하는 이 양명학은 조선조 사회에서 이단으로 배척되었고, 먼저 알고 뒤에 행하는 것을 주장하는 주자학이 한국 지성사의 전통을 이어갔습니다. 먼저 아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해서인지 사람들은 과거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배우다가도, 정작 배운 것을 실천해야 할 관료의 위치에 있게 되면 배운 것을 다 포기해 버렸습니다. 배운 대로 하다가는 눈앞에 보이는 이득을 취하지 못할 때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리하여 어진 벼슬아치가 잘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사실상 선지후행설은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을 분리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지식 체계와 행동은 거의 관계가 없다는 생각이 조선 지성사의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그런 사회에 이신득의를 강조하는 기독교가 들어오니까 전통과딱 맞아떨어지지 않겠습니까? 믿음으로 구원얻으니까 행위는 적당히 해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은연중에 교인들의 삶에 파고들어 신앙과 행위가 분리된 전통이 그대로 계속되고 있다고 저는 분석을 해 봅니다.

이분법적인 자세는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을 구분합니다. 요즘 젊은 목사님들이나 이런 문제들을 생각하고 있는 교회 지도자들은 일(노동)에 대한 이원론적 인식을 극복하려고 노력하지만 아직도 대부분의 교회 지도자들과 또 그를 따르는 평신도들은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별개의 것으로 여깁니다. 교회에 나가 예배드리고 성경 읽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선교사로 나가고 신학 공부를 하는 것만을 하나님의 일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대학에 가서 물리나 화학,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것, 가정주부가 가정을 돌보는 것, 회사에 나가 직장 생활을 하는 것, 기업 활동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과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그릇된 인간관에서부터 비롯된 오해입니다. 이분법적인 인간관에서는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나눠, 영혼은 하나님의 일을 하고 하나님과 절대적인 관계를 맺지만 육체는 이 세상의 일을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육체의 일을 하는 것은 오직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영혼을 감싸고 있는 육체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먹고 살아야 하니까 직업이 필요하고 그래서 소위 세상의 학문도 하고 직장도 가져서 돈 벌이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분법적인 인간관은 이처럼 필연적으로 이분법적인 노동관을 낳습니다.

 

이분법적으로 세상을 볼 때 "세상 것"이란 세속적이고 마귀가 좋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단지 영혼을 살리기 위해, 즉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육체의 일을 더욱더 열심히 해야 한다면 결국 우리는 점점 더 마귀가 좋아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까? 도대체 우리가 "세상 일"을 열심히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세상 공부를 열심히 할 필요가 있습니까?

 

어느 교회에서 바자회를 하는데 우연히 다른 일이 있어서 들르게 되었습니다. 여성도님들 몇 분이 와서 아주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손이 모자랐는지 어떤 분이 전화로 누군가를 불렀습니다. ", 이 집사, 집에서 뭐 하는 거요? 여기 나와서 하나님의 일을 해야지." 그 분은 집에서 가사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고 교회에 나와서 바자회에 참여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한국의 대학부나 중고등부를 이끄는 지도자들이 굉장히 애를 먹는 것 가운데 하나는, 학생들에게 공부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라는 확신을 못 심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열심히 공부하란 소리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열심히 공부하는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란 생각을 어떻게 심어 줄 수 있겠습니까? 옛날에 저도 학교 다닐 때 월요일날이 시험인데도 토요일날 교회 와서 교회 일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리고 시험 기간 중에 더 열심히 교회 청소도 하고 교회 활동을 했습니다. 시험 점수 못 받은데 대한 적당한 변명거리가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육학이나 물리학, 정치학 등에서 박사 학위를 따고서도 목회자가 되기 위해 마흔이 넘어 신학교에 다시 입학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저는 특별한 소명을 받으면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소명이 그렇게 늦게 임했다는 것,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내가 해 온 이 공부는 하나님의 일과는 관계가 없고 목회를 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일이다"라고 생각하고 그 길을 선택했다면 그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일과 세상의 일을 구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종교개혁가들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종교개혁가들은 우리가 하고 있는 일 자체를 전부 하나님의 일로 여겼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소명과 직업이 일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이 일을 하게 하시려고 이 땅에 나를 보내셨다는 생각이 개신교 전통입니다. "부름"(소명)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 "calling"은 직업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이 구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시간에 내가 이 일을 하도록 부르셨다는 소명감과 직업(노동)이 일치해야 자기가 하는 일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확신과 자신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기업가 가운데 이분법적인 생각으로 신앙 생활하는 분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기업가는 자기 회사 제품의 질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야 합니다. 또 어떻게 하면 제품의 질을 높이면서도 수요자에게는 값싸게 공급할 수 있는가 하는 것도 연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어떻게 하면 나와 같이 일하고 있는 종업원들의 복지를 향상시키느냐 하는 것을 연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기업 경영 자체를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기업에서 이윤이 생기면 그 이윤이 어떤 이윤인가는 따지지도 않고 그것을 가지고 전도비에 쓰고 건축 헌금으로 내면 하나님 일을 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런 이분법적인 상황에서는 기업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생각과 기업을 통해 기독교 문화를 창출한다는 생각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는 학문하는 사람들도, 법을 제정해야 할 국회의원들도, 공무원들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공무원들이 공직 생활 자체를 하나님의 일과는 관계없는 세속적인 일로 여기고, 교회 장로가 된다든지 집사가 된다든지 주일날 봉사하는 것만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나라 국회의원 가운데 상당수가 교인들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정말 단결해서 하나님의 뜻에 맞는 법을 제정하고 하나님의 뜻에 맞는 국회의 모습을 이루려고 한다면 얼마나 쉽게 정의로운 사회가 이루어지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국회 모습에서는 기독교적인 모습을 거의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여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정교 분리 문제가 우리 나라에서는 참 심각합니다. 그간 불의한 정권에 협조하는 교회 지도자들이 많았습니다. 조찬 기도회가 늘 있어 왔습니다. 정부에서 시행하려고 하는 정책이 분명히 성경과 어긋나고 그리스도인의 양심에 비추어 어긋날 때도 침묵으로 일관해 왔습니다. 많은 교회 지도자들은 "목사님,왜 그러고 있습니까?", "우리 교회의 지도자들은(우리 교단의 지도자는) 왜 이렇습니까?"라고 젊은 사람들이 문제를 제기하면,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하기 때문이라며 정교분리를 자기 편한 식으로 끌어들였습니다. 자기 형편에 따라 조찬 기도회에도 참석하고 정교분리를 내세우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들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정부에 대한 비판을 안했을 것입니다. 거슬리는 발언을 했다가는 신상에 좋지 않으니 섣불리 바른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지도자들이 정교분리 문제에서 자기 편의주의적 자세를 가졌던 것은 무엇보다도 명확한 기준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원리적인 면에서는 사실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부가 부패했으니 부패한 정부는 물러나고 교회에서 나라 일 맡아서 해야 한다, 교회가 부패했으니 현명한 군인들이 가서 교회 일을 해야 한다는 식은 물론 아닙니다. 실제 맡은 역할에서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원리적인 영역들이 분리되었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런데도 지금 이 정교분리 때문에, 한국 교회가 발언해야 할 때 발언 못하고 원리 제시해야 할 때 원리 제시 못 한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도치(倒置)된 축복관

 

물론 타계적(他界的)인 신앙과도 관련이 있지만 1960년대 이후 개발 붐이 일면서 우리나라에서는 잘못된 축복관이 기독교계를 휩쓸었습니다. "사랑하는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한삼서 2)는 말씀이 강조되면서 예수 믿으면 돈 잘 벌고 건강하다고 하는 소위 "3박자 축복(구원)"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것을 주장하는 교단이 우리 한국 교회사에 일정하게 영향을 미치고 공헌한 것은 사실입니다. 한국 기독교는 장로교적인 전통이 강한데 장로교는 합리주의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미국도 그렇고 스코틀랜드도 그렇습니다. 장로교의 창시자인 칼빈 자신이 휴머니스트였습니다. 장로교는 합리주의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뜨거운 열정과 성령 운동 같은 면에서 굉장히 약합니다. 그런데 1960년대 이후 한국에서 성령 운동을 일으켜서 교회 성장에 기여한 교단이 바로 그 교단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굉장히 큰 공헌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공헌 못지 않게 한국 교회에 심각한 문제를 던져 준 것이 바로 "3박자 축복"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다가 건강 잃으면 저주받은 것으로 생각한다거나 예수 믿는 장로라고 하면서 돈 못벌면 믿음이 약한 것이라 단정지어버리는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이런 경향이 확산되면서 1960,70년대에 와서 늘어난 중산층들이 자기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교회로 몰려들었습니다. 물론 돈 잘 벌고 건강한게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라고 말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축복하시지 않으면 건강도 재물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을 거기에만 제한시켜 돈 없고 병들면 마치 복을 못 받은 것처럼 오해하게 만드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식의 축복은 인간들의 욕망에 영합하는 것으로서 꼭 하나님께가 아니라 우상이나 부처, 심지어는 강이나 바다에 가서도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3박자 축복관에 따르자면 바울 같은 사람은 가장 저주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기득권과 명예와 재물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포기하고 자비량 선교사(tent-maker)로 나섰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다른 것은 몰라도 건강 하나는 주셨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아프면 선교를 제대로 할 수 없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건강마저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에게 육체의 가시가 있다고 말했습니다(고후 12:7). 기독교의 복이라는 것이 건강과 물질에만 있다고 한다면 세상에 바울 사도같이 저주받은 사람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육체에 가시가 있는 것을 하나님이 주신 축복으로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이며 복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께서 복 있는 자라고 하신 사람들은 어떤 자들입니까?"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입니다. 어떤 주석서는 이 팔복(八福)"그리스도인이 받는 단계적인 복이다"라고 해석을 해 놓았습니다. 이 해석에 따르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최고의 복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것이 최고의 복이라고 말할 수 있는 종교는 기독교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 비록 그것을 실천을 못하고 있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사실 한국에서는 이 복을 별로 강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복 받을까봐 두려워합니다. 유신정권 때나 5공화국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정말 그 복을 받으려고 하고 그 복을 받기 위해 애썼다면 한국의 정치 경제 상황은 더 나았을지도 모릅니다. 학생들이 감옥에 가는 대신에 목사님들이나 교회 지도자들이 앞장서서 갔다면 학생들은 감옥에 가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도치된 축복관 때문에 기독교는 한국의 자본주의화와 관련해서 나타나는 바알 문화와 아세라 문화를 극복할 힘을 잃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 후로 광야 시절부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신신당부하신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 있는 바알 신과 아세라 신을 절대 섬기지 말라고 누누이 강조하셨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과 출애굽한 이스라엘백성들 간의 공통점은 순례자의 길을 가는 인생이라는 점입니다. 순례자의 길을 가는 사람은 정착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합니다. 텐트 생활이 아니라 벽돌로 만든 집에서 안정되게 며칠 푹 쉬고 싶어합니다. 경제 생활 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매일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께 구하는 훈련을 시키려고 하루 먹을 만큼의 양식만이 주어지는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곳에서 농사를 지어 곳간에 잔뜩 들여놓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신이 바로 바알 신입니다. 가나안 땅의 풍요와 정착을 의미하는 신입니다.그러나 하나님께서는 40년 광야 생활을 통해 "너희는 순례자다. 하나님만을 의지하라"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바알 신에게 미혹되지 말고 오히려 경계하라고 여러번 강조하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바알 신이 언급될 때면 아세라 신도 항상 함께 나왔습니다. 아세라는 미()와 성()과 생산의 신입니다. 희랍의 아프로디테와 같은 신입니다. 향락과 퇴폐 문화의 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질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있다고 믿는 풍요로운 물질 문화에는 향락 퇴폐 문화가 따라다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바알 문화와 아세라 문화가 우리 사회에 만연한 것은 물론이고 교회 안에까지 침투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예리한 학자들은 "한국 교회는 십자가 간판 달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바알을 섬기고 있다"고까지 얘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도된 축복관을 바꾸지 않으면 이 바알 문화와 아세라 문화를 극복할 길이 없습니다.

이제 부자(富子)에 대한 정의(定義)를 다시 해야 합니다. 많이 소유하는 자가 부자가 아니라 많이 줄 수 있는 자가 부자입니다. 많이 갖고 있는데 전혀 주지 못하는 사람은 부자가 아닙니다. 자기가 없는데도 마음 씀씀이를 통해 베푸는 사람이 정말 부자입니다. 부자에 대한 생각을 기독교적으로 재정립해야 합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으며 더 많이 봉사하고 희생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에 접근하는 것이 참된 복이라는 생각을, 전도된 축복관을 극복하는 하나의 대안(代案)으로 제시해야 할 것입니다.

 

신학의 부재(不在)

 

한국 기독교가 안고 있는 또다른 문제는 몰지성주의, 반지성주의입니다. 웬일인지 복음주의권 내에서는 복음 위에서 성실하게 사고하고 깊이 파헤치려는 노력들이 부족합니다. 이것은 치명적이라 할 만한 약점입니다.

저는 민중신학에 대해 개인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러나 그 민중신학의 역사적 의의는 굉장히 높이 평가하는 편입니다. 왜냐하면 한국 기독교사에서 한국인이 자기의 상황을 문제 의식을 가지고 받아들여서 그 문제 의식 위에서 최초로 정립시킨 신학이 바로 민중신학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그 내용에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는 높이 평가해 줍니다. 그런데 복음주의자들은 고민과 연구는 게을리하면서 민중신학 비판만 하고 있습니다. 민중신학자들이 제기한 문제가 우리 상황 속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상황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해답을 주고 있는가 하는 것을 정말 진지하게 연구하는 신학화의 작업이 더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애써서 나무 위로 올라가는 사람 다리 잡아당기고 못 올라가게 하는 일만 하고 있습니다. 잘못 올라가니까, 위험하니까 잡아내린다는 것은 변명은 되겠지만,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 우리복음주의자들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