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마태복음

[마5:21] 호리라도 남김 없이

'코이네' 2019. 7. 27. 22:50

 

호리라도 남김 없이

5:21~26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jHkouvsate)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5:21~22) jHkouvsate o{ti ejrrevqh toi'" ajrcaivoi", ouj foneuvsei": o}" d a]n foneuvsh/, e[noco" e[staith'/ krivsei.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5:26)ajmh;n levgw soi, ouj mh; ejxevlqh/" ejkei'qen, e{w" a]n ajpodw'/" to;n e[scaton kodravnthn.본문의 진술방식은 매우 독특하다. 옛 사람에게 말한바본문의 이러한 표현은 독자들로 하여금 여러가지 해석적 견해를 갖게 한다. 그 중 하나는 주께서 옛 사람에게는 이러이러하게 말씀하시고 너희에게는 이러이러하게 말씀하시는, 즉 진리에 대한 기술(記述)이 서로 달리 나타나고 있는 말씀으로 보는 경우이다. 다시 말하면 모세를 통해서 하신 말씀은 오늘 산상수훈을 통해서 하시는 말씀과 현격한 차이가 있는 것으로, 모세의 계명을 예수께서 수정해서 말씀하고 계신다는 해석이다. 즉 모세에게 주신 옛 계명과 산상수훈에서의 말씀은 차원에 있어서 전혀 다른 것이다 라고 하는 견해가 있을 수 있다.

 

실제로 성경을 해석하는 많은 이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오해를 흔하게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모세를 통해 주어진 살인치 말라는 계명이나 혹은 간음에 대한 계명이 단순히 현상적인 외적 결과만을 규제하고 있는 계명이라면 산상수훈에서는 이의 동기까지도 완전하게 규정하고 있다고 한다. 인간의 외적인 행위만을 규정하는 법이 아니라 좀 더 근원적인 마음속의 동기를 중요시하는 계명임을 예수께서 드러내고 계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간음 행위나 살인 행위 에만 관심을 가졌지만 주님은 그 행위 이전의 마음과 생각 속의 욕망까지를 지적하고 궁극적으로 비난 받아야 할 부분은 이 숨어 있는 악한 마음속의 욕망임을 드러내고 계시다는 해석이다.

또 하나 있을 수 있는 견해는 다음과 같다. 즉 모세의 계명과 예수의 산상수훈의 말씀은 다른 것이 아니다. 다만 예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계명의 진정성을 비로소 옳게 해석하고 계시다는 해석이다. 서로 다른 계명은 아니지만 그 계명을 바라보는(해석하는) 눈이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의 시각과 예수의 시각의 현격한 차이를 볼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비로소 예수에 의해 그 계명들은 옳게 해석되고 있다는 지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본문에 대한 두 가지 일반적인 시각 중에 하나는 모세를 통해서 주어진 계명과 예수를 통해서 주신 계명은 그 율법의 완전성에 비추어 볼 때 다른 것이다 라는 견해와 또 하나는 근본적으로는 다른 것은 아니지만 다만그 계명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예수와 이전 사람들(서기관과 바리새인)과의 현격한 차이가 있다는 견해이다.

 

그러나 새로 주어진 계명이라는 견해이든 아니면 단순한 해석의 차이라는 견해이든, 이 둘의 견해는 옛사람에게 주어진 것이 외적인 행위에 대한 규정인 반면 예수는 그 내적인 동기까지를 지적하고 있다는 면에서는 동일하다.

그러나 여기서 생각해 볼 일이 하나 있다. 외적인 행위의 규범으로 나타나 있든 아니면 내적인 동기까지를 지적하는 것이든 상관없이 그 본질에 있어서 차이점은 무엇이냐 하는 물음이다. 그것은 따지고 보면 그렇게 부각시켜 강조될 일이 아니다. 외적인 행위나 마음속의 간음이나 이미 같은 맥락 속에 있는 인간의 행위의 모습이다. 즉 행위를 한 것이나 마음속에서 간직하고 있는 것이나 같은 죄악이며 같은 범죄인 것은 새삼스럽게 예수의 지적이 아니라 하더라도 상식일 수 있다는 말이다. 아마도 어떤 이들은 당시의 종교문화적인 풍토 속에서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율법적용의 문제에 있어서 지나치게 내적인 동기는 무시하고 외적인 행위의 결과에만 치중하여 모세율법을 해석하고 적용했기 때문에 이의 절실한 시정이 필요했을 것이라고, 그리고 예수는 바로 종교인들의 그러한 해석적 오류를 지적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런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설득력이 약하다. 새삼스럽게 동기와 결과의 차이를 들쳐내줘야만 알정도로 그렇게 인간의 윤리의식이 무지하지만은 않다는 상식에 비춰봐도 그러하다. 그런 정도는 예수님 당시보다 훨씬 이전의 고대문헌들에서도 지적되고 있는 것들이다. 살인 하지 말라 를 미워하지 말라 라는 말까지로 확대규정하신 것이라고 치자. 살인은 마음과 생각속에 내재한 사악함까지도 금하신 말씀이라고 하자. 그렇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이 무엇이라는 말인가? 계명에 대한 이전의 해석과 새로운 해석이 주어져서 도대체 무엇이 달라질 수 있다고 기대하겠는가? 기껏해야 이전에는 살인이나 간음의 행위를 하지 않으면 되었던 것이 마음속의 동기까지를 억누르려는 노력이 보태졌으면(?)졌지 따지고 보면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오히려 인간의 내적인 갈등만 더 심화(?)시켜 주는데 일조만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이들은 그러한 내적인 갈등을 통해서 하나님과 더 가까워질 수 있도록 자신을 끊임없이 돌아보게 하고 경건한 삶을 살도록 이끌어주는 말씀이라고 할런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마음속에 혹시라도 자리할지 모를 악을 제거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쓰며 신앙생활 하는 이들도 많으리라.

 

우리가 여기서 이 본문을 보면서 생각해 봐야 할 일은 어떤 조문이나 계명의 표현 양식에 있는 것이 아니다. 모세를 통해 하신 말씀이나 예수를 통해 하신 말씀은 사실 다른 것이 전혀 없다(?). 그것은 원리적인 통찰력을 가지고보면 쉽게 드러난다. 여전히 인간은 옛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와 같은 방식으로 5:22의 말씀을 청취한다는데 역사의 되풀이는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살인치 말라 라는 계명을 그렇게 듣던 옛사람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여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라는 말씀도 동일하게 듣고 있다. 어떻게? 마음속의 동기까지도 규정하고 계시다는, 그래서 살인의 원초적인 부분을 금지하고 있는 항목이라는 방식으로 듣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원초적이라는 말은 윤리적인 측면에서의 표현이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본질의 문제를 언급하시는 말씀이다. 단순한 살인이라는 계명을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보기보다는 그것을 예로한 훨씬 그 이상의 원리적 의미를 담고 하시는 말씀이다. 지금까지 산상수훈의 흐름에 비춰보더라도 그것은 쉽게 추론할 수 있다. 산상수훈의 대의를 생각해보라.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와 너희의 의의 근본적인 차이를 놓치지만 않는다면 이 말씀을 옛사람의 방식으로 듣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옛사람에게는 어떠한 말씀을 한다 하더라도 옛사람의 방식으로 들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은 어쩔 수가 없다. 검은 안경을 끼고 있는 사람에게 붉은 색을 아무리 그럴듯하게 설명을 해준다 해도 전달이 안 되듯 도리가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말씀하시는 분의 문제가 아니다. 듣고 있는 사람의 문제이다. 이들은 괜히 자기가 그렇게 들어 놓고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 라고 생떼를 쓰고 있는 것이다. 진리는 항상 그렇게 나타난다. 진리 자체가 이중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듣는 대상들의 다양성 때문에 여러가지 측면에서의 역할을 하고 있고 또한 해석되고 있으며 들려지고 있는 것이다.

 

 

코이네설교자료실


 

예수께서는 지금 계명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진리를 말씀하고 계신다. 본질을 말씀하고 계시고 있다. 원리를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이것을 모르는 인간은 항상 조문에 얽매인다. 그래서 어떤 조문을 얼만큼 지켯는지 혹은 범했는지에 관심을 기울인다. 때문에 살인치 말라(ouj foneuvsei":)를 지켯느냐 지키지 못했느냐 쪽으로 관심을 갖는다. 심판을 받게 될까 아니면 받지 않을까 하는 쪽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형제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노했느냐 노하지 않았느냐 하는 식의 관심이다. 기독교인들의 신앙 양식이 그렇게 되어 있다는 말이다. 경건한 그리스도인은 형제에게 노하지 않은 분량이 클 것이고, 하나님께 보여드릴만한 것이 그래도 있을 터이고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항상 마음은 원이로되 그게 잘 안됩니다. 어떻게 좀 해주십시오 식이다.

 

그러면 이 말씀은 어떤 말씀인가?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 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이것은 하나의 진리에 대한 진술이다. 이것은 계명도 아니고 권고의 말씀도 아니다. 즉 그리스도의 교훈으로 받아드려서는 안된다. 이것은 하나의 선언이요 선포이다. 진리에 대한 진술방식으로 살인의 문제가 등장된 것뿐이다. 하나님 나라의 모습과 너희의 의의 참됨을 이것처럼 손쉽게 진술하기란 쉽지 않다. 물론 다른 형태의 여러가지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진리에 대한 매우 독특한 방식의 진술을 보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산상수훈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노해서는 안된다는 식의 교훈적 이해로 접근하면 그것은 옛사람의 귀를 갖고 듣고 있기 때문이다. 율법 아래에 있는 자마다 저주 아래에 이미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5:22 이하의 말씀도 옛사람에게는 여전히 몽학 선생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고 구원 얻는 이들에게는 생명의 말씀으로 주어지고 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확고부동하게 하시는 말씀이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된다. 왜 그러한가? 형제에게 노하고 있는 현상은 이미 자신이 율법 아래에 있음을 반증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형제에 대해서 노하는 자인가? 그리고 왜 노할 수 밖에 없는가? 여기서 형제가 누구냐를 구태어 따질 필요는 없다. 그것은 누구를 막론하고 상관이 없다. 다만 노하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 때문이냐 하는 것이다. 오늘날도 우리는 많은 것을 목도한다. 성경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많은 논란이 있는 것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것은 그러한 말씀에 대한 이해나 주장이 말씀을 지킨다는 미명 아래 하나의 법으로 작용하여 형제에 대하여 노하고 있는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모습을 우리는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이미 그것은 자신이 철저히 율법적이라는 스스로의 고백을 하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자신의 깨달음이 깨달음으로, 자신에게 생명적인 삶으로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그 소중한 깨달음이 자신 속에서 법으로 작용(변질되어)하여 형제도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요구와 주장의 형태를 띠고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어느 순간 깨달음이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당위의 명령형태(법의 형태)로 바뀌어 나타나서 형제에게 요구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그것은 자신을 법 아래로 이끌어 가고 있으며, 자신이 율법의 노예 상태에 있음을 시인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즉 이미 말로는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운 자로 선언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존재하는 줄 알았는데 삶 속에서 그러한 생각은 착각임을 생생하게 증거해 주는 것이다. 아직 그것은 말뿐이지 착각이라는 것을 고발해 주고 있다. 즉 이 말씀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하다는 것을 잘 지적해 주고 있는 말씀이기도 하다.

 

왜 형제에 대해서 라가( JRakav) 라고 말하는가? 이것은 단순히 속빈 녀석 이니 골빈 녀석(Empty Head) 이니라고 말하는 현상적인 욕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누가 누구를 보고 미련한 놈(Mwrev)이라고 말하는가? 거듭 말하거니와 이것은 원리적인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다. 그러고 있는 동안은 누가 무어라 해도 그에게 있어서 율법은 지나가지 않았다. 그러고 있는 동안은 형제에게 사랑의 향기를 발하고 있는 모습이 아니다. 그리고 항상 형제는 형제가 아니라 틀린 자이다. 노하게 되는 이유는, 즉 라가 라든지 미련한 놈 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자신의 생각 속에 자리하고 있는 기준에 상대방이 미치치 못할 때 나오는 현상이다. 손쉬운 표현으로는 상대방이 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화가 나는 것이다. 더구나 신앙에 있어서 그것은 상대방이 말씀에 비춰보니까 틀리더라는 것이다. 적어도 감정적인 화를 내지는 않더라도 너는 틀려먹었다고 하는 것은 자기가 보는 성경의 기준에 비추어 볼 때 상대방이 그렇지 못하다는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 말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에 있어서 말씀을 파수하기 위한 명분이 노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한걸음 더 나아가고 있음을 우리는 중시하지 않을 수 없다. 성경은 견해 차이를 중재하거나 어떤 주장을 가지고 있는 이의 입장에 서서 변호해 주는 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4:15)라고 하는 말씀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진리의 내용에 대한 것을 지켜야 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물론 내용이 무시되거나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진리나 삶은 그러한 내용에(혹은 지식에)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한 오해가 성경의 오묘한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나 계시된 말씀이 자신에게 있어서 율법으로 전락하여 그렇지 못한 형제에 대하여 노하거나 화가 나는 이유로 등장하게 되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보게 되는데, 이처럼 한심한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이미 그러고 있는 동안은 자신이 심판 가운데 거하고 있음이요 거기에는 하나님의 의가 자리할 여지가 없다. 다만 자신의 의만 주인이 되어서 설치고 있을 뿐이다. 그 자신의 의()라는 것은 어떤 계명을 잘 지켰다는 의()도 될수 있겠고 혹은 자신의 깨달음이라는 것이 의로 자리 잡고 있을 수도 있겠다. 그래서 자신의 의()가 왕노릇하면서 너는 왜 그렇지 못하냐고 하는 호령과 공회의 심판만이 있을 뿐이다. 아주 자애스러운 재림주나 되는 듯한 신앙의 모습과 동시에 재판관의 모습을 지닌 두 얼굴을 가진 사나이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적어도 진리의 세계나 하나님 나라의 모습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네 형제가 너에 대하여 거치는(kata; sou') 무엇인가를(ti)가지고 있다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너의 형제와 먼저 가서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기본적인 출발점이되기 때문이다. 즉 예물은 하나님 나라가 시작된 사람의 삶이 드려지는 것일진대 예물을 드린답시고 애를 쓰고 있지만 제스추어만 하고 있다면 이것은 헛수고만 될 뿐이기에 그런 것이다. 본질적인 변화, 즉 옛사람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예물보다도 급선무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라. 라는 것이다. 여기에도 여러가지 해석을 할 여지가 있으리라.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아직도 그 대상이 누구이든 간에 즉 그리스도이든 아니면 사탄이든 혹은 의견을 달리하는 형제이든 상관없이 이미 송사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자신이 어떤 상태엔가 머물러 있기 때문에 아직도 여전히 송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즉 송사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자신의 현주소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 송사의 대상에 따라서 상태의 차이가 있기는 하겠지만 송사라는 측면에서는 다를 것이 없겠다.

문제는 급히 사화(eujnow'n)하는 방법이다. 어떻게 이 송사로 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사화로 제시된 방법은 무엇인가?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ajmh;n levgw soi)네가 호리라(e[scaton kodravnthn, 마지막 동전한닢)도 남김없이 다 갚기 까지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ouj mh; ejxevlqh/" ejkei'qen) 라는 것이다. 그렇다. 그러한 송사에서무엇인가 하나라도 건져보려는 마음이 아직도 당신에게 있다면 아직 송사가끝나기는 멀었다. 무엇인가 이겨보려는 마음이 있는가? 무엇인가 얻을 것이있으리라 미련을 두고 있는가? 그러한 아쉬움이 남아 있다면 더 싸워야 하리라. 그래서 그 기대를 채우기 위해 더 한번 추구해보라. 그리고 한번 멋있게 이겨보라.그러나 주께서는 말씀하신다. 마지막 동전 한닢을 주어버리기까지는 결코 그곳으로부터 나올 수 없다고 . 이 방법만이 살인의 문제로부터 제기되었던 형제에게 노(oJ ojrgizovmeno" tw'/ ajdelfw'/ aujtou')하는 문제와 송사의 문제들로부터의 해결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여기에 힌트가 들어 있고 열쇠가 있는 것이다.그렇지 않으면 여전히 살인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이 말씀들은 당신에게 송사의 말씀(ajntivdiko")으로 남아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