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평케 하는 자
본문 : 마태복음 5:9
화평케하는 자의 복-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Ⅰ.화평이 무엇인가 그리고 화평케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화평 평화 평강 다 같은 의미로 보시면 되겠습니다. 구약에서는 샬로옴, 신약헬라어로는 에이레네 이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바람직한 관계, 상태를 말합니다. ‘화평케하는 자’라고 하니까 영어로 피스메이커 즉 평화를 만들고 도모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탄절에 임하신 예수님을 축하하는 천사들의 찬양은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평화로다” 그러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누구와 화평하셨습니까? 사람과의 사이에서 화평을 도모하시려고 애쓰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화평케 하신 화평의 대상이 누굽니까? 인간과 인간? 아니에요 사실이 그렇지요. 이세상은 싸움으로 그나마 평화가 옵니다.
1)예수님은 3년반의 공적인 생애동안 화평을 도모하시기보다는 노상 싸우셨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는 독사의 자식 회칠한 무덤이라고 욕을 하셨을 정도입니다. 제자들에게는 주님은 뭐라 그러십니까? 마태복음 10장 34-36절.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내가 화평을 주러온 것이 아니고 劍을 주러 왔기 때문에. 서로 그 검을 들고 싸우게 될 거라고 하셨습니다. 말씀만 이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예수님처럼 갈등을 많이 일으키시고 분쟁을 가는 곳마다 일으키시고 특히 그 나라와 민족의 지도자들 급에 대한 존경심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그런데 그렇게 까부술 수가 있습니까? 독사의 새끼들아! 주님이 하신 행동 중에 어디서 평화를 찾아볼 수가 있습니까? 주님처럼 소요와 소동을 많이 일으키신 분이 어디 있어요. 주님처럼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누구보다도 가는 곳마다 소요를 일으키신 분인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물론 로마서 12장 18절에 할 수 있거든 너희는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를 추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도 예수님이 소요를 일으키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의 빛 아래서 해석을 해야지 더 맞는 얘기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이 더 중심이 되어야 되지요.
그리고 사도 바울이 얘기한 그 평화를 사람들 간에 평화를 추구한다는 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 검을 갖고 제 집안 식구가 원수가 된다고 하는 말씀에 비추어볼 때 뭘 뜻하는 가를 생각해야지요. 그냥 인륜이나, 도덕론자들이나 박애주의자들이 말하는 그런 평화가 아니지 않습니까? 또 국가와 국가 간에 평화도 아니지요. 반기문 유엔사무총장님은 지금 온 세계의 분쟁 화해를 위하여 동분서주하고 있는데 주님은 그렇게 나라와 나라 간에 민족과 민족 간에 평화를 위해 애쓰신 것이 없어요. 식민지 하에 있던 이스라엘은, 로마를 원수로 생각합니다. 로마는 이스라엘을 짓누르고 일제때처럼 세리들을 세워 착취합니다. 일제가 우리나라 쌀 철 동 인력 다가져갔듯이 말입니다. 그래도 주님은 메시야로 오셨으면서도 그 두 민족 간에 화평을 추구해보신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오히려 믿음이 크도다 라고 칭찬하신 몇몇의 경우를 보면 이방나라 수로보니게 여인이고 이방 로마의 백부장입니다. 그러니까 같은 민족 이스라엘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너무 열불 나는 겁니다. 주님은 분명히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 간에 평화를 위해서 일하신 분이 아니에요.
Ⅱ. 그러면 주님은 어떤 대상들에게 평화를 원하셨습니까?
1. 주님께서 화평케 하신 대상은 오직 하나님과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자신은 하나님과 아무 갈등이 없어요. 예수님이 유일하게 평화를 유지하신 대상은 하나님 뿐입니다. 제자들 조차도 예수님을 이해를 하지 못하고 갈등을 겪어요. 십자가에서 갈등을 겪고 다 떠나지 않습니까? 다 버리는데 거기에 무슨 평화가 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유일하게 화평하신 분은 하나님 뿐이세요. 하나님과 갈등이 없어요. 따라서 주님이 화평을 위해서 일했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을 위한 화평을 위해서 일한 것 뿐이에요.
인간과의 화평, 나라와 나라의 화평은 하나님과의 화평의 빛 아래서 종속적으로 다루어져야 될 문제이지 주님이 우선적으로 바라지않으셨어요. 주님은 오직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화평을 원하셨어요.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은 근본적으로 화평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 인간의 죄악이고, 그 죄악에 장악된 게 인간이고 죄악의 노예가 인간입니다.
이게 바로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거쳐서 어거스틴을 통해서 종교개혁자들을 통해 내려가고 있는 우리 기독교의 근본 신앙고백이에요. ‘奴隸意志’(노예의지) 우리의 의지조차도 뭘 우리가 하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이미 하겠다는 마음 자체가 죄악에 깊숙이 장악되었다는 겁니다. 제가 자주 드는 例중에 사람이 무슨 좋은 생각을 해도 그래봤자 그것은 해적선속의 해적들의 선행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생명과 소유를 뺏아서 먹고 사는 해적이 자기들끼리 치료해주고 먹을 것주고 도와주고 자식사랑하는 것처럼, 죄아래 사는 사람들이 하는 것은 인정 넘치고, 선행인 것 같고, 좋아보여도 하나님 앞에서는 ♬다 죄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죄악에 장악되어 있기 때문에 멸하셔야합니다. 하나님이 거기에 타협을 하실 수도 없고 인간에게 그냥 한 발 양보하여 화평을 이루는 일은 절충같은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의는 죄는 무조건 타도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승리한다는 것은 죄악이 승리하는 거니까.
예)지난주 8일은 일본이 진주만 공격70주년 기념일이었습니다. 일본이 당시에 미국을 상대로 저지른 죄와 우리나라와 동남아 인근나라들에게 행한 만행을 어떻게 괜찮게 봐줄 수 있겠습니까? 그때 루즈벨트가 완전한 항복을 받아낼 때까지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일본을 철저히 파괴할 것입니다 하고 연설하고는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었고, 전세가 어려워지는 데도 그래도 버티니까 이젠 원폭을 퍼붓고 나자 일본이 항복하겠다고 합니다. 그때도 그냥 항복을 받지않고 맥아더가 미즈리 군함에 일왕을 불러더놓고, 항복문서에 조인하게 하고 그래도 성이 안차서 라디오를 통하여 일왕이 일본국민과 세계에 나는 神이아닙니다하고 자백을 하게 했습니다. 일본에게는 그보다 치욕적인 일은 없는 것입니다. 죄란 이런 것입니다.
전쟁은 한쪽이 완전히 패배를 해야 그 다음에 평화가 옵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화평을 이루어야 하는데 끝까지 못 봐줄 이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기면 안 돼요. 인간이 이긴다는 건 죄악이 이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평은 불가능해요. 하나님이 승리해야만 하시니까. 하나님의 죄악에 장악된 인간에 대하여 승리가 절대적으로 인정되어야 하니까. 하나님이 죄악에 장악된 인간에 대해서는 승리하셔야만 하는데 승리라는 것은 평화 대신에 전쟁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에 무슨 평화가 있겠습니까?
여기에 주님의 고민이 있으십니다. 어떻게 아버지와 인간들의 화평을 이루게 할 것인가?
절대 아버지는 승리해야만 해요. 이 화평은 아버지의 승리가 절대적으로 보장되어야 됩니다. 그러니까 화평할 수 없는데 또 인간은 아버지가 승리한다는 것은 곧 인간의 멸망과 인간의 패망을 말합니다.
어떻게 죄악에 장악된 인간에 대해 아버지가 승리는 하시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패망하지 않으면서 이 둘이 화해가 일어나느냐? 참 묘한 거예요. 여러분. 승리하면 패망하는 자가 있게 마련인데 승리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패망해서 없어지지 않고 그 승리하신 하나님과 오히려 화해의 자리로 올라가게 되는 거 어떻하면 있을까요?
인간들이 망하면 안 되는데 죄악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망해야하고, 반드시 피를 흘려야 합니다. 피흘림이 없으면 사함이 없다고 하셨고 죄의 삯은 사망이니까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아~ 내가 피를 흘리면 되겠구나. 내가 저주받고 멸망하면 되겠구나. 내가 인간들의 멸망을 빨아들이면 하나님은 승리하실 것이고 인간들은 멸망하지 않고 승리하신 하나님과 패배한 인간이 서로 화합할 수 있는 사건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주님이 하신 화평케 하심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승리를 인정하는데 어떻게 화평케 되느냐? 그런데 하나님이 승리하시려면 인간들이 망해야 되니까 하나님을 승리를 드리고 인간 편에 서가자고 하나님의 승리의 검이 인간을 향하여 인간을 패망시키기 위하여 달려올 때 그 칼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맞고 죽으신 거예요. 패망의 값을 다 갚고 죽어버리신 겁니다.
2.화평케 하신 예수님과 연합하자.
예수님이야말로 오리지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아버지께서 친히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처음부터 말씀하신분은 예수님이십니다.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우리는 그 화평케하시는 예수님과 연합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섣불리 사람들과 l 사이에 화평케하는 자가 되려고하지말고 일단은 주님과 연합한 자가 되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 주님과 연합한 자들 어떻게 주님과 연합합니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주님에서 연합 사건이 일어납니다. 십자가에 달려 함께 죽는 거예요. 이 연합 사건을 통해서 패망의 죄값이 없어져요. 그런데 이 땅에 살아 있는 동안에 계속 화평케 해야 되요. 내 입장에서 볼 때 내가 화평케 해야 되니까 화평케 해야 되는 주체로서 내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과 인간이 화평해야 되는데 하나님에게 화평해야 할 첫 번째 인간이 누구입니까? 나 자신이에요. 사도 바울이 날마다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얘기는 날마다 나와 하나님을 화평케 하는데 주력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나와 하나님 간에 화평함이 한번 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날마다 화평케 해야 하는 과제라 이겁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나와 하나님과 어떻게 화평케 합니까? 내 스스로 나의 끝난사실을 자발적으로 미리 인정을 해버리는 겁니다. 마치 1940년 6월 14일 독일군이 한달 동안 프랑스와 전쟁을 하다가 프랑스가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어서 이제 파리를 공략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파리가 공격을 받게 되었을 때 파리 시민들이 어떻게 결정을 합니까? 이 파리의 문화유산들이 다 망가지겠구나. 히틀러 나치의 공격을 받아 가지고. 그래서 그 문화유산을 보존하기 위해서 손들고 미리 나가서 독일군들을 보고 어서 오세요. 총 하나 파리를 향해 쏘지 마세요. 어서 오세요. 한 것처럼 미리 우리는 나의 패망을 선언하고 하나님의 승리를 높여드리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 나라고 하는 자의 인생행로의 시간적인 공간적인 소유적인 관계적인 모든 면에서 이기시도록해드리는 것입니다. 즉 나의 완전패망을 선언하고 그것을 늘 인정하는 것입니다.
, 예)기도는 불가능을 가능케하는 것이라고들 가르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죄악으로 장악된 우리들이 무엇에 대해서 아버지께 나의 소원과 나의 의견이 관철될 때까지 기도하겠다는 겁니까?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승리를 인정하고 나의 패망을 받아들이면서 화평을 유지해갑니까?
예를 들어 내가 사업을 합니다. 잘 안 됐습니다. 사업이 안 되는 걸 나도 알지만 나보다 먼저 하나님은 사업이 안 되기 이전부터 이때쯤 사업이 안 될 것도 알고 계신 분이십니다. 알고 계시면서 이런 일을 막지않으시고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게 납득이 안갑니다. 하나님께서는 나한테 아버지라면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 사업 하나 가지고 우리 가족과 직원들이 살아가는데 하나님도 생각이 있으시면 내 사업을 이렇게 하실 수 있습니까?” 이건부당하십니다. 뭔가 인도하심이 잘못 되었습니다. 라고 내 마음을 막 쏱아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실 수많은 기대와 요구사항이 있습니다. 돈 자식 배우자 웰빙 이런것 때문에 그것이 내뜻대로 안되면 불만이 생기고 불평이 생깁니다. 그러나 조심하십시오.
이 세상에 살면서 내 마음에 생기는 모든 불평과 모든 불만은 하나님께 하는 도전이고 하나님과의 싸움이에요. 현실에 대한 불평불만 내 옆에 있는 사람들 가족이든 이웃이든 친척이든 모든 사람들에 대한 불평과 불만은 다 하나님과 싸우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이기려고 하는 거예요.
창세기 32:28-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야곱은 아버지이삭을 이겨먹고 형을 이겨먹고 라반과 그 아들들을 이겨먹고, 얍복강에서는 하나님을 이겨먹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이김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패배의 아픔을 요셉을 잃어버림으로 당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습이니라” 그런데 그 후손인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불만불평하면서 결국은 계속 하나님을 이겨먹으려고 했습니다. 목이 곧은 백성 마음이 완악하여 어떻게든 하나님을 이겨먹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200만이 다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언제는 하나님께 이김을 드리시는 성도님들 되시기 바랍니다.
Ⅲ. 우리는 때때로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화평을 도모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것은 대단히 아름다운 일이지만 그것은 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은 그냥 놔두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그냥 놔두고 하나님께서 모든일에 우리자신을 이기게 해드리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일에 하나님께 이김을 드리는 사람, 그일만 했는데 놀랍게도 우리주위에는 화평이 깃들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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