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자료

요한계시록의 버가모는 어떤 도시인가?

'코이네' 2017. 1. 22. 02:12

버가모(Πέργαμος, 이중 결혼)의 배경
 
1) 버가모의 명칭은 이중 결혼이라는 뜻이다.
버가모의 헬라어 “페르가모(Περγάμῳ)”는 페르(Περ)이중)+가모스(γαμος)결혼)의 합성어로서 이중 결혼을 의미한다. 가모스의 어근 감(γαμ)은 '연합하다'의 의미로 세상 권력과의 합치를 뜻한다. 서머나가 황제숭배의 씨를 뿌리고 싹을 낸 도시라면 버가모(페르가모는 황제숭배의 꽃을 피운 도시이다.

2) 버가모는 소아시아에서 가장 장관인 헬라풍 도시다.
서머나(이즈미르)에서 북쪽 80㎞ 지점에 자리 잡고 있다. 에게 해로부터는 24km 정도 떨어진 내륙에 위치한 도시다. 버가모는 약 390m 높이의 산 위에 세워진 천연 요새로 만들어진 도시다. 소아시아의 서쪽 무시아 지방의 가장 중요한 성읍 중의 하나였다. 에게해에서 내륙으로 24㎞쯤 들어간 지점에 있으며, 가이구스 강가는 거기서 약 3㎞의 가까이에 있다. 버가모의 성채는 가이구스 강의 두 지류 셀리누스와 게디우스의 중간에 있는 높이 약 300m의 구릉 상에 축조되었다. 버가모는 뛰어난 도시 계획 때문에 소아시아에서 가장 장관인 헬라풍 도시였다.

버가모는 2세기의 의사 갈레노스의 출생지이며, 아스클레피오스의 예배로 알려져 있으며, 그 신전과 약학교에는 각지로부터의 내방자가 끊일 사이 없었다. 고대 페르가몬 왕국이 있던 지역과 일치하며 페르가몬 왕국의 광대한 유적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현대의 베르가마(Bergama)는 로마 시대의 도시 유적에 자리 잡고 있으며 한편 고대 그리스 시대의 도시 유적은 그 성채와 함께 베르가마 강 건너 북동쪽, 계단식으로 비탈이 진 높은 산 위에 있다. 또한 서쪽 변두리에도 그리스 시대 유적이 있다. 베르가마에 있는 고고학박물관에는 구석기시대에서 비잔틴 시대에 이르는 현지 유물들이 소장되어 있다. 면 직조와 피혁 공업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주변지역에서는 목화·담배·포도 등을 재배한다.

3) 버가모는 로마제국 시대 아시아의 수도였다.
이곳은 선사시대부터 도시가 형성된 곳이나 도시의 기원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역사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알렉산더 대왕 등장 이후부터다. 알렉산더 대왕이 사망하자 그의 부하 대장인 리시마쿠스(Lysimachus) 는 버가모가 해발 300m 구릉에 위치해 천연적 요새에 있음을 깨닫고 산의 정상에 성을 쌓고 아크로폴리스(고대 그리스 도시의 성채)를 형성하였다.

리시마쿠스(Lysimachus)가 죽자 버가모 왕국이 만들어졌고 이 후 버가모는 로마 시대를 거쳐 비잔틴 시대에 이르기까지 산업과 무역의 중심지러 그리고  문화와 의학의 도시로 번영하였다. 로마제국 시대에는 아시아의 수도로써 최대로 번영하였다.
 
4) 버가모는 유메네스 도서관이 있었다.
베르가모에 가면 시가지 동북쪽 높은 산꼭대기에 자리 잡은 천년요새 아크로폴리스(Acropo
-lis)가 한눈에 들어오는데 여기에는 베르가모 왕궁, 석빙고와 같은 음식 창고, 멀리서 식수를 끌어들여 저장한 저수장, 유메네스(Enmenes) 2세 (197 - 159 B.C.)가 지은 알렉산드리아 다음으로 컸다는 유메네스 도서관이 있고, 가파른 언덕바지에 만들어진 노천극장, 소나무 숲이 우거진 제우스 신전 등을 볼 수 있다.

버가모와 알렌산드리아 사이의 ‘도서관 전쟁’은 결국 후자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주전 1세기 경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이 화재로 크게 손상을 입었다. 이때 클레오파트라 여왕은 매우 상심했고, 이 사실을 알았던 로마 장군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군대를 동원하여 버가모 도서관의 장서를 알렉산드리아로 옮겼다고 한다. 한때 20만권 장서를 자랑하던 버가모 도서관이었다.

현재 도서관 건물 자리가 남아 있다. 그리스 시대 이 도서관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다음으로 큰 도서관이었다. 버가모 도서관은 도서수집광이었던 유메네스 왕의 후원으로 크게 팽창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는 버가모 도서관이 커지는 것을 우려하여 이곳에 파피루스 수출을 금지시켰다고 한다. 그래서 버가모 사람들은 파피루스를 대체할 새 서사용지(書寫用紙)를 만들어낸 것이 양피지였다. 양의 가죽을 펴서 늘린 다음 표백, 건조하면 훌륭한 필사재료가 되었다. 이를 버가멘(Pergamen)이라고 불렀다. 이 말은 라틴어를 거쳐서 영어의 parchment(양피지 羊皮紙)가 되었다. 버가모(Pergamos / Pergamum) 도시가 생긴 후 Pergamen(양피지 parchment)이라는 새로운 물질을 발명했던 대단한 도시였으며 이곳은 당시 로마 제국의 행정 수도로 사용되었다.

5) 종합의료시설 아스클레피움이 있어 소아시아 의료 중심지였다.
또 이곳 시가지 서쪽 외곽지대에는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117 -138년 재위)때 지은 당시 최대의 방대한 종합의료시설  아스클레피움(Asclepieum)이 있다. 이곳은 BC 4세기부터, 그 후 A.D. 400년대까지 약 800년간 소아시아에서 의료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로마황제 카라칼라(Caracalla (A.D. 211 - 217))도 이곳에 와서 치료를 받았는데 이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황제는 거의 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야외 원형극장을 만들어 주었다. 이곳의 치료방법은 약물요법 이외에 정신요법, 일광욕, 운동요법, 맨발걷기요법, 음악요법 등을 사용했다고 한다.

6) 사탄의 권좌 하드리아누스 신전이 있었다.
또한 로마 황제 도미시아누스(81-96년 재위)의 신전과 함께 묵시록 2장 13절에서 말하는 '사탄의 권좌'로 추정되는 하드리아누스 신전이 이곳에 있다. 붉은 벽돌로 지은 이 건축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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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으로 쎌리누스(Selinus) 강이 흐르도록 설계되었다. 본래 2세기에 이집트 신인 세라피스(Serapis)를 위해 지은 것이어서 세라피스 신전이라고도 한다. 붉은 벽돌로 지어져 크즐아블라라고도 불리운다. 신전의 규모는 가로 100m 세로 260m 에 이르고 높이도 20m 에 달해 그 규모가 대단하였으나 지금은 건축물의 벽채만 남아있다.  비잔틴 시대에 국교가 기독교로 채택된 후 내벽을 쌓아 교회로 개조하여 사도요한 교회가 된 것이다.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내가 네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종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이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계 2:13). 
 
이것으로 미루어 Byzantine 시대에 사도요한이 거둔 성과는 매우 높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 이 교회의 유적이 남아있다. 이곳의 부의 근거는 농업과 은광, 가축, 양털직조 그리고 글씨 쓰는 양피지(parchment)였다. 양피지는 이곳에서 처음 재조 사용되었으며 특히 B.C 197 - 195년 유네메스 2세에 의하여 창설된 도서관에는 약 20만권의 책들이 소장되었다고 한다.

① 버가모는 많은 신전이 있었다.
버가모 교회(Pergamos Ch)는 안디바가 믿음을 지키다가 당당히 순교했으나 발람과 니골라당의 그릇된 교훈에 빠진 자들도 있었다. 그곳에는 왕궁, 도서관, 최고의 신 제우스(Zeus) 신전, 로마 황제 하드리안(Hadrian)이 Athena에게 제사를 드리기 위해 세운 아테네 신전, 술의 신 디오니소스(Dionysos)의 신전, 의술의 신 트라이아누스(Aesculapius) 신전 등 많은 신전이 있었다.
 
③ 버가모는 우상숭배의 중심지였다.
버가모는 소아시아에서 로마 제국의 통치를 효과적으로 행사하기 위한 중심적 교두보이며 서머나 처럼 황제숭배의 중심지로 잘 알려져 있다. 특별히 버가모는 로마 황제 아우구스도(Augustus)를 위하여 신전을 지은 최초의 도시이다. 그러므로 버가모 시민들도 서머나의 경우처럼 황제숭배에 대한 총감독으로 버가모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이러한 황제숭배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적 종교적 정황으로 인하여 황제숭배에 대한 공적인 행위가 교회 공동체에게 크게 압력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것에 대한 거부는 곧 반역 행위로 간주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을 무신론자로 불경건한 자들로 여겨졌다.
 
또한 버가모는 여러 다양한 신들의 이교적 숭배 행위의 중심지였다.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Asclepius), 제우스(Zeus), 지혜와 예술의 신 아덴(Athens / Aden), 농업과 풍요와 결혼의 신 데메테르(Demeter) 그리고 주(酒)신인 디오니소스(Dionysos)가 이 도시에서 중요한 숭배의 대상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버가모에 '사단이 위'가 있다는 것은 버가모 배후에 많은 신전들이 있는 원뿔 모양의 언덕을 염두에 둔 표현일 수 있다. 제우스의 신전이 유명하여 사단이 거하는 곳이라고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버가모 교회 성도들이 핍박을 받은 것은 이러한 다신적 분위기도 있지만 황제숭배의 정황이 강하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출처 : 리폼드뉴스 http://www.reformednews.co.kr/sub_read.html?uid=4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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