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요한계시록

[계2:8] 교회의 실상 / 김창인 목사(광성교회)

'코이네' 2016. 6. 15. 22:12

교회의 실상

본문 : 요한 계시록 2 : 8-11

설교 : 김창인 목사 (광성교회)

 

 

"내가 네 환란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9절 상)

 

실상이라는 말에 반대되는 말이 허상입니다. 그러면 실상이란 말은 무엇이며 허상이란 말은 무엇입니까? 실상이란 말은 실제적인 상태 혹은 모습을 이야기합니다. 허상이란 말은 거짓 상태, 거짓 모습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사실상 실제적이며 구체적인 모습을 지녀야 합니다. 예를 들면 여기 어떤 물체가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확대 렌즈를 갖다 비추어 놓으면 저쪽에 나타나는 그 물체는 열 배나 더 크게 보입니다. 실상은 손가락만 한데 렌즈를 통해서 저쪽에 비추어지는 것은 열 배, 백 배나 더 큰 물체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그 물체를 보고 이것이 실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그건 열 배, 백 배로 불려 놓은 가짜이며 허상입니다. 그래서 교회라고 하는 것은 실제적인 모습이어야 합니다. 그것을 열 배, 백 배로 불려 놓은 허상도 보지말고, 열 배, 백 배로 줄여 놓은 허상도 보지말고, 실제적인 모습과 실제적인 상태가 어떠한 가를 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너희 교회는 실상 이렇다 하는 말씀을 하신 그 서머나 교회의 실상이 금년 우리 교회의 실상이 되겠습니다. 해마다 새해 첫 주일 설교의 제목이 우리 기도의 제목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의 달력에 우리의 기원은 부요한 교회, 충성된 교회, 이기는 교회라고 한 것은 오늘의 대지입니다. 서머나 교회의 실상이 이랬다면 우리 교회의 그 실제적인 모습도 이래야 되겠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실제적인 교회의 모습은 이러합니다.

 

 

I. 부요한 교회(8-9절 상)

 

 

부요한 교회가 우리 교회의 실상이 될 서머나 교회의 실상입니다.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환란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8-9절 상)

 

 

부요한 교회, 부요한 성도, 다시 말해서 부자 교회, 부자 성도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서머나 교회의 실상은 부자 교회이고 부자 교인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도 금년엔 부자 교회 되고 부자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부요한 교회 중에서 본문이 가르쳐 준대로 세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① 인정받는 부요

 

 

즉, 예수님께서 인정하시는 부자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8절에 있는 대로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실상은 부자다"입니다. 처음이요 나중이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즉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교회는 실상 부자다" 그래서 우리 교회도 부자 교회여야 되고 부자 교인이어야 하는데 이 부자는 무슨 부자입니까? 돈 부자 이야기 하는 것 아닙니다. 믿음 부자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네가 돈 부자라고 해서, 물질을 많이 모은 세상 부자라고 해서 믿음이 부자라는 말은 아닙니다. 내가 돈 모아 부자가 되었다고 해서 그 사람 믿음도 부자라는 뜻이 절대로 아닙니다. 물질이 없어서 가난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믿음이 가난하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물질은 있으면 좋고 없으면 불편한 것뿐입니다. 가난이 결코 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부자는 돼도 좋고 안 돼도 좋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보실 때는 "너 부자다. 즉, 믿음 부자다. 믿음만은 부자다. 하늘의 신령한 은혜만은 부자다. 말씀이 충만한 부자요 성령이 충만한 부자 즉 신령한 부자"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서머나 교회에 하는 이야기는 너희가 부자는 부자인데 이런 신령한 부자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인정한 부자,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우리 교회가 돈 부자 되는 것 좋습니다. 그러나 좋은 건 좋은 걸로 끝납니다. 주님께서 볼 때는 돈을 보지 않습니다. 믿음을 보십니다. 우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믿음 부자가 되는 교회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② 환란 중의 부요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유한 자니라"(9절 상)

 

 

환란 중의 부자라는 겁니다. 사실상 서머나 교회가 말할 수 없이 환란을 당하는 중에서도 참 믿음만은 잃어버리질 않았습니다. 환란 중에 믿음 다 잃어버리고, 환란 중에 은혜 다 떨어지고 말면 진짜 가난뱅이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네 환란을 아노니 그 환란 중에서도 너는 부자다"라고 했습니다. 신령한 부자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다 평안하고 좋기만 할 때는 예수를 잘 믿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일 당해 보고 환란을 당해 보면 그 사람이 진짜 믿음의 사람인지, 가짜 믿음의 사람인지 압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흔히 보고 또 자주 듣는 이야기이지만 욥의 부부를 생각해 보십시오. 10남매 낳아서 다 키우기까지 한 솥의 밥을 먹고 함께 자고 함께 일하며 수십 년을 같이 살아오면서도 이 부부는 하나같이 잘 믿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허락 하에 마귀의 장난으로 10남매가 하루아침에 죽고 그 엄청난 재산이 벼락맞고 강도 떼가 달려들어 빼앗아 가고 하루아침에 거지가 되었습니다. 거기다가 욥은 또 상피 병이라는 세상 병원에서 고치지 못하는 병까지 걸렸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일을 갑자기, 똑같이 당했는데, 아니 오히려 남편 욥이 더 심하게 당했는데도 욥은 그 전보다 더 찬송을 잿더미 위에서 부르고 그 전보다 기도를 더 열심히 합니다. 그런 때에 그 아내가 환란을 이기지 못하고 와서 하는 말이 "이런 지경이 되고도 그 하나님을 믿느냐, 그 하나님 저주하고 당신 자살해 죽어 버리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을 떠나 버리고 남편을 떠나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지금까지 수십 년을 함께 먹고 입고 자며 믿음 생활하던 그들, 똑같이 어려운 일 당해보니 그 아내의 믿음은 거짓이었습니다. 그 아내의 믿음은 하나의 허상이었다는 것이 나타났고 욥의 믿음은 진짜였습니다. 환란 중에 믿음 지키고 은혜를 간직합니다. 오히려 더 키워 나갑니다. 그래서 욥을 가리켜 환란 중에 실상은 믿음의 부자라 할 수 있습니다. 욥의 갑절의 축복만 달라고 그러지 마십시오. 욥은 정말 그걸 받을만한 그런 믿음을 가졌고 아내는 욥에게 줄 때 거기에 참여할 자격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머나 교회는 환란 중에 믿음이 부요했고 은혜가 풍성한 신령한 부자였습니다. 우리도 1년을 살아가는 동안에 환란이 없다 장담 못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죽습니다. 그럴 때 환란 중에서 우리의 믿음을 얼마나 키워 나가며 정말 얼마나 은혜를 간직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 볼 때에 정말 신령한, 환란 중에서도 신령한 부자로 인정받기를 바랍니다.

 

 

③ 궁핍중의 부요

 

 

"내가 네 환란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9절 상)

 

 

그러니까 궁핍 중의, 즉 가난 중의 부자라는 말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상당히 가난했고 또 초라했습니다. 밖에서 볼 때에는 정말 가난으로 핍절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볼 때에는, 네가 세상 적으로 볼 때에도, 사람들이 볼 때에도 다 가난하다고 하지만 내가 너를 보니까, 정말 먹을 것 제대로 못 먹고, 입을 것 제대로 못 입고 그 다음에는 쓸 것 제대로 못 쓴다고 할지라도 네 믿음만은 부자라는 것입니다. 이런 부자를 참 부자라 하겠습니다. 이 가난이라고 하는 것은 생활을 무척 불편하게 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가난은 나에게 믿음을 더하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선교사 리빙스턴, 그는 길거리 노점 장사하는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헌금하고 싶어도 헌금을 못한 사람입니다. 공부도 제대로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진정 나같이 가난한 저 아프리카 사람들, 내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되겠다는 결심을 갖게 된 것이 바로 가난에서 싹튼 생각입니다. 그는 스코틀랜드 사람입니다. 스코틀랜드에서 아프리카에 선교사가 가서 토인들을 몇 사람 전도만 하면 다른 동에 사람들이 와서 잡아먹습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어느 선교사 한 분이 열심히 전도한 후 돌아왔습니다. 7년 만에, 즉 안식년에 돌아와서 그 토인들의 비참한 모습을 교회에 다니면서 간증하니까 가는 교회마다 해달라고도 안한 헌금을 해줍니다. 우리가 직접 가서 참여하지는 못하나 이 헌금이 선교에 보탬이 되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한 교회에 갔더니 헌금을 하고 헌금 통을 갖다 놓았는데 아직도 젊고 그렇다고 그의 어리지 않은 고등학생 정도 된 사람 하나가 헌금 통 위에 올라앉아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기도할 때 "헌금 통 가까이 오는 건 좋지 않습니다. 어서 일어나시오"라고 거듭 말하였습니다. "목사님 저는 아무리 뒤져보아도 하나님 앞에 바칠게 없습니다. 그래서 전 선교사님의 보고와 간증을 듣고 저도 그곳에 가서 선교사가 되겠다고 마음으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물질적으로 드릴 게 없어서 직접 몸을 바치려고 헌금 통에 갖다 담아 놓은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목사는 감격해서 한 번 더 기도해 주었습니다. 온 교인이 울었습니다. 그가 바로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어 후일 아프리카에서 크게 성공적인 선교를 한 리빙스턴입니다. 어린 아이들까지 잘 압니다. 그러면서 리빙스톤이 마지막으로 한 말이 자기가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라면 자기는 가난한 집에 태어나겠다. 자기는 가난 때문에 지금 아프리카 선교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가난하지 않고 부유했다면 못 했을 거라는 것입니다.

 

 

리빙스톤은 가난 속의 정말 신령한 부자였습니다. 세상 물질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습니다. 있으면 더 편한 것뿐이요, 없으면 불편한 것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만은 가난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II. 충성된 교회(9하-10절)

 

 

① 훼방 중의 충성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9절 하)

 

 

이 서머나 교회의 교인들에 대해서 훼방이 많았지만, 훼방자는 멀리 있는 사람들이거나 이방 사람들이 아닙니다. 자기의 동족,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서머나 도시는 유대 나라의 도시가 아닙니다. 이방인 도시입니다. 살기 좋다고 소문나니까 유대인들이 많이 그리로 이주해서 이민을 갔습니다. 그 서머나 시민들의 3분의 1이 유대인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의 발언권이 강합니다. 바울 사도가 복음을 들고 들어가 전하여 교회가 하나 세워졌는데 그게 서머나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 많은 유대인들 중에 서머나에 세워진 교회에서 유대인들이 예수 믿는 것을 정말 마땅치 않게 여겼습니다. 속이 불편해 견딜 수가 없어서 예수 믿는 유대인을 훼방하고 핍박을 하는 겁니다.

 

 

천호동에 가보게 되면 호남 동지회, 영남 동지회 뭐 이런 것들이 간혹 있습니다. 다 고향 떠나 살면서 동지회를 만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서머나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이주해 와 살다 보니까 유대인 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서머나 교인들에게 "너희들을 핍박하고 훼방을 놓는 저 유대인 회가 있지 않느냐?" 물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 회를 따져 보아라. 그들은 육신적으로 출생한 생태적인 입장에서 보면 선민이요, 택한 백성의 자손으로 태어났으니까 택한 백성이고 종교적으로 볼 때도 선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이 선민, 택한 백성이라고 할 지라도 하는 짓은 전부 마귀 짓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저 유대인 회가 있지만 실상은 사탄의 회, 마귀의 회라는 겁니다. 교회가 안되게 하려고 계속 비방하고 훼방 놓습니다. 이런걸 다 알면서도 서머나 교인들은 전혀 흔들림 없이 정말 충성 또 충성을 합니다. 어떤 사람이 내가 충성하고 봉사할 때에 훼방 놓습니까, 비방합니까, 거기에 구애받지 말라는 말입니다. 누가 나를 칭찬해 줍니까. 거기에 기분풀이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칭찬하지만 주님이 칭찬 안 하면 어떻게 합니까. 사람이 훼방하고 비방하지만 주님이 좋다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 교회 안에도 우리 교회뿐 아니라 교인이라는 이름은 가졌지만 주님의 일에 훼방 놓는 훼방꾼들이 없는 줄 아십니까. 비방하는 비방꾼들이 없는 줄 아십니까? "너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느냐"고 합니다. 그럴 때 그의 말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서머나 교인들은 이런 비방 중에서도, 훼방 중에서도, 충성했습니다.

 

 

② 시험 중의 충성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10일 동안 환란을 받으리라"(10절 상)

 

 

옥에 던져 너희 믿음을 시험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저에 대해서 아는 분도 많고 모르는 분도 많을 겁니다. 저는 6.25사변 때, 18살에 혼자 피난 왔습니다. 내 고향은 이북인데, 이곳에 누가 있는 것도 아니요, 아는 사람 하나도 없었습니다. 만일 이북이 공산당이라 할지라도 너 여기 살면서 마음껏 예수 믿으라 하면 나는 안 왔습니다. 무엇 하러 옵니까, 예수 맘대로 믿기 위해서 나온 것입니다. 미국이라는 나라를 세워 훌륭히 발전시킨 미국의 조상들, 영국의 청교도인들이 자기의 문전 옥답, 재산 다 고스란히 놓고 배 하나 얻어 타고 와서 천신만고 끝에 저렇게 훌륭한 믿음의 나라 세운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돈 벌러 왔습니까? 아닙니다. 신앙의 자유 하나만을 위해서 온 것입니다. 신앙의 자유, 믿음 하나, 이렇게 자유롭게 믿는다는 것, 축복 중의 큰 축복인 줄 알아야 됩니다.

 

 

여기 보니까 서머나 교인들에게 하는 말이 "너희 중 앞으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너희 믿음을 시험할 때가 오리니 너희가 당하는 환란을 10일 동안 당하리라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라 충성해라"였습니다. 바로 그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키워 우리로 하여금 한 단계 올려 주기 위한 시험입니다. 그러나 마귀가 시험하는 것은 우리를 멸망시키고 유혹하고 거꾸러뜨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보니까 마귀란 놈이 서머나 교인들에게 환란과 핍박을 가해서 믿음을 떠나게 만들려고 합니다. 너희들의 믿음이 있나 없나 믿음을 그대로 가지고 계속 충성하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정말 시험 중에도 우리는 계속 충성해야 하겠습니다. 서머나 교인들이 그런 시련을 당할 때에도 충성한 것처럼 우리 교회는 충성은 충성이로되 훼방 중에도 충성하고 시련 중에도 변함 없는 충성을 바치는 우리가 돼야 하겠습니다.

 

 

③ 죽도록 충성

 

 

"10동안 환란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10절 하)

 

 

죽도록 충성하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목을 내놓고 사는 사람입니다. 목을 내놓고 사는 사람은 죽일 테면 죽여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런 사람을 누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나 죽인다 하게 되면 벌벌 떠는 사람은 제일 약합니다. 말 안 들으면 죽인다고 하면 벌벌 떨고 쫓아오니까요. 그러나 누가 야단쳐도 "죽일 테면 죽여보라" 는 사람은 아주 무서운 사람입니다. 제일 무서운 사람입니다. 어린아이들 싸울 때 가만히 보십시오. 조그만 어린아이한테 조금 큰 아이가 그냥 두들겨 맞습니다. 왜 그럴까요? 조그만 어린아이는 죽을지 살지 모르고 달려드는데 큰 아이는 자기 몸을 아끼고 도사립니다. 오히려 두들겨 맞고 싸웠다 하면 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아이들도 죽을지 살지 모르고 싸우는 애한텐 못 이기는 것입니다.

 

 

요즈음은 그렇지 않지만 한동안 남산이 참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남산에 등산을 가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남산에 안 갑니다. 그때 목사들을 붙잡아다가 남산에서 몹시 고통을 주었었습니다. 그런데 내 친구 목사도 붙잡혀 가 두들겨 맞고 거의 병신이 돼 가지고 나왔습니다. 끌려가서 그냥 두들겨 패면 죽을죄로 잘못했다고 하는 사람들은 그대로 방면해 주었지만 죽일 테면 죽여 보아라 하는 사람은 어떻게 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귀란 놈이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목을 내놓고 예수 믿는 사람을 제일 무서워합니다. 어떻게 하지를 못합니다. 목 베어 가라는데 어떻게 할 것입니까? 그러나 마귀가 제일 좋아하는 신자는 그저 죽인다 하면 벌벌 떠는 사람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서머나 교인들에게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입니다. 목을 내놓고, 죽을 셈치고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즉 목숨을 바쳐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 누구였느냐 하면 폴리갑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주후 155년 2월 23일 순교를 했습니다. 그 많은 교인들과 서머나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산 사람 묶어 놓고 그 자리에서 장작 쌓아 놓고 산 채로 태워 죽였습니다. 교인들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목사가 죽었으니까 장로들은 생각하기를 "다음은 내 차례로구나"했습니다. 다음 차례는 내가 순교할 차례라는 것을 알고 충성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이제는 내게 남은 길은 순교뿐이 없다 하는 자세로 충성한 것입니다. 이것이 죽도록 충성하는 것입니다.

 

 

전에 내가 시무하던 교회에서 강도사일 때에 거기 여전도사님 한 분이 계시는데 환갑이 넘어 은퇴하라니까 뭐라고 하면서 울고 다녔는지 아십니까. 성경에 죽도록 충성하라 그랬는데 나도 죽도록 전도사할 거랍니다. 그런 의미의 죽도록이 아닙니다. 목숨 내놓고 순교할 각오로 충성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진짜 충성은 무엇이냐? 목숨을 갖다 걸고 하는 그 충성입니다. 그런데 여기 보니까 서머나 교회가 그런 죽도록 충성한 교회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사랑하는 성도들도 충성이로되 훼방 중에도 충성하지만 목숨을 걸어 놓고 순교적인 각오로 충성하는 것, 이것이 정말 충성된 성도요, 충성된 교회입니다.

 

 

III. 이기는 교회(11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11절)

 

 

① 말씀을 듣는 자가 승리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승리합니다. "귀 있는 자들은 들으라" 이게 묘한 말입니다. 벙어리 아닌 다음에야 귀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러니까 벙어리 말고는 다 들으라는 말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들을 귀 있는 자, 들을 줄 아는 사람만 들으라는 것입니다.

 

 

내가 언젠가 한 번 경제인들 모이는 모임에 참석한 일이 있었습니다. 가서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경제인들이 자기네 전문적인 술어만 써 가면서 하는데 한국말인가, 영어인가, 한국 사람이 한국 말 하는데도 내가 못 알아듣겠습니다. 경제적인 술어를 알려면 경제에 전문가가 돼야 합니다. 그래서 아 저것이 무슨 말이구나, 벌써 다 감을 잡고 아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과학자들의 모임에 가 보십시오. 과학자들의 모임에 가 자기네끼리 토의할 때에 듣고 알아듣겠나 보십시오. 귀가 있어도 못 알아듣습니다. 그 과학자들, 자기네끼리는 통하는데 들을 귀가 우리에겐 없습니다.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 보면 들을 귀 있는 자는 듣는데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사람, 경제인 갖다 놓아야 못 알아듣습니다. 과학자 갖다 놓아야 못 알아듣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전문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전문가, 하늘나라 전문가, 성경의 전문가, 이런 전문가 아니면 나가서 싸워 이기질 못합니다. 과학자가 전문적인 사람 아닌 다음에야 어디 나가서 내가 과학을 했다 할 수 있습니까. 경제인이 전문가가 안 되면 가서 자기가 경제인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신자들은 믿음의 전문가, 하늘나라 전문가, 성경의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들을 귀가 있는 사람, 성령이 하는 말씀을 들을 줄 아는 사람, 이 사람이나가 믿음의 승리, 선한 싸움에 승리, 마귀와 더불어 싸워 승리하는 자가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기는 사람은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합니다.

 

 

② 이기는 자는 해를 받지 아니함

 

 

죽음에는 첫째 둘째 죽음이 있습니다. 육신이 죽는 것을 첫째 죽음이라고 그러는데 이것은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똑같이 죽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죽음이 있는데 두 번째 죽음은 믿지 않는 사람만 당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은 두 번째 죽음과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영혼이 하나님께 버림받아서 영원한 지옥에 빠지는 것을 두 번째 죽음이라 합니다. 그래서 내 육신이 죽는다 하게 되면 내 영과 육의 인연이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육신은 썩어져 버립니다. "내 영혼이 죽는다" 하는 것은 두 번째 죽음인데 하나님과 인연 끊어지면 이 영은 지옥에 갑니다.

 

 

첫 번째 죽음은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다 당합니다. 그러나 두 번째 죽음을 당하는 사람은 가장 불행한 사람이요 그건 영원한 죽음이요, 다시 어떻게 살고 죽고 할 기회가 없는 죽음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싸움에서 믿음의 전문가가 되어서 승리하는 사람은 두 번째 죽음과 상관없이 하나님 계신 천국에 가서 하나님 주시는 모든 영광을 유업으로 받는 천국의 소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 하는 말은 지옥과 상관이 없고 오직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것뿐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말을 들을 줄 아는 믿음의 전문가가 이기고 나가 믿음의 싸움에서 이기는 사람은 둘째 사망이 그를 주장하지 못하고 하나님과 영원한 관계를 갖고 하나님 계신 천국에 가서 그 영광을 유업으로 받는다는 보장으로 믿습니다.

 

 

우리 교회의 실상, 혹은 서머나 교회의 실상이 무어냐 하면 부요한 교회입니다. 영적으로 믿음이 부요한 부자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는 괴로우나 즐거우나 훼방을 놓든 내가 시험을 당하든 내가 목숨 내놓고 충성하는 충성된 교회가 되어야 하고 그 다음에는 신령한 싸움에서 나가 믿음의 전문가가 되어서 승리하고 둘째 사망과 상관없이 영원한 하늘나라의 주인공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by 코이네자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