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사도행전

[사도행전25장] 고소해도 되는가? / 이동원 목사

'코이네' 2015. 12. 1. 23:32

고소해도 되는가?

본문 : 행25:1-12

설교 : 이동원 목사  

 

재판을 하는 이유는 앞에서도 말한바 와 같이 억울한 일을 당한 국민들이 국법에 호소하여 그들의 정당한 권익을 보호받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병원에 가보면 온 세상 사람들이 다 환자로 착각하리만큼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재판소에 가보면 역시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 재판만 하고 있는 것이므로 착각하리만큼 많은 사람들이 법석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불신 세계 속에서 살면서 그들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당면할 때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어려운 문제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재판’문제입니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해도 일체 송사라고 하는 것을 하면 아니되는 것인지 ,아니면 그리스도인들이 송사를 해도 하나님 앞에 죄가 아니되는 것인지를 잘 모르는 수가 많이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몇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믿는 사람들은 가능하면 고소하기보다는 합의해서 문제를 해결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좋습니다.

둘째, 만일 이것이 여의치 아니하면 교회 재판국에 의뢰하여 해결을 얻도록 하는 것이 차선의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셋째, 그러나 어느 한 편이 교인이 아닐 경우에는 교회에 해결을 의뢰할 수 없으므로 이런 때는 사회 법정에 호소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될 경우에 그리스도인들의 취할 태도는 어떠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그 대답을 성경에 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1. 바울은 피고인으로서만 법정에 섰습니다.

바울은 선교 활동을 하는 동안 여러차레 법정에 서기는 했지만 한번도 자신이 원고가 되어 남을 고소한 적은 없습니다. 그는 번 번히 피고로 불려 가서 재판정에 서게 됐을 뿐입니다. 그러나 단 한번도 남을 고소하여 재판정으로 끌고 간 적은 없습니다.

부득이 한 경우라면 그리스도인들이 송사를 제기한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 죄가 된다고는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능하다면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상대방을 고소하여 법정을 끌고 가는 일은 신중을 기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사건이 완결되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경비와 정력이 소모되므로 재판으로 얻는 이보다 손해가 더 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법관도 인간이기 때문에 오판할 수도 있고, 또한 외부 압력에 못 이겨 잘못된 결정을 내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느 사형수가 ‘나는 미국 관리와 병사는 존경하지만 미국 재판관은 존경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는데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셋째, 물론 정당한 사유와 정당한 절차에 의한 것이라면 원고가 됐다고 해서 신앙적으로 죄가 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재판에 이기든지, 지든지 간에 피고와는 영원히 원수가 될 것입니다. 개다가 자기를 고소한 원고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알 때 그는 평생 교인을 적대시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로 하여금 전도 길에 영원히 실족케하는 결과가 되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적인 문제가 아닌 한, 가능하면 원고가 되지 않는 것이 지혜로운 일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고소라는 것은 어떤 것이던 유익보다는 손해가 크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2. 바울은 응분의 징벌을 회피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재판하는 것을 보면 거의가 다 죄에 대한 징벌을 회피하기 위한 것들입니다. 혹자는 죄를 범해 놓고 징벌을 모면하려고 애쓰고, 어떤 이는 자기의 죄보다 가벼운 징벌을 받아 보려고 몸부림들입니다. 그러나 바울을 다뤘습니다.

1절에 보면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사죄를 범하였으면 죽기를 사양치 아니할 것이나.......”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기에게 죄가 있다면 그 죗값을 받되 만일 그 벌이 사형에 해당되는 것이라도 달게 받겠다는 것입니다.

 

‘최 린’은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의 한 분입니다.

그러한 그가 후일 변절하여 친일 행위를 했다는 죄목으로 해방후 반민특위에 끌려와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이름이 끼어 있는 독립선언서가 걸린 재판정에 민족 반역자로 서게 되니 그는 회한과 수괴를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재판장의 물음에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습니다. ‘이제 최 린이가 이 자리에서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기소 사실 외에도 더 많은 죄를 범한 놈입니다. 나에게 아무 것도 더 묻지 말아 주십시오. ‘최 린’을 대중 앞에 끌어다 극형에 처해 주시오’ 그리고 그는 방청석을 돌아보며 말했습니다. ‘동포 여러분 앞에서 내가 뭐라고 입을 열겠습니까. 빨리 민족의 이름으로 이 ‘최 린’을 광화문 네거리에서 처단해 주십시오’ 이때 71세의 노인 ‘최 린’의 얼굴에는 회오의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방청석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울음은 삽시간에 번져 재판장도 손수건을 눈물로 적셨습니다. 그리고 검찰관도, 정리도, 형리관도 그리고 취재기자까지도 모두 울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찌라도 부득이한 경우에는 재판을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죄의 성립 여부를 따지기 위한 것이어야지 형벌의 회피만을 위한 것이라면 신앙 양심에 합당치 않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죄를 범하였으면 죽기를 사양치 아니하겠노라’고 바울처럼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3. 바울은 불의를 용납치 않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서둘러 원고가 된 일은 없지만 일단 피고의 몸으로 재판정에 불려 나오게 되면 그는 절대로 불의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죄에 대한 형벌을 결코 회피할 사람이 아니지만 그러나 무고한 사람에게 대한 불의한 재판을 절대로 용납할 사람도 아닌 것입니다.

행25:11절에 다시 보면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사죄를 범하였으면 죽기를 사양치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의 나를 송사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누구든지 나를 그들에게 내어 줄 수 없삽나이다......”라고 그의 정의감은 불을 토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음흉한 고소인들은 위증에 능란한 법이며, 타락한 법관들은 뇌물에 약한 법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들은 서로 결탁하여 그릇된 재판을 하기가 일수입니다. 바울을 고소한 유대인들은 위증에 능수였으며, 재판장 벨릭스 역시 열번 찍어 아니 넘어갈 나무는 못되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자기를 송사한 것이 사실이 아닌 한, 누구든지 자기를 유대인에게 무법 하게 내어 줄 수 없다고 못을 박아 말했습니다. 그리고 가이사에게 상소하리라고 의사를 밝혔습니다. 우리는 여기 바울에게서 죄가 있다면 징벌을 회피하지 않겠다는 맑은 양심을 배우는 한편, 죄 없는 자를 희생시키려는 불의한 흉계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는 투철한 정의감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철학자 ‘스피노자’는 물욕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를 기화로 누이는 ‘스피노자’가 받을 유산을 자기 앞으로 빼돌렸습니다. 그러나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스피노자’는 누이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하고 자기 몫의 유산을 되찾았습니다. 그 다음 되찾은 유산을 고스란히 누이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스피노자’는 물욕이 없는 사람이기는 했지만 정의감마저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내가 준다는 것과 빼앗긴다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양심도, 정의감도 없이 송사만을 능사로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할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송사를 하려면 양심의 명령을 준수하고 사회 정의를 확립하기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욕되게 하며 전도 길을 막는 일이라면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후에 하나님께서 갚아 주실 것입니다.

 

바울은 한번도 자신이 원고가 된 일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어떤 이유로든지 남을 고소한 적이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의 전도를 막기 위해서 무죄한 바울을 모함하고 그리고 고소했을 뿐입니다. 바울은 재판 만능 주의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웬만한 일은 참고 견디어야 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징벌의 회피나 감면을 호소하려고 법정에 서지는 않았습니다. 자신의 정당성 내지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절대성을 입증하기 위해서 였던 것입니다. 세상에 무서운 것은 죄이지 징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결코 불의와 타협하거나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워할 자는 권력자가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바울의 재판을 도우셨습니다.

5절에 보면 “또 가로되 너희 중 유력한 자들은 나와 함께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만일 옳지 아니한 일이 있거든 송사 하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즉 베스도 총독이 부임 인사차 예루살렘에 갔을 때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보내 달라는 유대인 지도자들의 요청을 거부한 것입니다.

 

9절에 보면 “베스도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더러 묻되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라고 했습니다. 즉 며칠 후 베스도가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심문 받을 의사가 있느냐고 그의 의사를 물은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당시의 관습으로 신임 총독이 지방 유지로부터 받은 최초의 청탁은 수락하게 돼 있었기 때문에 베스도가 유대인 지도자들의 요청을 거부한 것은 자기 생각으로 한 일이라고 볼 수 없으며, 또한 그가 몰라서 그렇게 한 것도 아닙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만일 이때 베스도가 유대인들의 요청을 수락했거나 바울의 의사를 묻지 않고 독단적으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보냈다면 틀림없이 도중에서 매복 자들에게 피살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베스도를 인도하셔서 바울을 위기에서 구출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무슨 일에나 바울처럼 옳고 바르게 처신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언제나 도우신다는 교훈입니다. 우리도 언제나 이 믿음을 가지고 정당하게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언제나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고 의와 진리를 위해서 사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사도 바울처럼 살기를 원하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가 항상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y 코이네자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