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사도행전

[시도행전24장] 기독신자의 양심 선언 / 이동원 목사

'코이네' 2015. 12. 1. 23:06

기독 신자의 양심 선언 

본문 :  행24:14-23

설교 : 이동원 목사  

 

오늘 이 시대를 가리켜 양심 불감증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양심의 기능이 마비되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짓과 아첨과 위선과 모든 죄악으로 뒤범벅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사실을 거짓이라고 하며, 거짓을 사실이라고 말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리고 본 것을 못 봤다고 하고, 못 본 것을 보았다고 서스름 없이 말하는 세상입니다. 뿐만 아니라 한 것을 안했다고 하며, 안한 것을 했다고 주장하여 남이야 죽든지 말든지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세상이 그렇다손 치더라도 사람들의 시시비비를 가려야 할 법관들마저도 공명정대하게 재판하지 아니하고 신성한 재판을 뇌물이나 정치적인 수단으로 사용하는 경우를 과거에 우리는 얼마든지 보아 왔습니다.

재판이란 억울함을 당한 백성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며 이 사회에 불의와 불법이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보면 돈 많고 권세 많은 사람들의 비호 세력으로 이용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돈 없고 배경 없는 사람들만 언제나 억울함을 당하며 살아왔습니다.

 

그것이 개혁을 부르짖고 있는 오늘에 와서도 별다른 변화가 없게 되자 여전히 백성들의 마음에 맺혀 있는 한은 풀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요새 인기 상승에 있는 T. V 방영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포청천’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맺혀 있는 한을 풀 길이 없었는데 요즘은 ‘포청천’을 보면서 한을 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거기에 나오는 주인공이 바로 ‘포대인’이라고 하는 재판관인데 그는 자신의 영달과 개인의 사사로운 이익은 조금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심지어는 자기 생명을 내대고 오직 백성들을 위해서 공명정대하게 재판하는 시원스럽고 통쾌한 모습입니다.

힘도 없고 돈 없도 없는, 그리고 가난하고 못사는 백성들이 부자들과 권세 있는 자들에게 착취와 억울함을 당해 왔지만 양심에 때묻지 아니한 ‘포대인’한 사람으로 인하여 정의와 공의로 법이 집행되는 모습을 보면서 큰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오늘 그 테레비 방영의 인기가 높은 것은 오늘의 개혁이 법조계에도 이러한 변화가 있기를 기대하는 백성들의 무언의 외침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법에 관심을 가진 학생들이나 어린아이들까지도 ‘나도 이 다음에 법관이 되면 포대인과 같은 법관이 되어야 겠다’고 다짐하는 모습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봉독한 총독 벨릭스의 선고 공판 내용을 읽어보아도 역시 그의 양심이 정상 가동을 하고 있다는 증거를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는 전부터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하여 자세히 알고 있었습니다(22절). 그렇다고 하면 바울을 이 이상 더 심문할 필요가 없으련만 바울의 재판을 뒤로 미루고 그를 계속 가두어 두었습니다.

 

이것은 한편으로 유대인의 감정을 자극시키지 않으려는 정치적인 술수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바울로부터 뇌물을 기대하는 처사였다고 하니 재판장으로서의 양심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행24:26절을 보면 벨릭스 총독의 속셈이 뻔히 드러남을 볼 수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고 했습니다.

즉 원고인 대제사장 쪽이나, 재판장인 벨릭스 총독이나 하나같이 양심의 기능을 상실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 타락한 원고와 재판장 앞에서 피고인 바울은 양심 선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행24:16절에 보면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자신은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살기를 힘쓰고 있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오기 전에는 물론이요,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에도 그가 책잡힐 일을 한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올라온지가 12일 밖에 안 될 뿐 아니라, 그 동안 성전이나 회당이나 그밖에 어느 곳에서도 누구와 변론한 일 차도 없으니 소요 범이란 말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리고 조상들이 가르친 하나님을 믿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말씀을 믿으며, 저희들 원고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소망을 가지고 있는 자기에게 이단의 괴수라는 정죄도 언어도단이며, 오랜만에 동족을 위한 구제 금과 제물을 가지고 귀국하여 그 동안 성전에서 결례까지 행한 사람에게 성전을 모독했다는 비난은 천만부당하다고 바울은 예루살렘 도착 이후에 행적을 들어 자신의 떳떳함을 입증했습니다.

 

이 세상에 양심을 따라 사는 사람은 그리 많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살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어떻게 양심을 따라 살 수 있었을까? 하는 점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받기를 원합니다.

 

1.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니 계신 곳이 없고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속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범죄의 방지를 위해서 엄격한 법률도 제정될 필요가 있고, 강력한 사회 여론도 조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범죄 방지를 위한 최상의 방책이 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법이 무서워서 죄를 범치 못하는 사람은 법이 조금만 해이해져도 곧 범죄하게 되며, 남의 눈이 무서워서 악을 행치 못하는 사람은 그 눈이 잠시만 한눈을 팔아도 곧 악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처의 유혹을 물리친 것은 애굽의 법이 무서워서도 아니고, 남의 이목이 두려워서도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나 굽어보시는 하나님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창39:9절에 보면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라고 외치면서 유혹을 일축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보다 더 좋은 사회 정화 정책은 없는 것입니다.

참으로 탐관오리의 근절을 바란다면, 그리고 진정으로 청소년 선도를 원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 경외하는 법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 있어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수가 증가하지 않는 한 절대로 사회 개혁과 정화는 기대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정치적인 방법으로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사명이 막중하다는 것을 재인식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2. 예수님의 대속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상중에 최대의 걸작품은 ‘돌 월드센’의 그리스도 상이라고 합니다. 그가 이 작품으로 이름을 떨치게 되자 이 소식을 전해들은 프랑스에서는 ‘루불’박물관에 설치할 ‘비너스’여신상의 조각을 그에게 부탁해 왔습니다.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될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상을 조각한 손으로 우상을 조각할 수 없다는 것이 유일한 이유 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대속의 주십니다. 나의 죄를 담당하여 내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내 죄를 벗겨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만일 이것을 중심으로 믿는다면 그의 대속의 죽음으로 구속의 은혜를 입은 내가 다시 죄를 범하여 구주이신 그리스도를 배신하고 나 자신을 다시 더럽힐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다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욕보이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히6:6절에 보면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중에 양심을 지켜 정결하게 살기를 원하는 분이 있다고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항상 재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그를 배신하지 못할 것입니다.

 

3. 부활을 믿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직접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보신 분이십니다.

고전15:8절에 보면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 했습니다. 그후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부활의 증인 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믿으며, 또한 자기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장차 부활할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은 자의 첫 열매로써 그의 뒤를 이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다시 삶을 얻을 것이라고 바울은 증거했습니다.

 

그런데 부활에는 영광스러운 부활과 욕된 부활이 있다고 바울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고전15:23-24절에 보면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고 했고 요5:29절에 보면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했습니다.

 

현세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내세의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 영원한 천국과 지옥을 믿는다면 죄를 지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은 방종을 일삼으면서도 정신적인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는 성도라면 양심을 외면하고 자신을 더럽히는 일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부활을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대해서나 사람에게 대해서나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이 살기를 힘쓴다고 말한 것입니다. 바울이라고 할지라도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내일 죽을 인생이니 먹고 마시고 즐기자’라고 하면서 옛날 사울처럼 살았을 것입니다. 고전15:32절에 보면 “내가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가 부활 신앙을 확고히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가장 강력한 오염 방지 제가 될 것이며, 경건 촉진제가 될 것입니다. 상대방의 말을 들어보면 그의 사람됨을 안다고 합니다. 언제나 의도적으로 사실과 반대되는 말을 하는 것은 그의 사람 됨됨이가 사악하기 때문이고, 꿀처럼 달콤한 말을 기름처럼 미끄럽게 쏟아 놓는 것은 그의 본성이 간사하고 교활하기 때문이요, 으레 남을 헐뜯어 말하는 것은 그의 본성이 잔악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어떤 말을 함에 있어서 미사여구를 엮어 낸다고 해서 아름다운 말이 되는 것도 아니고, 언성을 높여 말한다고 해서 힘있는 말이 되는 것도 아니며, 천연스럽게 말한다고 해서 진실한 말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양심대로 말하는 말이란 가장 아름답고, 힘이 있고, 진실한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양심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포대인’과 같은 법관들이 생긴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도둑 한 사람을 열 사람도 잡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양심을 따라 살지 아니하고는 이 사회는 언제나 지옥으로 치닫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양심을 따라 살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인정과 더 큰사랑을 받을 뿐만 아니라 나 한 사람, 한 사람으로 인하여 우리 교회와 나라와 민족이 새로워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y 코이네자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