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시편

[시 13] 울부짖음이 노래로 바뀌다 _스펄전 설교

'코이네' 2025. 4. 25. 17:58
반응형

울부짖음이 노래로 바뀌다

본문 : 시편 13:1-2, 6

찰스 해든 스펄전 1889년 4월 28일
출처: 메트로폴리탄 태버내클 펄핏 39권



이 시편은 아주 짧아서 여섯 절밖에 없지만, 시작과 끝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처음 두 절은 가장 깊은 슬픔을 담고 있지만, 마지막 절은 가장 큰 기쁨을 담고 있습니다. 다윗은 그의 많은 시편을 한숨으로 시작하여 노래로 끝맺습니다. 그래서 저는 피터 물랭이 "이 시편들은 상반된 기질을 가진 두 사람이 지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한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다. 만약 제가 "여기 두 사람이 있습니까, 아니면 한 사람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저는 한 사람뿐이지만 그 한 사람이 두 사람이라고 답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두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모든 영적인 사람은 두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 안에서 옛 사람과 새 사람, 옛 본성과 새 본성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리고 새 본성 자체조차도 기묘한 변화를 겪습니다. 마치 4월의 날씨처럼 햇살과 소나기가 뒤섞인 것처럼 말입니다. 때로는 모든 소나기가 햇살 위에 쏟아지는 것 같고, 햇살 자체가 꺼져서 우리를 기쁘게 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다윗은 경험의 변화에 ​​있어 놀라운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자신을 위해서라기보다는 후손들의 유익을 위해 많은 경험을 겪도록 허락하셨습니다. 다윗의 시편을 읽을 때마다 어딘가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구석에 몰리는 일은 없지만, 그 구석에 다윗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저는 다윗이 더 낮다는 것을 깨닫지 못할 만큼 비참했던 적이 없었고, 다윗이 제 위에 서서 현악기로 자신의 노래를 부를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할 만큼 높이 올라간 적도 없었습니다. 마치 제가 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두 장의 사진은 순간적인 사진입니다. 첫 번째 사진은 불평하는 사람의 모습을, 두 번째 사진은 기뻐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늘 밤 우리도 그런 사진 두 장을 찍을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 앉아 불평하다가 예배가 끝나기 전에 기뻐하며 길을 떠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마 여기서 누군가 "각 사람이 두 사람이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갑니다."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음, 그 점에 대해 좀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든 사람은 신비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신비이지만, 만약 그가 생각한다면, 그는 자신에게도 큰 신비입니다. 그리고 만약 그가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면, 왜 그는 참으로 신비라고 생각합니까? 그는 생각하는 힘이라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게으르게 방치하는 것입니까! 자신을 탐구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을 이해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어리석은 판단입니다. 자신을 친구로 삼고, 자신을 동료로 삼고, 스스로에게 말하고, 스스로를 심문해 온 사람은 "나는 당황스럽다. 나는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 나는 종종 어리석다. 나는 너무나 이상한 혼합물이고, 너무나 끔찍하게 변하기 쉽다."라고 말할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친구여, 당신은 어느 정도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결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당신이 그분을 모른다면, 당신은 영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분을 아는 것이 영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 우리 자신을 알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당신은 의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기 위해 질병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기억해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모범적인 인간이며, 사람들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아야만 우리는 그분에 대해 많이 알 수 있습니다. 시편이 종종 다윗이 자신에 대해 썼는지, 주 예수님에 대해 썼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쓰여진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한 구절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적용될 수 있고, 당신은 다윗이 메시아에 대해 썼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그러나 다음 구절은 그리스도에게 적용하기 어렵습니다. 그 안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폄하하는 용어들이 들어 있으므로, 그것은 다윗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합니다. 사실 다윗과 다윗의 주님 사이에는 놀라운 연합이 있고, 성도와 그의 구세주 사이에는, 믿는 자와 그가 믿는 분 사이에는 놀라운 연합이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하나가 시작되고 다른 하나가 끝나는 지점을 항상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당신이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면, 당신은 인자, 곧 사람의 사람, 사람의 구세주, 많은 형제들 가운데 맏아들, 우리가 아직 온전히 그분의 형상을 본받지 못한 분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저는 아직 구세주를 알지 못하는 모든 분들께 하나님께 기도하여 그분 자신을 알게 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어쩌면 당신이 누구인지 알게 되면 그리스도가 무엇인지 알게 될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가난을 진정으로 인식하게 되면, 당신은 부를 얻기 위해 그분께 의지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병을 진정으로 인식하게 되면, 모든 것을 치유하는 약을 얻기 위해 그분께 간구하게 될 것입니다. 분명히, 당신이 모든 이해력을 다해 자신을 이해하는 것을 잊지 않도록, 가장 고귀한 동기로 당신에게 촉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당신의 책꽂이에는 많은 책들이 있지만, 당신은 그것들을 읽지 않고, 당신 안에 있는 이 책, 모든 사람들의 글보다 당신에게 더 큰 관심을 쏟는 이 놀라운 책을 잊지 않습니다. 당신 자신의 본성, 당신의 욕망, 당신의 열망, 당신의 변화에 ​​대한 책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이 그것들과 친숙해지도록 하시고, 인자의 삶에 기록된 은혜의 책에도 친숙해지도록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서문으로서 우리의 텍스트를 연구해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처음 두 연에서 한 남자가 불평하는 모습을 보실 수 있습니다. 세 연을 더 지나면 노래하는 남자가 나오는데 , 두 번째 연에서 그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밤 우리는 이렇게 질문하며 이야기를 마무리하겠습니다. 불평하는 남자와 노래하는 남자 사이의 연결 고리는 무엇일까요? 이 불평하는 남자는 어떻게 콘서트 음정에 도달하고, 길을 한참 더 가기도 전에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을까요?

     I. 먼저, 불평하는 남자가 있습니다.

     여기 울부짖는 사람이 있다고 말씀드리는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 처음 두 구절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 나를 잊으시겠나이까? 영원히 잊으시겠나이까? 어느 때까지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시겠나이까? 어느 때까지 내 영혼에 근심하며 날마다 내 마음에 근심이 있으리이까? 어느 때까지 내 원수가 나를 치솟게 하리이까?" 제가 그것을 울부짖음이라고 불렀을 때 제가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여기에는 불평이 너무 많고 의문이 너무 많습니다. "어느 때까지? 어느 때까지? 어느 때까지? 어느 때까지?" 네 번이나 반복되어 다윗이 자신의 기도를 "내 포효의 소리"라고 불렀듯이 우리도 그것을 "내 포효의 소리"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그의 영혼의 쓰라림 속에서 울부짖고, 포효하고, 신음하는 일종의 불평입니다. 이 네 가지 "어느 때까지?"를 살펴보고 그것들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첫째, 가난한 자의 슬픔은 이렇습니다 . "주님, 언제까지 저를 잊으 시렵니까 ? 영원히요?" 잠시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잊으실 수 있을까요? 전능하신 분이 잊으실 수 있을까요? 변함없는 사랑이 잊으실 수 있을까요? 무한한 신실함이 잊으실 수 있을까요? 그러나 다윗에게는 그렇게 보입니다. 가장 깊은 고난에 처한 사람들에게도 종종 그렇게 보입니다. "언제까지 저를 잊으시렵니까?" 당신은 자비를 구하며 기도했지만 찾지 못했고, 하나님께서 잊으신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수년 동안 평화를 찾아 헤맸지만 찾지 못했고, 하나님께서 잊으셨다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어쩌면 수년 전에는 가장 행복한 사람 중 한 명이어서 하나님의 얼굴빛에 젖어 있었는데, 지금은 가장 불행한 사람 중 한 명이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돌아가려고 애썼지만 돌아갈 수 없어서 하나님께서 당신을 잊으셨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고난의 파도가 당신을 덮쳤을지도 모릅니다. 슬픔의 파도 속에서 숨 쉴 시간조차 거의 없었습니다. 낙담하여 곧 죽을 것 같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잊으셨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에게는 그렇게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잊으실 수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여인이 젖먹이 자식을 잊을 수 있겠느냐?" 이 표현에 주목하십시오. 여전히 가슴에서 영양분을 빨아먹는 자식 말입니다. 당신은 여전히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당신을 잊으셨다고 생각하더라도, 당신은 여전히 ​​그분께서 매일 주시는 것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그분께서 당신에게 은혜와 힘을 주시지 않는다면 당신은 죽을 것입니다. "여인이 젖먹이 자식을 잊을 수 있겠느냐? 제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설령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 이 위대한 진리를 붙잡고 겉모습과 오류에 불과한 것을 버리십시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기를 잊지 않으셨고, 심지어 당신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다음 “어느 때까지?”라는 다윗의 울부짖음은 그의 고통의 실체를 보여줍니다. “어느 때까지 당신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시겠습니까?” 여러분 중 어떤 이들의 실상은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얼굴을 여러분에게서 숨기셨을 뿐, 마음이나 생각이 아닙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잊지 않으셨지만, 당신의 미소가 주는 위로를 거두셨습니다. 오늘 밤 “주님, 어느 때까지 당신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시겠습니까?”라고 부르짖고 계신가요? 당신이 그 부르짖음에 기쁩니다. 불경건한 자들은 하나님의 얼굴이 그들에게 나타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항상 자신의 얼굴을 숨기시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얼굴도, 그분의 은총도 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싶어 한다면, 그 얼굴이 당신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의 빛을 잃었다고 해서 당신이 불행한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의 빛을 가진 자는 그것을 잃을 수 없으며, 한순간이라도 잃을 경우 마음이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선을 보일꼬 여호와여 주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소서.” 오직 당신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시면, 우리는 가장 큰 재산을 소유하거나 가장 높은 수준의 인간적인 박수갈채를 받는 사람을 부러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 충분합니다. 오,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여, 만일 당신이 아버지의 얼굴 빛을 잃어버렸고 그것을 갈망한다면, 당신은 그것을 다시, 곧 되찾을 것입니다! 당신이 얼마나 갈망하느냐에 따라 그분의 부재의 길이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조금만 갈망한다면, 그분은 오랫동안 떠나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많이 갈망한다면, 그분은 곧 당신에게 오실 것입니다. 당신은 곧 그분의 얼굴이 가려져 있던 것이 사라지고, 그분의 얼굴 빛이 다시 당신의 기쁨이 됨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문제의 진짜 의미입니다. 비록 그것이 지속되는 동안은 큰 문제이지만, 당신에게는 유익합니다. 항상 낮만 있다면 어떤 식물이 자랄까요? 밤이 낮처럼 식물을 잘 자라게 하지 않나요? 형제자매 여러분, 항상 좋은 날씨만 있다면 수확이 가능할까요? 아랍 속담에 "햇볕이 사막을 만든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비가 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푸른 풀이 자랄 수 있겠습니까? 해와 달빛이 과일을 익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서 얼굴을 숨기실 때 슬퍼하십시오. 하지만 슬퍼하는 것처럼 절망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도 그분이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당신이 보지 못하는 것은 사랑의 얼굴입니다. 당신 스스로 그렇게 믿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진노의 얼굴이라면, 당신은 다시는 그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에게서 숨겨진 사랑의 얼굴입니다. 그러므로 용기를 내십시오. 당신은 머지않아 그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그 사람의 슬픔이 자기 안에 있는 그대로 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내 영혼이 날마다 근심하며 어느 때까지 내 영혼이 고민하며 살겠느냐?" 그는 자신에게 말합니다. 이것이 그가 자신에게 하는 조언이며, 그로부터 큰 도움을 얻지 못합니다. 때때로 자신에게 말하는 것은 지혜의 표시이지만, 스스로를 신탁으로 삼는 것은 지혜가 아닙니다. 사람은 스스로에게 말을 걸어 절망에 빠질 때까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이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하느냐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라고 말했을 때처럼, 자신을 빛으로 인도하는 자신과의 대화 방법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에게 말하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자아가 신비롭게 말하는 것을 해석하고, 자아가 오류로 왜곡하는 것을 바로잡을 수 있는 축복받은 분이 계시지 않는 한, 자신에게 말하는 것은 별로 유익하지 않습니다. 아, 그렇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마음을 토로하는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다윗이 시편 42편에서 한 말을 기억하십니까? "내가 내 속에 내 영혼을 쏟아 붓나이다." 만약 물병에 담긴 물을 그 안에 쏟아 부을 수 있다면, 물은 여전히 ​​그 안에 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윗이 "백성들아, 너희 마음을 그 앞에 쏟아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라고 말한 것은 참으로 위대한 구절입니다. 물병을 가져다가 바닥을 위로 향하게 하여 그 안에 있는 것을 다 쏟아 버리십시오. 이것이 진정한 위로입니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기 자신으로 쏟아 붓는 것은 비참한 변화입니다. 하나님 앞에 쏟아 붓는 것은 즉각적인 안도감을 얻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위로도 얻지 못하고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여전히 불안과 근심에 잠겨 있을지도 모릅니다. 자, 바로 다윗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제 본문은 여러분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네 번째 “언제까지?”라는 말은 그 사람이 없는 슬픔을 보여줍니다. “어느 때까지 내 원수가 나보다 높겠느냐?” 외부에서 누군가가 “오, 당신은 항상 비참하군요! 당신 곁에 있는 사람은 누구든 비참하게 만듭니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사람의 슬픔을 더욱 가중시킵니다. 브닌나가 한나의 불임에 기뻐하며 “한나를 심히 자극하여 근심하게” 한 것도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누군가, 특히 매우 “솔직한 친구”에게 이런 일을 당하는 것을 경험합니다. 솔직한 친구는 대개 설탕을 약간 넣어 달게 만든 원수에 불과하며, 노골적인 원수보다 더 심한 말을 할 기회를 노립니다. 당신의 가족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로부터 구원하시기를 바라는 우리의 큰 원수가 있습니다. 그는 또한 기회가 될 때마다 우리를 이기고 기뻐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문제는 사탄과 그의 아군들이 우리를 두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말, "나의 원수여, 나를 보고 기뻐하지 마십시오. 내가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법을 아직 배우지 못했습니다. 이 마지막 손길은 어쩌면 이 사진 속에 "오늘 밤 제 초상화를 보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저는 방황하다가 큰 곤경에 빠졌고, 저 혼자입니다."라고 말하는 누군가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여기 여러분과 함께하는 다윗이 계시고, 다윗의 주님도 여러분과 함께하십니다.

     첫 번째 사진은 불평하는 남자입니다.

     II. 첫 번째 관점을 벗어나 두 번째 관점으로 나아가게 되어 기쁩니다. 같은 인물의 두 번째 모습은 6절에 나오는데, 한 남자가 "내가 여호와께 노래하리니, 주께서 나를 후히 대하셨음이로다"라고 노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는 우리가 전에 본 그 사람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울부짖는 것을 그만두고 노래하기 시작했습니다. 첫째, 그의 마음이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5절을 읽어 보세요. 그는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단지 겉모습의 기쁨이 아니라 진정한 기쁨입니다. 그의 마음이 기뻐하고 있습니다. 깊은 슬픔에 잠겨 있다가 갑자기 하나님의 영에 이끌려 "같은 사람인 줄 몰랐네"라고 말하는 친구를 본 적이 있습니까? 슬픔은 인간의 얼굴에 기묘한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어렸을 때 할아버지 댁에 오시던 한 부인이 기억납니다. 그 부인의 얼굴은 보기에도 끔찍했습니다. 제가 그 슬픈 부인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그들은 "조용히 해라, 얘야."라고 말하며 그녀가 사라질 때까지 입을 다물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녀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무엇이 저를 놀라게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제 기억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제가 그녀를 본 지 거의 50년이나 흘렀을 테지만요. 하지만 사람이 기쁨, 특히 영적인 기쁨으로 가득 찰 때, 얼굴이 어떤 변화를 겪는지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사진을 찍기 위해 당신 자신이 되어 보았는데, 그 사람이 당신 목덜미에 쇠집게를 꽂으면 당신은 바로 떠나버립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 당신의 몸은 그곳에 서 있지만, 당신은 쇠막대를 따라 내려가고, 당신은 거기에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모습은 당신이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의 번데기, 당신이 한때 있었던 그 케이스이지만, 당신은 이미 사라졌습니다. 자, 이제 당신의 마음에 기쁨이 가득할 때, 정말로 모든 사람이 당신의 얼굴에서 그것을 볼 수 있을 때, 당신의 눈은 반짝이기 시작하고 얼굴 전체가 환해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글쎄, 사실 그는 보통 평범해 보이는 사람일 뿐이지만, 그런 마음 상태에 있을 때는 놀라운 아름다움이 그에게 있다"라고 말합니다. 자, 주님께서 여러분 중 일부를 위해 그 변화를 이루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집에 돌아갔을 때 어머니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마리아, 너는 성막에 갔을 때와는 완전히 달라졌구나! 요한, 정말 많이 변했구나! 너무 지루하고 무거웠는데, 이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구나." 네, 비밀은 바로 다윗과 마찬가지로 요한에게도 마음이 기쁘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그의 혀는 찬양합니다. "내가 여호와께 노래하리니." 우물에 잠긴 것이 양동이에 흘러넘칠 것입니다. 마음속에 있는 것이 머지않아 입으로 올라올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한 신자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고, 아마도 어린이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할 것입니다.

"나는 항상 노래하고 싶어요.
눈물이 닦여요.
예수님은 내 친구이시니,
나는 매일 그분을 섬길 거예요."

어쩌면 감정을 억누르려고 애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참으로 끔찍한 구덩이에서 당신을 건져내셨다면, 당신의 감정은 완전히 억눌리지 않을 것입니다. 마치 당신이 침묵을 지킨다면, 돌들이 울부짖기 시작할 것처럼 느낄 것입니다. 기뻐하는 마음은 곧 찬양의 혀를 만듭니다.

     다음으로, 그 사람의 판단이 자족적이라는 점에 주목하십시오. 그 냉정하고 계산적인 능력은 이제 하나님의 행하심을 읽기 시작하고, 이전에 도달했던 것과는 매우 다른 결론에 도달합니다. 여러분 중 어떤 분들은 어렸을 때 "왜, 그리고 왜"라는 책을 배웠을 것입니다. 자신의 감정에 대한 "왜, 그리고 왜"를 갖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이제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여호와께 노래하리니, 이 문제를 철저히 저울질하고 판단한 후에, 그분께서 나를 후히 대하셨음을 증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분께서 나를 잊으셨다고 생각했지만, 그분께서 나를 후히 대하셨습니다. 나는 그분께서 그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셨다고 생각했지만, 그분께서 나를 후히 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분께서 나를 매우 엄하게 대하신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런 모든 말을 되돌립니다. 주님, 나는 내 말을 쓴 나물과 함께 먹어 치우고, 내가 그 말을 사용했던 것을 후회합니다! 당신은 나를 후히 대하셨습니다." “내 영혼아 네 안식처로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히 대하셨음이로다.” 잊혔다고 생각했던 이 불쌍한 사람은 이제 하나님께서 그의 식탁에 차려주신 음식을 바라보고, 베냐민의 몫이 다른 형제들에게 준 것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의 판단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오, 주님께서 그를 어떻게 대하셨는가에 대해서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주께서 내 원수들 앞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시니, 내 잔이 넘칩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이다.”

     이제 그의 판단이 바르게 세워졌고, 마음과 혀와 판단이 모두 바르게 되었으니, 그의 결심도 바르다 . 그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나는 주님께 노래하리라." "나는 지금 노래할 뿐만 아니라, 이것을 결심하리라. 나는 충분히 오랫동안 한숨 쉬어 왔으니, 이제 노래하리라. 나는 신음하고 불평해 왔으니, 이제 노래하리라. 나는 주님께 노래하리라." 나는 이 결심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현재의 기쁨뿐만 아니라 그의 삶 전체에 그 기쁨을 투사하겠다는 결심이기 때문이다. "나는 주님께 노래하리라." 오늘 밤 여러분 중 일부는 성막에서 나가면서 이렇게 말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좋아요, 노래하겠습니다. 네, 노래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노래하겠습니다. 주님께 노래하겠습니다. 일할 때도 노래하겠습니다. 침대에서도 노래하겠습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도 노래하겠습니다. 밤에 잠자리에 들 때도 노래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새 노래를 내 입에 담아 주셨으니, 그것을 붙잡을 수 없습니다. 노래해야 합니다. 주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저희는 여러분을 막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능한 한 많이 주님께 노래하도록 격려할 것입니다.

     세상에는 노래가 절반도 부족합니다. 이맘때쯤이면 시골의 이른 아침 음악은 언제나 저를 꾸짖는 듯합니다. 새들이 하늘을 날고, 우리를 깨웁니다. 새들이 깨어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새들 사이에는 일종의 다툼이 벌어지는데, 각자 가장 감미롭고 큰 소리로 노래하려 애쓰고, 하나가 다른 하나를 부르면 다른 하나가 화답합니다. 새들은 날면서 노래하고, 둥지를 틀면서 노래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너무나 아름다운 합창을 만들어냅니다. 그 작은 생명체들이 작은 목구멍에서 쏟아내는 음악의 폭포, 나이아가라 폭포를 만들어내는 것이 종종 놀랍습니다. 아, 하나님의 백성들이 더 많이 노래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저는 빨래터에서 노래를 부르던 하녀가 생각납니다. 그녀의 여주인이 그녀에게 "제인, 왜 항상 노래를 부르니?"라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그 노래는 나쁜 생각을 쫓는 효과가 있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여든 살이 다 되어가는 나이 드신 감리교 형제님이 생각납니다. 그분은 길을 따라 아주 느린 걸음으로 걸어가셨는데, 걸으면서 옹알이하는 작은 노래 소리가 들리지 않는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만약 그 집 문 앞을 지나가는데 집에서 어떤 소리가 들린다면, 그것은 바로 그 노인이 노래하는 소리였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찬송하는 소리 외에는 다른 소리를 내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아, 우리가 끊임없이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마음이 힘들 때 예수님께 찬송가를 부르세요 .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말씀드리세요.
위로가 되든 불평이 되든 말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마치면 또 다른 노래를 부르십시오. 위로의 찬송이든 불평의 찬송이든, 여전히 그분의 이름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십시오. 그리고 오늘 밤 나가면서 "내가 사는 동안 주 나의 하나님께 노래하리이다"라고 결심하십시오.

     사진 두 장이 있습니다. 앨범에 넣어 잘 보관하세요.

     III.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어떻게 일어났을까요? 불평하는 남자와 노래하는 남자 사이의 연결 고리는 무엇일까요? 1등은 어떻게 2등이 되었을까요? 이 울부짖는 남자는 어떻게 가수가 되었을까요? 그는 어떤 과정을 거쳤을까요?

     집에 돌아가서 이 시편 13편을 다시 읽어 보면, 그가 가장 먼저 한 일 이 하나님께 간청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그는 주님께 자신의 사정을 말씀드리고, 그 사정을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한 후 간구했습니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돌아보시고 들으소서. 내 눈을 밝게 하소서. 내가 죽음의 잠을 자지 아니하게 하소서." 애통하는 여러분, 위로를 얻는 첫걸음은 하나님께 가서 이 문제를 가져가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주머니에는 랍사게의 편지가 있습니다. 그 편지는 여러분을 슬프게 할 만큼 끔찍한 편지입니다. 제가 설교하는 동안 여러분은 속으로 "아, 나야! 집에 가면 그 편지 생각에 잠 못 이루겠다."라고 한숨을 쉬었습니다. 여러분 중 다소 예민한 기질을 가진 사람들은 사소한 일에 마치 송곳처럼 계속 찔립니다. 여러분은 그 일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제 집에 돌아가면 그 편지를 주머니에서 꺼내 주님 앞에 펼쳐 보시기를 권합니다. 저는 여러 번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런 어려움 없이 누가 그런 교회의 목사가 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저를 혼란스럽게 했던 그 문제에 대해 최선을 다했지만,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켰습니다. 마침내 저는 그 문제를 주님 앞에 내려놓고 기도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항상 제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시는 그 문제와 관련을 맺지 않겠습니다. 다 끝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하시기를 권합니다. 여러분의 짐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그 선반 위에 올려놓으십시오. 하지만 다시 내려놓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대로 두십시오. 그대로 두십시오. 그리고 다 끝냈습니다. 여러분이 그 문제에서 벗어날 때 주님께서 여러분을 그 어려움에서 건져내실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를 계속 끌어안고 있지 마십시오. 기도로 주님께 가져가십시오. 변호사가 있고 소송이 진행 중인데, 소송 당사자가 여러분에게 와서 "어떻게 하실지 듣고 싶습니다."라고 말한다면, "변호사에게 맡겼습니다. 변호사를 만나 뵙도록 하겠습니다. 변호사에게 의뢰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 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마십시오. 두 사람이 사업을 관리한다면, 한 사람은 바보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누가 바보가 될지 알고 있습니다. 변호사를 두지 말고 스스로 변호사가 되십시오. 아니면 소송을 대신 처리해 줄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맡기십시오. 왜 개를 키우면서 스스로 짖습니까? 모든 일에 그렇게 하십시오. 하나님 앞에 문제를 내놓았으니, 스스로 떠맡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방금 옛 속담을 인용하여 여러분을 웃게 했지만, 친구 여러분, 기도로 하나님께 맡긴 사건을 떠맡으려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진심으로 촉구합니다.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이미 그렇게 했다면, 여러분의 대변자가 그 일을 끝까지 해내도록 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 당장 가서 문제를 털어놓는다면, 곧 말하는 방식을 바꾸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래, 내일 동생을 만나러 갈게." 형제를 만나지 말고 아버지를 만나러 가십시오. "아, 하지만 친구를 불러야겠어요!" 내가 너에게 바라는 건 바로 그거지만, 네가 생각하는 그 친구는 아니야. 친구의 친구를 불러. 네 모든 고민과 어려움을 그에게 털어놓아. 그리고 그렇게 한 후에,이제 그만하고 그에게 맡겨 두세요. 그러면 곧 노래를 부르기 시작할 겁니다.

     다음으로, 다윗은 기도하고 자신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 가져온 후 주님을 신뢰했습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5절을 읽어보면 이야기 전체가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나는 주의 인자하심을 의지하였사오니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이제 고통받는 모든 성도 여러분을 떠나, 깊은 영혼의 고통에 빠진 죄인에게 여러분이 스스로에게 했던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첫 번째 사진은 나와 정말 닮았네. 두 번째 사진과는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없네." 아닙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 "나는 주의 인자하심을 의지하였나이다"라고 말한다면, 여러분도 두 번째 사진과 같을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질병과 마음의 질병에 대한 해결책입니다.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그분은 저 십자가에 달려 계십니다. 그분을 믿으십시오. "나는 그분이 내 것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노라."라고 제가 말했던가요? 여러분이 그것을 깨닫도록 말입니다. 그분을 믿으십시오. "아, 하지만 저는 그분에게 드릴 만한 선한 마음이 없는 것 같습니다." 내가 그에게 뭐라도 가져오라고 했나? 그를 믿어. 그를 믿어. 그를 믿어. 오, 하나님의 자녀여, 이것이 네가 배우고 싶은 교훈이다. 신뢰! 오, 죄인이여, 빛과 평화 속으로 들어가려면 이것이 네게 꼭 필요한 교훈이다. 신뢰! "내게는 죄가 너무 많아." 믿어! "하지만 나는 죄를 지으려는 경향이 있어." 그가 그 경향을 극복하도록 믿어. "하지만 나는 노력했어." 아니요, 노력하라고 한 게 아니라 믿어야 한다고 한 거야. "하지만, 나는, 노력할 거야." 아니요, 노력하지 마. 노력하라고 한 게 아니야. "선생님, 저는 믿으려고 노력하겠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믿으려고 노력하라고 한 게 아니야. 믿으려고 노력하는 건 믿는 것과 정반대야. 만약 그리스도께서 거짓말쟁이시라면, 그분을 믿지 마. 만약 그분이 참되시다면, 그분을 믿어. 만약 그분이 너를 구원할 수 없다면, 그분을 믿지 마. 하지만 그분이 전능하신 구세주이시니, 그분을 믿어야 해. 오, 천 개의 천둥이 동시에 외치듯 "믿으라!"라고 큰 소리로 외칠 수 있다면! 오, 영혼아, 율법의 길은 순종하는 것이다. 당신이 너무 약해서 따를 수 없는 어려운 말씀입니다. 하지만 복음의 길은 신뢰, 신뢰 , 신뢰입니다. 그 길을 배우고 나면, 나중에 순종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고, 신뢰를 통해 순종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첫 번째 단계는 신뢰입니다. 다리가 부러져 걸을 수 없습니까? 당신을 안고 갈 수 있는 분께 의지하십시오. 무거운 짐을 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힘껏 기대십시오. 그 무게가 이전보다 더 무겁습니까? 그렇다면 더욱 힘껏 기대십시오. 신뢰하십시오, 절대적으로 신뢰하십시오. 눈먼 사람이 앞을 볼 수 있는 분께 손을 내밀어 인도를 구하듯이, 당신도 예수님을 신뢰하십시오.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께 손을 내밀고 오늘 밤 그분을 신뢰하십시오.

     자, 첫 번째 사진은 치워 두세요. 믿으셨다면 이제 앉으세요. 그러면 다시 당신의 모습을 찍어 드리겠습니다. 당신의 모습이 6절 말씀과 일치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당신은 이렇게 말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주님께 노래하리라. 나는 노래하며 집으로 돌아가리라. 나는 믿었노라. 나는 구원을 찾았노라."

     주님, 이 사람들이 당신을 믿도록 인도하소서! 왜 그들은 당신을 믿지 못합니까? 무슨 일을 하셨기에 그들이 당신을 의심합니까? 주 예수님, 제게 백만 명의 영혼이 있다 해도 저는 그들 모두를 당신께 맡기겠습니다. 당신께서 그들을 눈보다 더 희게 씻어 주실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믿으십시오.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그리스도를 위하여, 하나님, 여러분이 믿도록 도와주소서! 아멘.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