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공의
시편2:1-12
언젠가 형광등을 고치기 위하여 동네에 있는 전기 상회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평소에 안면이 있는 그 전기공은 일에 대한 즐거움 보다는 수심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괴로움을 털어 놓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한 주 동안 눈물로 보냈습니다. 일이고 무어고 다 집어치우고 싶습니다. 지금은 죽고만 싶고 아무런 의욕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그가 왜 그렇게 비관하고 분노하며 절망하고 있는가를 알아 보는데
그는 속 마음을 털어 놓기 시작합니다.
일주일 전 그의 여섯 살난 아들이 집 근처에서 놀다가 동네에 들어온 5톤짜리 트럭에 치여 다리 한쪽이 다 끊어지고 발가락들이 절단되었고 살이 떨어져나가 그 다리를 못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린이들이 노는 동네에 차를 몰고 들어온 그 운전기사는 24일간의 면허 정지 처분을 받고, 종합 보험 덕택에 그 이상의 어려운 문제는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병원에 눕혀 놓고 넋이 빠져 있는데 사고를 낸 그 운전기사는 치료비는 지불했으니 자기의 책임을 다했다는 듯 한번도 병원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사고를 낸 그 기사가 밉기에 앞서서, 이런 일이 있어도 더 이상 어디다 하소연을 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불만 때문에 더욱더 뼈에 사무치는 울분과 분노와 좌절을 느끼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분노 가운데 “이렇게 억울할 데가 어디 있겠습니까? 내 아들은 이제 일생 동안 장애받고 살게 되었는데 누가 과연 이를 보상해 줄 수 있겠습니까? 또 아무리 큰 보상을 한다 해도 그것이 보상이 됩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꼭 이와 같은 형태는 아니라 해도, 불의 때문에 한이 맺힌 사람들이 많습니다. 혹자는 기업주를 향해, 혹자는 동료 기업인들을 향해, 혹자는 정부를 향해, 혹자는 친구로 믿었던 사람들을 향해, 또 혹자는 배우자를 향해 분노아 피해의식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있어서는 공의가 존재하지 않고, 공의를 기대할 수 없다는 데서 오는 울분이 더욱더 클 것입니다. 만일 언젠가 공의가 실현될 것이라는 보장만 확실히 주어진다면 그래도 어느 정도 숨을 돌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을 때 앞에서 말한 전기 상회 기사처럼 마음 속에 불을 질러 놓은 것 같은 상태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불의는 개인 대 개인, 개인 대 국가 및 사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 대 국가에도 존재합니다. 강대국이 약소 국가를 무력으로 지배하고 폭력을 가할 때 그 비정함이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이런 불의를 역사적으로 여러 번 겪었고, 또 지금도 GATT 무역 협상을 통해서 경제적인 무력에 의해 피해를 받는 형태로써 이것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불의에 대하여 괴로워하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인간이 먹을 것만 있으면 되는 동물과는 다릅니다. 인간은 공의가 실현될 수 있어야 그 마음에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다행히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 세상을 볼 때 공의는 존재합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 하나님은 불의에 굴하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2:1-4).
◉ 하나님은 의로운 통치를 하시기 때문입니다(2:5-9).
공의가 이세상에 있는 것은
가. 불의에 굴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2:1-4)
죄가 세상에 들어온 후 세상은 하나님께 대하여 늘 반항해 왔습니다. 아직 사회가 구성되지 못한 상태에는 그 상태대로 반항했습니다. 창세기 10장의 바벨탑 사건은 한 좋은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국가가 형성되고 난 후에도 이런 반항은 계속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그 좋은 예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 그 기름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가깝게 보면 이런 반항은 중동 지방의 한 군주인 다윗에 대한 것이라고 단정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이런 반항이 여호와와 그 “기름 부음 받은자”를 대항하는 것이라고 그 범위를 넓히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이 시편 말씀이 예측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과거 어느 때보다 국가들이 하나님께 반항을 하고 있습니다. 국가든 개인이든 한 사회이든간에 교만하여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할 때에는 다음 몇가지 현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만 절대적인 분이시며 모든 군왕들과 국가들은 그 종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군왕과 국가들이 자신이 마치 하나님인 것처럼 행세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게 될 때에 하나님의 권위의 남용이 뒤따르게 됩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남용하는 곳에는 반드시 불의가 있고 불의가 있는 곳에 인격이 파괴되는 일이 있게 마련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질서의 파괴입니다. 스위스 신학자 발트는 교회의 교역자들만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정치가도 하나님의 종이라고 했습니다. 종이 할 일은 그 주인을 공경하며 그 주인이 위임한 일을 충성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정치인들이 세계 도처에서 하나님의 일을 정면으로 방해가고 있습니다. 화평케 하는 일과 아물게 하는 일과 공의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일이 방해될 때에 아픔과 고통과 핍박과 고문들이 존재하게 됩니다.
우리 사회에서 하나님의 영역이 침해당하고 하나님의 질서가 파괴됨에 따라 나타나는 각종 불의의 피해를 입어 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상업을 하는 사람이든, 학교에서 교편을 잡는 사람이든, 농사를 짓는 사람이든, 노동을 하는 사람이든, 입학을 준비하는 학생이든 이 시편 기자와 같은 탄식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의 시선이 현실에만 고착되고, 시편 기자가 본 것처럼 더 먼세계, 곧 메시야가 통치하는 데까지 보지 못한다면 이처럼 불의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고 살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처럼 현세상의 현상들에만 집착하지 않고, 현세상이 실존하는 것과 똑같이 실존하는 메시야의 세계를 봄으로 말미암아 공의가 마지막으로 실현되는 것을 확신하게 될 때 현재 경험하는 불의도 이겨 나가고, 또 계속 공의를 행하려는 의욕도 상실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에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하는 말은 우리에게 한없는 안도감을 줍니다. 이는 불완전한 정치인들이 제공하는 그 이상의 질서가 아직도 건재하다는 말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표면적으로 볼 때에는 불의가 승리하고 힘 많은 나라들이 약한 나라들을 마음대로 회롱할 수 있는 것같이 보이나 하나님은 불의의 세력들에 의하여 밀려나지 않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하늘’에 계시므로 인간이 그 영역을 침범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어떠한 불의도 의를 실행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지를 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낮은 데 있는 인간들의 무모한 행동을 높은 데서 내려다 보고 비웃으십니다.
공의가 이 세상에 아직도 있는 것은
나,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2:5-9)
이 시편은 다윗의 왕위에 대하여 말하는 것같이 시작되었으나 이제는 완전히 현실 감각을 잃은 것처럼 이상적인 세계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확실히 이상 세계입니다. 공의가 존재하는 세계, 불의가 불의로 판명되고 공정한 처벌을 받는 세계 - 이것이 곧 다윗이 본 메시야의 통치의 특징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처럼 언젠가 메시야가 와서 공의를 실천하고 하나님의 뜻을 세울 것이라고 믿고 있었으며, 이것을 우리는 메시야 사상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시편들 중 신약 저자들이 인용한 것만도 15편이나 됩니다. 그 중에서도 시편 2, 45, 110편 등은 장차 오실 메시야가 우리를 통치할 ‘왕’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또 하나님 그 자신이시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특히 여기에서는 ‘왕’과 ‘아들’이라는 개념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1.‘왕’으로서의 통치(2:6)
메시야적 시편은 메시야가 오심으로 말미암아 확증되었습니다. 신약 저자들은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복음을 저파하셨는데, 그 복음 내용이 곧 ‘하나님의 나라’이었습니다.(막1:15), 또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안 에 임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17:21)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고 왕을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에 있으며 세상 법칙에 순응해야 하되 이보다 더 높은 하나님의 나라의 왕의 통치하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메시야가 왕으로 완전히 통치하는 시기는 아직도 미래에 속합니다. 시편2편4-9절은 바로 이런 미래의 시기를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이 ‘때’에 대하여서는 이사야 선지자 가 11장에서 언급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저희를 놀래어 이르시기를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하나님은 그 통치권을 아직도 보유하고 계십니다. 현상만 볼 때 이를 알지 못하고 갈등하며 분을 내던 사람들도 말씀을 통하여 이처럼 하나님께서 그 통치권을 아무에게도 양보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보게 되면 엄청난 위로를 받게 됩니다. 이는 세상의 소욕대로, 악인의 뜻대로 이 세상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공의로운 왕이 성산에서 명하시는 뜻에 따라 공의가 실현되리라는 것입니다.
2.‘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시어 통치(2:7)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이 ‘왕’은 다윗처럼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시리라고 시편 기자는 그 왕의 성격을 규정했습니다.
이 왕은 천사들보다도 높고 세상의 왕들보다도 높은 분이십니다. 이분은 인간이상의 분이십니다. 신약 저자들이 이 부분을 인용할 때 부활과 결부시키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시편 2편에서 부활 사상을 찾아 보았습니다. 장차 오실 메시야가 왕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구약 저자들은 묘사했던 것입니다. 단지 유대인들을 혼돈케 했고 지금도 그들에게 올무가 디는 것은 이 하나님의 아들께서 친히 죄인들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사실입니다(사53장). 유대인들은 오직 메시야를 정치적인 구세주로서 자신들을 모든 외적인 속박ㅇ드로부터 풀어 줄 정치적인 존재로서만 보았던 것입니다.(참조행1:6)
우리의 ‘왕’ 되시는 메시야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죄를 어께에 메고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피를 흘리고 돌아가셨습니다. 그가 사흘 만에 부활하시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다시 영광의 존귀를 받으시고 왕좌에 앉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 사실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믿고 있던 시편 2편에 약속된 메시야를 정작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내셨거만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어찌 이들만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겠습니까? 많은 세상 사람들이 메시야가 오셔서 이미 메시야적 시편을 입증하셨지만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믿지 않는 것은 고사 하고 심지어는 그를 대적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 믿는 자들마저도 예수님을 믿는 것이 자기의 육신의 안일함을 위하여 믿는 자들도 있습니다. 내가 받을 죄의 댓가를 예수님께서 담당하신 은혜를 받고도 그것을 가볍게 여기거나 감사치도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불신과 상관없이 메시야는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고, 또 장차 “네가(메시야)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하는 부분도 그는 실현하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에서는 종말에 가서 이루어질 이 사실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계 19:11). 그때까지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서 메시야에게 주신 ‘열방’ 곧 ‘땅끝’까지 이르러 왕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야의 통치에 대하여 전하는 특권을 누릴 수 있습니다.
결론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은 메시야가 이미 오셔서 구속사역을 마치시고 승천하시어 이미 왕으로서 취임하신 시대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땅에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이 왕국은 특히 믿는 이들 가운데 강하게 부각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도 빌리보서 2장 5-11절에서 이런 사실에 대하여 언급하였습니다. 하지만 메시야가 전권을 모두 사용하는 것은 아직도 미래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때에 사는 우리에게는 다음과 같은 경고와 권고가 있습니다.
경고(2:10-120
본문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에게 두 갸지 메시지를 말씀합니다.
첫째, 여호와께 굴복하라는 경고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지혜의 시작입니다. 메시야를 왕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함으로써 하나님께 참된 경배가 가능합니다. 하나님께 참된 경배를 드리는 자에게는 이 세상이 알지 못하는 참된 즐거움이 따라 옵니다(11절). 이 사실을 아는 자들은 이를 세상에 깨우쳐 줄 의무와 특권을 갖고 있습니다.
둘째, 여호와 를 대적하는 자들은 때가 늦기 전에 여호와의 긍휼을 구하는 의미로 아들에게 입 맞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이 죽는 것과 죄인이 멸망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것은 최종적인 수단임을 이를 통해서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 전까지는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라고 외치십니다.
권고
그러면 메시야께서 주권적 공의를 이루실 그날이 오기까지 우리는 계속 수동적인 생활만 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 전에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5톤짜리 트럭을 몰고 골록길을 함부로 질주하는 운전기사의 포악성에 의해서 한 귀한 어린 생명이 가차없이 희생을 당하는 현실, 과 사회적인 악 때문에 한 개인이 당하는 피해, 와 제도상의 문제 때문에 겪는 피해 과연 이런 것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입니까?
이에 대하여 우리는 몇가지 반응을 보일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보고 수동적으로 대처하는 것입니다.
이는 길거리를 지나다가 길 한가운데에 차를 세우 놓고 길을 막고 있는 것을 보고도 무관심하게 지나가고, 한 어머니가 비정하게 그 자녀를 학대하는 것을 보고도 이를 피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가 대통령이 되고 누가 국가를 이끌어 가든 상관없이 성경을 읽고 기도만 하면 된다는 무관심한 태도를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의를 이루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할 수 있습니다.
공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폭력이든, 인간의 생명을 희생시키는 것이든 상관없다는 태도입니다.
첫번째 태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근본적인 책임 중의 하나인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다스리라는 명령을 망각하는 것입니다(창1:28),
한편 둘째 입장은 공의를 위하여 불의를 행해도 좋다는 이론이므로 불의를 배척하시는 하나님의 법칙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세번째 입장만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합당합니다. 그것은 공의로운 과정을 통하여 공의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불의가 규범처럼 여겨지는 현대사회 가운데서 공의로운 방법만으로써 공의를 이룰 수 있는가 말입니다. 옆 친구가 부정 행위를 통해 나보다 더 좋은 성적을 얻은 경우에 나만 공의로운 방법을 고집한다면 과연 내가 손해를 모면할 수 있을까요?
결국 공의로운 방법으로 공의를 이루려고 할 때 우리가 손해나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많은 것은 너무나 명확한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메시야가 오셔서 공의로운 나라를 완성하기까지 공의로운 방법으로 공의를 이루는 데서 일보도 양보하지 말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럴 때 기업주는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보다 이익을 덜 보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렇게 할 때 학생은 부정행위를 하는 이들보다 성적이 ‘떨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럴 때 애매하게 욕을 먹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이럴 때 어떤 이들은 공의롭게 살다 보니까 회사 진급이 늦어지고 심지어는 낙오되어 패배자처럼 취급을 받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짧은 안목으로 보았을 때 이들은 손해를 보는 것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나 긴 안목 곧 하나님의 안목으로 보았을 때 이들이 곧 승자입니다.
그 이유는 불의에 굴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를 격려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또한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가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고 미래에 더욱 그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약속을 받으시고 확실한 믿음으로 최후의 승리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설교자료 > 시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 57:7]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1) | 2023.10.04 |
---|---|
[시 61:1] 마음이 낙망되고 곤고할 때 (0) | 2023.10.04 |
[시 90:10] 시간으로 헤아릴 수 없는 인생 (0) | 2023.09.23 |
[시 51편 설교] 나의 죄를 사하소서 (0) | 2023.09.09 |
시 73:1, 형통인가 재앙인가? (0) | 2023.07.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