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란 무엇인가?
말씀 : 눅15:1-7
1.회개(repentance)란 말의 뜻
많은 교인들이 회개하자고 하면 "무엇, 무엇을 잘못했고 또 무엇, 무엇을 잘못했으니 용서해주십시오"라고 비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도 회개 속에 나타나는 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회개라고 한정짓기는 어렵습니다. 성경은 그런 것을 자백(confess, 요일1:9)이라는 말로서 따로 설명해줍니다. 무엇 무엇을 잘못했고 심지어 용서해달라고 빌지만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함(repentance)이 없으시니라』(롬11:29)
이 말씀에서 후회함이 없다는 뜻은 번복하거나 방향을 바꿀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후회한다는 것은 잘못 가고 있다는 것이고 그 잘못 가는 것을 안 건만으로는 회개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올바른 방향으로 돌이키는 것, 그것이 회개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가룟 유다는 분명히 그 자신이 잘못가게 된 것을 알았습니다.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게 한 죄가 그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가롯유다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무죄한 피를 배반하여 넘김으로 죄를 지었다...』(마27:4a)
그는 자신이 죄를 지은 것을 시인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회개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잘못 가고 있는 것은 마귀들도 알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은 가장 합당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돌이키거나 번복할 필요가 없습니다. 회개란 돌이키는 것을 말합니다.
2.무엇이 잘못 가는 방향인가?
아담과 하와로부터 모든 인간은 두 가지의 길에 서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의 행위, 정성, 열심을 가지고 자기의 의로움을 드러내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신뢰하는 것입니다. 사실, 율법은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신뢰하도록 하기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아무도 완전한 자라 할 수가 없습니다. 율법은 사람이 죄인인 것을 드러내고 하나님 앞에 한없이 불완전한 존재인 것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율법을 통해서 자기의 무능함과 죄인 됨을 고백해야 하는데, 오히려 자기들이 얼마나 잘난 사람들인지를 입증하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범죄한 아담이 그 수치를 가려보고자 무화과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입었습니다(창3:7). 이것이 자기의 의, 자기 행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보려는 자세입니다. 성경은 이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합니다.
『그러나 다 불결한 것 같고 우리의 모든 의는 더러운 걸레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처럼 시들며 우리의 죄악은 바람처럼 우리를 옮겨갔나이다』(사64:6)
잎사귀가 시들 듯, 우리들이 만들어 걸친 의는 자랑할 게 못됩니다. 그것은 걸레와 같습니다.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그 스스로 옳게 보일 수가 없는데, 그럼에도 마치 그 자신 스스로의 어떠함으로 옳게 보이려고 하는 것은 걸레를 걸치고 나오는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아담이 입어야 할 옷은 하나님께서 마련해주셨습니다. 그가 원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원하셔서 가죽옷을 입히셨던 것입니다(창3:21). 이 가죽옷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모형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입어야 할 것이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
『너희 중에서 그리스도 안의 침례를 받은 자는 다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갈3:27)
진정으로 회개한다는 것은 자기의 행위를 신뢰하는 자리에서 떠난다는 것입니다. 소경 거지 바디메오는 예수님께서 부르셨을 때, 그 자신이 걸치고 다니던 누더기 옷을 버렸습니다(막10:50). 우리도 역시 주님께 돌이킬 때에는 그 동안 자기가 자랑하던 행위들을 버리게끔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참된 회개입니다.
어느 날 성전에 두 사람이 기도하기 위해 올라왔습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는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십일조를 드리며, 죄인들과 같이 지내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세리였는데, 그는 감히 얼굴을 들지도 못한 채, 가슴을 치며 "나는 죄인입니다. 이 죄인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눅18:10-13). 바리새인은 자기의 행위를 의지해서 하나님께 나온 사람이며, 세리는 자기에게 어떤 선한 것이 없음을 알고 자비를 구하는 낮은 마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참된 회개는 그것입니다. 당연히 세리가 의롭다함을 얻고 성전에서 내려갔습니다(눅18:14).
성경은 우리에게 죽은 행위들로부터의 회개를 말하고 있습니다(히6:1). 그런데 무엇이 죽은 행위입니까? 율법행위입니다. 율법을 의지해서 자기가 잘 하고 있다는 자기 행위를 신뢰하는 것이야말로 죽은 행위입니다. 내가 해보려고 했고 내가 이 정도라고 하는 것을 입증해 보이려고 했던 것들을 회개해야 합니다.
3.어느 방향으로 돌이킬 것인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믿음으로 돌이키는 것을 참된 회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회개해야 할 방향은 하나님이십니다.
『유다인에게나 그리스인에게나 하나님을 향한 회개(repentance toward God, KJV)』(행20:21)
회개는 우리의 구원의 해답이 내 안에 없고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나의 부끄러움과 수치를 가릴 수 있는 길이 내 안에 없고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행26:20) 그것을 참된 회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잠기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4.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보여주는 회개
그리스도에 관한 많은 부분들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가 하늘에 계신다든지, 그가 또한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든지,...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분명한 것이었습니다. 저가 남은 구원하였지만 자기는 구원하지 못한다(마27:42)며 사람들이 조롱했던 그 순간이 인간의 역사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조롱을 당하시면서 까지 십자가에 달리셨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십자가를 생각해봅시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행위로는 절대 구원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 스스로의 능력이나 행위로, 또는 정성으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면 구태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달려 돌아가실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 분께서 꼭 거기 십자가에 달리셔야만 했던 것은 내 행위를 신뢰하는 것으로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인간의 행위가 무능력 그 자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 자신들이 전적으로 무능하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무능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하셨던 것입니다.
5.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 아홉?
왜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하셨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은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주님께 나아왔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들을 맞이하는 주님을 비방했습니다(눅15:1-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바로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느끼는 의인 아흔 아홉과 같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그렇게 찾아 헤매어, 마침내 찾아 가지고 그 목에 걸고 돌아온 길 잃은 한 마리의 어린양은 세리와 죄인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순진한 양은 무리에서 이탈하면 다른 짐승들을 만나 공격하거나 방어할 능력이 전혀 없기 때문에 그들의 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한 마리의 길 잃은 양은 자기의 힘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무능한 사람을 말합니다. 내 수고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 그 손길을 구하는 것, 이러한 회개가 필요합니다.
"나는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해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해주십시오." 바로 이렇게 고백하는 죄인 한 사람이 하늘에서 기쁨이 있게 합니다. 내 힘으로 하려면서 하나님을 떠났던 모든 것에 돌이키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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